‘빨간 비디오’가 ‘n번방’이 되기까지…눈감아준 ‘n번의 순간’들이 ‘성착취’ 만들었다

김희진 기자

암시장 ‘빨간 비디오’가 ‘n번방’이 되기까지

<b>기획·제작 |</b> 심윤지·김희진 기자·이아름 기획자·김유진 디자이너 <b>그래픽 |</b> 엄희삼 기자 사진 크게보기

기획·제작 | 심윤지·김희진 기자·이아름 기획자·김유진 디자이너 그래픽 | 엄희삼 기자

n번방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뜯어보면 한국 사회가 거쳐온 순간들이 읽힌다.

한국 사회는 오랜 시간 성범죄를 ‘놀이문화’쯤으로 용인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책임을 물었다. 법은 피해자를 보호하기엔 굼떴다. 그사이 여성은 거래할 수 있는 ‘콘텐츠’이자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졌다. 사회가 범죄를 방치하고 문제 해결에 실패해온 숱한 순간들이 n번방에 조각을 보탰다.

“성착취 문제 해결은 이제 시작이다.” 조주빈 재판을 앞두고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는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라며 이렇게 말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버닝썬 사건처럼 흐지부지 끝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성범죄가 공분을 불렀다가 관심이 흩어지고,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과거를 경험한 탓이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는 성범죄 연대기를 끊어낼 수 있을까. n번방을 만든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훗날 또 다른 범죄의 전신으로 n번방을 곱씹게 될지 모른다. n번방을 ‘실패의 기록’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 조직적 성착취를 가능케 한 사회를 돌아봤다.

시간을 되감아, n번방을 만들어낸 n개의 순간들이다.

세운상가에서 텔레그램까지

70년대 청계천 세운상가에선
‘왜곡된 성관념’이 거래됐고
90년대엔 범죄라는 인식 없이
여성 연예인 불법촬영물 유통

‘신종’ ‘낯선’ ‘악마’….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이런 수식어가 붙었다. 텔레그램에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이 판매자이자 소비자로 조직적 성착취를 이어갔다. 이들이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던 건 범죄를 가능케 한 생태계가 이미 짜여 있던 탓이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대 청계천 세운상가에 다다른다.

당시 세운상가에선 불법거래물이 사고팔렸다. ‘빨간’으로 불리는 책과 비디오는 n번방의 초석에 가깝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왜곡된 성관념을 본격적으로 실어날랐기 때문이다. 세운상가 암시장에선 불법촬영물도 상품으로 취급했다. 1990년대 여성 연예인 등 피해자의 이름을 딴 불법촬영물이 암시장을 통해 퍼졌다. 범죄라는 인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운상가에서 퍼져나간 조각은 사이버공간에서 자랐다. 불법촬영물 거래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성착취 수익모델이 생겨났다. 제2·제3의 소라넷, 웹하드, 불법촬영물 사이트가 나타날 때마다 가해자들은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하면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학습했다. 한편에선 성착취물 유통과 소비가 ‘일상’이었다. 세운상가에서 비디오를 구하고, 소라넷에서 영상을 내려받던 순간을 거쳐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손안에서 성착취물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텔레그램에서 범행을 한 이들은 세운상가에서 실어나른 인식을 딛고, 성착취 수익모델·유포 협박·미성년자 유인 등을 전부 합쳤다. 익숙한 문법을 엮어 ‘디지털성범죄 종합판’을 만들었다. 범죄를 ‘장르’나 ‘유행’쯤으로 여기는 사이 피해는 불가역적으로 커졌다.

성적 대상화되던 ‘빨간책’의 등장인물은 ‘○○비디오’의 연예인이 되고, ‘국산야동’ 속 일상의 모든 여성으로 확장됐다. 세운상가에서 텔레그램까지 이어진 계보의 모든 순간이 n번방을 완성했다.

가해자의 얼굴을 드러내기까지

소라넷 등 성착취 모델 거쳐
‘디지털성범죄 종합판’ 탄생
‘피해자다움’ 새긴 법도 일조
n번방 가능케 한 사회 변해야

그동안 성범죄자들은 왜 처벌받지 않았을까. 돌아보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최초의 형법은 성범죄를 ‘정조에 관한 죄’로 묶으며 한국 사회에 ‘피해자다움’을 새겨넣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던 법은 “흠결이 없는 아동만” “순결한 피해자만” 등으로 변주하며 반복됐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서도 가해자는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겠다”며 피해 여성을 낙인찍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현실을 악용했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 17년 만에 폐쇄된 ‘소라넷’은 운영자 한 명만 징역형을 받았다. 붙잡히지 않은 ‘소라넷의 후예’들은 ‘n번방의 전신’ AV스눕, 다크웹 등을 거쳐 텔레그램으로 이어졌다. ‘잡히지 않는다’는 성착취 가담자들의 호언장담을 완성한 건 다름 아닌 법이었다. 피해자가 숨고, 가해자가 일상을 이어가는 동안 법은 늘 굼떴다. 솜방망이 처벌이 공분을 사면 그제서야 제도를 바꿨다. 충분하지 않게 바뀐 법은 비슷한 범죄를 막지 못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근거한 첫번째 신상공개 결정으로 ‘박사’ 조주빈(25), ‘갓갓’ 문형욱(24)의 신상이 드러났다. “절대 안 잡힌다”던 가해자들의 장담은 “신상을 공개하라”는 260만명의 외침 아래 무력화됐다.

‘성착취’로 불리기까지

과거 불법촬영물은 피해자의 이름을 따 ‘○○비디오’로 불리거나 ‘음란물’로 통칭됐다. ‘성착취’란 표현이 처음 법에 등장한 건 지난 5월이었다. 수사·사법기관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다. 성범죄와 지난한 싸움을 벌여온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회가 n번방에 조각을 보탠 순간마다 누군가는 싸워왔다. 성범죄에 무관심한 사회에서 피해자와 연대했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해달라는 당연한 상식을 어렵사리 법에 새겨넣는 싸움부터 시작이었다. 디지털성범죄와의 전쟁도 이미 수년 전부터 이어져왔다. 2015년 ‘#소라넷하니’로 시작된 싸움은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를 거쳐 ‘#n번방_아웃’ ‘#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로 이어졌다.

피해자를 목격한 여성들은 매 순간 ‘야동’이 아닌 ‘성착취물’이며, ‘놀이’가 아닌 ‘범죄’라고 외쳐왔다. 불법촬영물 유통 창구를 폐쇄해도 계속되는 반동을 겪으며, 크고 작은 전장을 거쳐 텔레그램에 이르렀다. 사회에 만연한 성범죄와 여성혐오를 고발하며 싸워온 이들도 있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의 목소리가 모이고, n개의 미투 운동과 시위 등을 거쳤다. ‘피해자다움’의 허상을 지적하고, 성인지 감수성의 중요성을 알렸다.

“결국 세상은 우리에 의해 바뀔 것이다.” 2018년 혜화역 시위에 등장한 문구다. 피해자에 연대해 맞서던 이들은 세상을 바꿔왔다.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시작으로, 텔레그램 성착취 가해자들을 추적해 ‘성착취’ 범죄로 명명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끝난 걸까. 피해자와 함께 싸워온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라진 건 n번방뿐이다. n번방을 가능케 했던 순간은 사회에서 반복된다. 피해자를 손가락질하고, 불법촬영물을 관람하겠다며 검색어 순위에 올리는 순간들은 과거형이 아니다. 법은 또다시 가해자를 일상으로 돌려보낸다.

여전히 과제가 남은 사회에서 피해자와 연대하는 이들은 가해자의 재판을 지켜보고, 피해자 지원 체계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한다. 과거와 다름없이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가 적힌 손팻말을 든다. 이뤄내야 할 ‘승리’가 남았고, n번방을 만들어냈던 사회가 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바로가기: [인터랙티브] n번방 리와인드, 디지털 성범죄를 되감다

■“가해자 몇 명 처벌로 끝나는 일 아냐…피해자 지원·회복 위한 논의 필요”

디지털성범죄를 밝혀온 ‘추적단 불꽃’과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들을 지난 1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디지털성범죄를 고발하는 데 위협이 따를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는다. 석예다 PD

디지털성범죄를 밝혀온 ‘추적단 불꽃’과 ‘프로젝트 리셋’ 활동가들을 지난 1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디지털성범죄를 고발하는 데 위협이 따를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는다. 석예다 PD


텔레그램 성착취 처음 알리고
공론화 이끈 ‘불꽃’과 ‘리셋’


‘#갓갓의_오프남_집행유예’ ‘n번째_징역_2년6개월’…. 텔레그램 성착취 가담자들의 재판 결과가 나올 때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솜방망이’ 처벌을 지탄하는 해시태그가 등장한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가해자가 일상으로 돌아오고, 비슷한 범죄가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담겼다.

텔레그램 성착취 가해자들은 제대로 처벌을 받을까. ‘추적단 불꽃’과 ‘프로젝트 리셋’은 따로 활동해왔지만 같은 고민을 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제대로 끝내기 위해 손을 잡았다. 한 시민의 제안을 계기로 불꽃과 리셋은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설문조사를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정량화된 형태로 시민 의견을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전달할 수 있도록 직접 질문을 작성했다. 공동소송 플랫폼 ‘화난사람들’과 함께 지난 3일부터 설문조사를 시작해 16일 기준 약 1000명이 참여했다.

불꽃과 리셋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볼 수 있는 범죄가 아닌, 사회가 수십년 역사 속에 외면해 온 끔찍한 병폐”라며 “잠깐 관심받는 동안만 수사와 처벌에 나서고, n번방과 박사방 가해자를 단 몇 명으로 축소해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면 성착취는 반복될 뿐만 아니라 확대 재생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난 11일 불꽃의 활동가 2명과 리셋의 최서희씨(활동명) 등 3명을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불꽃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추적해 세상에 처음 알렸다. 리셋은 SNS에 불법촬영물 신고 활동을 하며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공론화에 앞장섰다. 텔레그램 성착취 주요 가해자들이 재판에 넘겨졌지만 이들의 활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텔레그램에서 성착취방을 신고하고 또 다른 디지털성범죄를 추적한다. 피해자를 지원하고 연대하기도 한다.

“n번방은 결코 단일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들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n번방은 사회가 방치해온 결과물에 가까우며, 가해자 몇 명 재판에 넘겼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대표적인 예로 클럽 ‘버닝썬’ 사건을 들었다. 불꽃은 “2019년 버닝썬 사건 때도 오프라인에서 일어난 성착취 범죄를 온라인에서 유포하고, 찾고, 소비하고, 즐기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며 “그들이 다크웹, 텔레그램으로 유입됐음에도 제재나 진단조차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사건은 약물강간·성폭력·불법촬영 유포 등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한 범죄의 온상이었으나, 성범죄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일어난 개인적인 성문제로 여기는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n번방 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과제들이 남았다고도 했다. 불꽃과 리셋은 성착취 범죄로 이어지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그루밍 방지법, 아동유인 방지법, 함정수사 허용, 스토킹 방지법 등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루밍은 n번방을 비롯한 수많은 랜덤채팅 애플리케이션(앱)에서 성착취·학대로 이어지는 수단으로 드러났다. 스토킹 역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중범죄의 증상으로 나타나지만, 국회와 사법기관 등에서 여성의 두려움을 외면한 채 가볍게만 여긴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매번 성범죄가 발생한 이후 대응하기 급급했다”며 “또 다른 n번방을 겪고 싶은 게 아니라면 사전에 범죄를 차단하기 위해 함정수사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피해회복을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가 가해자의 처벌에 집중하는 동안 피해자 지원체계는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꽃은 “피해자 입장에서 봤을 때 가해자 형량은 높아졌지만 지원은 중구난방”이라며 “피해자가 매번 지원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피해 사실을 설명하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몰수한 범죄수익금을 피해자에게 지원하는 비율을 높이고, 정부가 체계적으로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리셋도 “피해 촬영물을 삭제하는 일도 피해자가 일일이 신고하고,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며 “사회는 피해자의 피해회복을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피해자의 지원 요구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강간문화를 뿌리 뽑지 않는 이상 디지털성범죄는 우리 곁에서 항상 일어날 겁니다.” 불꽃과 리셋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해결되지 않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두고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감시할 예정이다. 리셋은 성범죄 피해자 및 연대자를 위한 ‘챗봇’을 개발하는 등 디지털성범죄 관련 정보 전달 활동에도 주력한다. 불꽃과 리셋이 공동으로 진행 중인 설문조사는 7월 대법원 양형위원회 회의를 앞두고 전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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