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거장들’ 특별기고

(4) “감동을 주는 꿈의 물결” 초현실주의 미술···‘안복’을 누린 전시

글/정준모(큐레이터,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아이를 키우려면 온 동네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보이만스 판뵈닝언 미술관을 보더라도 세계적인 미술관, 박물관은 공짜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을, 도시, 국가라는 공동체가 키워내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번 ‘초현실주의 거장들: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 걸작전’은 장기간의 미술관 공사를 위해 순회전시로 기획됐다. 암스테르담의 코브라미술관(2020년 6월1일~9월27일)을 시작으로 뉴질랜드 웰링턴의 국립미술관인 테파파 통가레와(2021년 6월12일~10월31일)에 이어 서울에서 열렸다. 다음 행선지는 멕시코 멕시코시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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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안다고 자부했던 초현실주의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일천했는지를 스스로 느끼게 해준다. 사실 우리의 현대미술에 대한 ‘앎’은 아주 얇다. 전시장을 찾았을 때 많은 관객이 익숙한 그림과 유명한 작가 이름에 집중할 뿐 모르거나 낯선 것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조금만 공을 들이면, 적어도 친구와 점심 약속을 하기 위해 식당을 검색하는 정도,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차림표를 제대로 읽어보는 정도의 성의만 가져도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알고, 듣고 갈 수 있는 짜임새 있는 전시이다.

특히 작품과 함께 전시된 많은 자료들을 보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금도 유효한 초현실주의 사조가 왜 문학과 미술, 영화와 음악, 사람들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자료들은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1928년 발터 벤야민(1892~1940)이 <일방통행로>에서 초현실주의를 두고 “감동을 주는 꿈의 물결 … 가장 통합적이고 결정적이며 절대적인 움직임”이라고 묘사한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전시다.

일상을 잃어버린 초현실적인 팬데믹 상황에서 만난 초현실주의 미술은 그 이전의 다다이즘이 초현실주의자들의 꿈과 기회, 욕망이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 달리의 ‘서랍이 있는 비너스’(1936/1964)는 비너스의 비밀스러운 꿈과 욕망에 접근하기 위해 서랍을 열자고 유혹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초현실주의의 묘미다.

달리의 ‘서랍이 있는 비너스’. 김종목 기자

달리의 ‘서랍이 있는 비너스’. 김종목 기자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 등 세계적인 사건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환멸을 심어주었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마음을 갖게 했다. 이들은 심오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기를 갈망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은 부족하지만 ‘마음속의 혁명’에 머물러야 하는 나약한 존재였다. 이들 중 일부는 현실 즉 대중문화의 세계로 뛰어들었고, 일부는 초현실에 머물렀다. 회화는 물론 조각과 디자인, 일러스트, 영화와 사진 등 다양한 형식 실험 속에서 자신만의 초현실을 현실로 만들었다. 전시회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놀라운 작업량과 다양성을 보여준다.

에일린 아거 ‘앉아 있는 형상’. 김종목 기자

에일린 아거 ‘앉아 있는 형상’. 김종목 기자

특히 그간 소외된 초현실주의 여성 화가들의 면면도 반갑다. 초현실주의에서 그간 여성은 아내 또는 뮤즈로 가장 자주 등장했다. 한스 벨머(1902~1975)의 작품에서 여성은 남성의 욕망과 환상의 대상이었다. 그로테스크한 실물 크기 인형으로 포르노에 가깝게 묘사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소수의 여성 초현실주의자들은 인지도를 얻지도, 인정받지도 못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들의 작품이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오노라 캐링턴(1917~2011)의 ‘쌍둥이자리는 과수원에 있습니다’(1947)는 마치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년경~1516)가 환생한 듯한 느낌을 준다. 자동기술법을 차용한 드로잉 작품으로 알려진 우니카 취른(1916~1970)은 드로잉을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형태의 파괴 또는 해체로부터 파생되는 생성의 과정으로 취급한다. 자유분방하고 강렬한 색채로 알려진 엘사 스키아파렐리(1890~1973)의 ‘코담배’(1939)도 이색적이다. 에일린 아거(1899~1991)의 ‘앉아 있는 형상’(1936)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기법도 초현실적이다. 죽은 당나귀를 피아노에 올려 놓은 장면 등으로 1929년 파리 첫 상영 당시 소란과 논란을 일으켰던 <안달루시아의 개>의 감독이자 살바도르 달리의 친구였던 루이스 부뉴엘(1900~1983)이 삶의 광기, 부르주아 사회의 성적 위선, 교회의 의미 등을 다룬 영화 <황금시대>(1930)도 초현실주의 단면을 이해할 기회를 준다.

레오노라 캐링턴의 ‘쌍둥이자리는 과수원에 있습니다’ 앞에 선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의 프로젝트 매니저 수잔나 코닉. 김종목 기자

레오노라 캐링턴의 ‘쌍둥이자리는 과수원에 있습니다’ 앞에 선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의 프로젝트 매니저 수잔나 코닉. 김종목 기자

코로나 19 이후 오랜만에 안복을 누릴 기회였다. 하지만 시민 세금으로 설립 운영되는 예술의 전당 전시실의 조악한 조명시설은 실재하는 초현실적인 세계였다. 1960년대에나 볼 수 있던 조명은 관람하는 내내 따라다니듯 관객을 괴롭게 했다. 고액의 대관료 때문에 세금을 낸 관람객들이 다시 비싼 관람료를 지불해야 하는 구조도 바꿔야 한다.

‘초현실주의 거장들: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 걸작전’ 전시장 내 조명. 정준모 제공

‘초현실주의 거장들: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 걸작전’ 전시장 내 조명. 정준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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