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민주주의의 적’인가

이봉수 MBC저널리즘스쿨 책임교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에 명시돼 있는데 국민은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져본 적이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 최대 행사지만 권력의지에 불타는 후보와 열성적으로 조직된 정치세력에 밀려 대다수 유권자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존재다. 번드르르한 공약들을 내놓지만 집권하면 이행률이 매우 낮아 시민들은 열망과 실망을 반복한다. 유권자는, 주주총회에 초청돼 선물이나 챙기는 소액주주 같은 신세다.

이봉수 MBC저널리즘스쿨 책임교수

이봉수 MBC저널리즘스쿨 책임교수

세계가 한국의 촛불혁명에 경의를 표한 것은 광장민주주의가 그만큼 실현되기 어렵다는 방증이다. 광장민주주의가 거의 불가능해진 시대에 그 권력을 대행하는 것이 언론이다. 그리스의 고대 민주주의와 달리 현대 민주주의는 언론이 공론장 임무를 적절히 수행해야 작동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목적이라면 언론은 수단이다. 그런데 한국 언론 상당수는 민주주의 핵심 요건인 표현의 자유를 수단화해 사적 목적을 취한다. 가짜뉴스를 검증 없이 전파해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수익과 영향력을 확대한다.

객관성과 공정성을 상실한 언론은 정치세력의 악용 수단이 된다. “우리가 마음먹고 언론 플레이 하면 다 무효화돼요.” 김건희씨 녹취록에 나오는 이 말은 남편 윤석열씨가 검찰총장일 때 경험에서 나온 듯하다. 그녀는 취재기자도 매수해 정보원으로 활용하려 했다. 수구 언론은 그녀의 발언을 비판하는 대신 ‘김건희 리스크’를 잘 관리해 선거에서 이기라는 식으로 조언한다.

상당수 언론이 민주주의 작동 방해

지금 선거판을 좌우하는 것은 후보의 역량이나 정책 차이가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선수로 뛰는 언론의 편파 보도가 선거판을 흔들고 여론조사가 밴드왜건 효과를 낸다. 일부 언론은 특정 정당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한 몸처럼 움직이고 정당의 선거전략을 제시하며 정당의 머리 구실까지 한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등록된 제20대 대통령 선거 관련 여론조사 건수는 지난해 1월1일부터 올해 2월20일까지 827건이나 된다. 폭증한 여론조사는 수십만 건의 기사로 전파된다. 옥석이 섞여 있지만 싸구려 여론조사는 여론을 오도한다.

미디어가 선거를 주도하는 현상은 2009년 미디어법이 통과되고 4개 종합편성채널이 개설되면서 더 두드러졌다. 이명박 정권은 보수신문인 조·중·동과 매일경제에 채널을 나눠줘 확고한 보수 우위 언론지형을 구축했다. 보수정권은 무리를 해서라도 자기편에 유리하게 제도를 뜯어고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라도 걸림돌을 제거해버린다.

이는 진보정권이 ‘결벽주의 덫’에 걸려 잘못을 바로잡는 데도 주저하는 행태와 대비된다. MBN은 자본조달 방식부터 실정법을 위반했고 TV조선은 법정제재 건수가 그렇게 많은데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언론중재법안도 국민이 180석을 만들어줬으니 그냥 통과시키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8인협의체에 이어 여야 동수 18인 특위를 만들어 민의를 왜곡하더니 결국 법안을 무산시키고 말았다. 여당에 쉽지 않은 선거가 된 것은 언론개혁 등을 포기해 언론지형이 더 기울어지고 정치의 효능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종편과 포털의 여론 지배력 강화는 여론집중도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지난해 종편 4사의 매체 합산 여론영향력 점유율은 28.1%로 24.1%에 그친 지상파 3사를 능가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방송학회 등에 맡겨 종편 4사의 공정성을 평가한 결과 JTBC가 좀 덜할 뿐 심각한 문제점들이 지적됐다. ‘종합편성채널’이 아니라 편향적인 ‘정치전용채널’이 되고 만 것이다.

언론 더 기울어지고 효능감 떨어져

민주언론시민연합에 따르면 종편 4사가 지난 10일부터 15일까지 시사대담 프로그램에서 김건희씨는 17분을 다룬 반면 이재명 후보 부인 김혜경씨는 172분을 다뤘다. TV조선의 경우 ‘대장동 개발 특혜의혹’ 보도는 89건으로 KBS나 MBC의 2배에 이를 만큼 많았으나, ‘고발사주’ 관련 보도는 가장 적게 내보냈다. 진실보다는 어느 당에 해롭고 이로우냐가 편성의 기준이 된 건가?

우리 언론은 한때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이었지만 이젠 개인의 주체적 결정을 방해하는 블라인드 커튼 구실을 하는 데가 많다. 지금 상당수 언론은 민주주의의 작동을 방해하고 있다. 세계 꼴찌 수준인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대선 국면에서 바닥 모를 심연으로 추락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상당수 언론은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오명을 들어도 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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