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단 소년에서 칸타타의 대가로…그의 뿌리는 ‘코랄’이었다

문학수 선임기자

(14) 바흐가 머문 도시와 음악 여정

세 아들과 함께 있는 바흐. 독일의 초상화가 발타자르 데너(1685~1749)가 1730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 아들과 함께 있는 바흐. 독일의 초상화가 발타자르 데너(1685~1749)가 1730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의 중앙에 자리한 작은 도시 아이제나흐…루터의 자취가 남은 이곳에서 2세기의 세월이 지나 태어난 바흐
성 게오르크 교회의 보이 소프라노였던 그는 죽을 때까지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 살며 ‘코랄’을 몸과 영혼에 원형처럼 새긴다

■루터와 바흐의 도시, 아이제나흐

독일 중부에 아이제나흐(Eisenach)라는 도시가 있다. 비유하자면 ‘독일의 배꼽’이다. 독일의 딱 중앙에 자리한 이 도시는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청소년기를 보낸 도시로 유명하다. 물론 출생지는 아니다. 루터는 아이제나흐에서 북동쪽으로 160㎞쯤 떨어진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고향’이라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머문 시간이 생후 1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훗날 기독교의 역사를 전복할 아들이 뒤뚱뒤뚱 걸음마를 뗄 무렵에 만스펠트(Mansfeld)라는 근처의 도시로 이주했다. 현재 이 도시의 인구는 약 3000명에 불과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그야말로 ‘작은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만스펠트에서 광산과 제련업에 종사했고 다행히도 사업이 잘 풀려 나름대로 ‘시골 유지’의 경제력과 명성을 유지했다.

루터는 그곳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나는 만스펠트의 아이”라는, 훗날의 술회는 바로 그런 맥락이다. 루터의 기억 속에 각인된 고향은 만스펠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워낙 작은 도시였던 까닭에 교육 시설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가 열네 살이던 1497년에 유서 깊은 대도시 마그데부르크(Magdeburg)로 유학, 대성당 학교에 다녔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하지만 그 유학은 1년에 그쳤다. 시골 유지의 재력으로는 비용을 감당하기가 벅찼던 까닭이다. 그래서 이듬해에 루터는 외가가 있는 아이제나흐로 거처를 옮겼으며, 성 게오르크 교회의 부설학교에서 3년간 공부한다. 루터는 그곳에서 문법과 수사학과 논리학,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을 배웠다. 말하자면 아이제나흐에서 고교 과정을 이수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이 학교는 루터의 이름을 따서 ‘마르틴 루터 고등학교’(Martin Luther Gymnasium)로 불린다.

이 연재의 6회에서도 썼듯이,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은 엘베강 연안의 소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였다. 오늘날 이 도시는 아예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로 불린다. 그것이 공식적인 행정 지명이다. 하지만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제나흐도 ‘루터의 도시’로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다. 이 고즈넉한 도시의 곳곳에는 루터의 흔적과 자취가 여전하다. 당시 루터가 살았던 하숙집은 현재 ‘루터 박물관’으로 조성돼 있다. 도심의 카를 대제 광장에는 루터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훗날 교황에게 파문당한 루터는 아이제나흐로 피신해 바르트부르크성에 칩거하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바르트부르크성은 시내에서 자동차로 약 5분 거리다. ‘쫓겨난 루터’가 2년간 머물렀던 두세 평 남짓한 방은 현재 ‘루터의 방’(Lutherstube)으로 불리며 여행자들을 맞고 있다. 이렇듯 아이제나흐에서 만날 수 있는 루터의 족적은 많다. 물론 그중에서도 성 게오르크 교회는 음악애호가들에게 매우 각별하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의 출입문 상단에는 루터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 unser Gott)의 제목이 양각돼 있다. 10대 시절의 루터는 이 교회의 합창단에서 노래했다. 테너 파트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거의 2세기쯤 세월이 흐른 뒤, 그 교회에서 한 아기가 세례를 받는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아기의 이름은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였다. 아이제나흐시(市) 당국에 고용된 음악가, 즉 슈타트파이퍼(Stadtpfeifer)였던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1645~1695)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타의 막내로 태어난 아기는 3월23일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태어난 날은 이틀 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례 날짜는 문서로 확인되지만 생일은 추정이다. 바흐에 관한 최초의 전기로 손꼽히는 J N 포르켈의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1802)에 “1685년 3월21일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다”고 기술돼 있지만 사실로 확정하기는 다소 애매하다.

■“아름답고 귀여운 보이 소프라노”

알려져 있듯이 바흐의 가문은 ‘음악가 집안’이었다. 포르켈의 서술에 따르면, “6세대를 통틀어 불과 2~3명(의 남자들)”만이 다른 생업에 종사했다고 하니, 음악의 역사를 통틀어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어떻게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가문의 일부가 아닌, 거의 전부가 음악가였다는 사실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지점일 수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운위되는 것은 ‘가문의 유전자’다. 말하자면 남다른 음악적 기질과 소양을 생물학적으로 타고났다는 해석인 셈이다. 하지만 전적인 진실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이 지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야를 좀 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바흐의 6대조 할아버지인 파이트 바흐에서부터 바흐가 태어났던 시기까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대적 개념과 마주하게 된다. 한마디로 당시는 ‘장인(Meister)의 시대’였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 ‘기술’에 가까웠으며, 마치 제화공이 구두 짓는 기술을 전수받듯이 ‘음악의 기술’을 선생에게 배워야 했다. 물론 선생은 대개 집안의 어른들이었다. 말하자면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길드와 유사한 방식으로 전수”(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17세기 후반의) 이탈리아에 스카를라티 가문이 있었고 프랑스에는 쿠프랭 가문이, 보헤미아에는 벤다스 가문이 등장했다”(같은 책).

그중에서도 ‘바흐 패밀리’야말로 특히나 많은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이었다. 바흐의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는 ‘슈타트파이퍼’라는 직책으로 보건대 관악기(Pfeifer) 연주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올린 연주에도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바흐는 가문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삼촌, 형들에게 음악을 배웠을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 엘리자베타에게 노래를 배웠을 수도 있다. 그리고 드디어 여덟 살이 되자 그 옛날에 루터가 다녔던 성 게오르크 교회 부설학교에 입학했다. 30여명으로 이뤄진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어린 바흐의 음성은 “매혹적인 소프라노”(폴 뒤 부셰, <바흐 - 천상의 선율>), 혹은 “귀여운 소프라노”(뤽 앙드레 마르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였다고 전해진다. 아름답거나 귀여운 ‘보이 소프라노’가 성 게오르크 교회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어린 음악가 바흐는 이렇게 ‘루터의 전통’과 조우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 살았으며, 루터교의 찬송가 코랄(Choral)은 그의 몸과 영혼에 새겨진 ‘음악의 원형’과도 같았다.

오르트루프에서 형의 악보를 몰래 훔쳐보던 소년 시절, 독립 후 다양한 음악 양식에 눈을 뜬 뤼네부르크의 학창 시절
궁정악장으로 주옥같은 기악곡을 낳은 쾨텐과 수많은 칸타타를 탄생시키며 마지막 여정을 보낸 라이프치히

1694년부터 이듬해까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잃은 바흐는 맏형인 요한 크리스토프(1671~1721)의 집에서 지냈다. 그는 아이제나흐에서 동쪽으로 약 40㎞ 떨어진 오르트루프(Ohrdruf)의 오르간 연주자였다. 존 엘리엇 가디너의 표현에 따르자면 당시 이 도시는 “2500명이 거주하는, 형편없는 공중위생 기록을 가진, 혼수상태에 빠진 지방 마을”이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경우, 형이 동생을 15세까지 데리고 산다는 당대의 관습에 따라 바흐는 그곳으로 가야 했다. 이 시기의 바흐와 관련해 지금도 회자되는 몇몇 에피소드가 전해지는데 그중 하나는 이렇다. 맏형의 집에는 대가들의 악보가 많았는데, 바흐가 아무리 졸라대도 형은 그것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포르켈의 기록에 따르면, “(악보들은) 자물쇠를 건 격자문의 책장에 보관돼” 있었고, “손이 작은 바흐가 빈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악보를 둥글게 말아 끌어낼 수 있었”으며, 바흐는 달빛에 의지해 그 악보들을 “꼬박 6개월이나 걸려” 필사했다. 하지만 형에게 걸려 “가차 없이 압수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심지어 맏형이 막냇동생의 재능을 질투했다는 풍문도 있는데 사실로 확정하기에는 근거가 충분치 않다. 어쨌든 10대 초반의 바흐가 음악을 배우려는 욕망으로 불타올랐음은 분명하다.

바흐는 15세 무렵에 오르트루프를 떠났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분분한데, ‘15세부터’를 성인으로 인정했던 당시의 관습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말하자면 맏형의 의무적 부양 기간이 끝났던 것이다. 바흐가 오르트루프를 떠나 당도한 도시는 독일 북부의 뤼네부르크였다. 중세 때부터 대도시로 손꼽혀온 이곳은 오르트루프에서 거의 400㎞쯤 떨어져 있었는데, 바흐는 그 먼 거리를 친구와 함께 걸어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쪼들렸음을 알 수 있다. 뤼네부르크의 성 미하엘 교회 부속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곤궁함 때문이었다. 당시에 학교가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다. 집안이 가난해 장학금 이외에는 공부할 방법이 없어야 했으며,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해야 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목소리와 가창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열다섯 살의 바흐는 두 가지를 모두 충족했다. 바흐는 그곳에서 2년을 보냈다. 크고 아름다운 도서관에는 거장들의 악보들이 넘쳐났고 교사들의 수준은 높았다. 바흐는 그곳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음악적 양식을 두루 배웠다. 성 미하엘 학교를 졸업하던 1702년 부활절, 열일곱 살의 바흐는 더 이상 “귀엽고 아름다운 보이 소프라노”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변성기를 훌쩍 지나 있었다.

■아른슈타트에서 라이프치히까지

바흐의 음악적 연대기는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흐는 1703년, 당시 인구 약 4000명의 도시였던 아른슈타트(Arnstadt)의 오르가니스트 겸 합창단장으로 취직했다. ‘직업 음악가’로서의 첫 행보였다.

4년 뒤에는 아른슈타트와 비슷한 규모의 도시였던 뮐하우젠(Muhlhausen)으로 갔지만 1년 만에 사직하고 1708년 7월부터 바이마르(Weimar)에 정착했다. 예나 지금이나 바이마르는 문화의 도시였다. 게다가 바이마르의 영주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은 소문난 음악애호가였다. 그는 바흐가 궁정을 잠시 비우고 다른 곳에서 연주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덕분에 바흐의 이름은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곡가 바흐’에 대한 인식은 미약했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바흐를 ‘뛰어난 오르가니스트’로만 여겼다. 지금껏 전해지는 바흐의 오르간 음악 가운데 상당수가 이 시기에 작곡됐음은 물론이다.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또 1714년부터는 궁정악장으로, 통틀어 9년간 일했다.

1717년이 끝나갈 무렵, 바흐는 쾨텐(Kothen) 궁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쾨텐의 영주였던 레오폴트 공은 계몽군주였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자유주의자이기도 했다. 음악애호가라는 측면에서는 바이마르의 대공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다 감바를 다룰 줄 알았고 황홀하리만큼 노래를 잘 불렀”(폴 뒤 부셰, <바흐 - 천상의 선율>)으며, 바흐를 친구처럼 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바흐가 받았던 400탈러의 연봉은 궁정의 대신들과 동급이었다. 게다가 쾨텐 궁정이 칼뱅파에 속했던 까닭에 바흐는 종교음악 작곡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주옥같은 기악곡들이 태어났음은 물론이다.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 모음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등이 모두 이 시기 작품들이다. 어쩌면 바흐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아직 젊었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제적으로도 윤택했기 때문이다. 아내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금슬도 좋았다. 돈독한 신앙인으로서 교회음악과 오르간에 대한 갈망이 없지 않았으나, 그 밖의 장르에서는 창작의 에너지가 용솟음치던 시기였다. “쾨텐에서의 나날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행복했다”(폴 뒤 부셰, <바흐 - 천상의 선율>)는 말은 그래서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은 한으로 남았다. 온천지에서 요양하던 레오폴트 공을 한 달간 수행하고 돌아왔을 때, 아내의 장례식은 열흘 전에 이미 끝난 상태였다.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St. Thomaskirche) 앞에 바흐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1908년 세워진 동상이다.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St. Thomaskirche) 앞에 바흐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1908년 세워진 동상이다.

바흐가 마지막으로 머문 도시는 라이프치히였다. 바흐는 1723년 독일 작센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라이프치히의 칸토르(Kantor·음악감독)로 취임했다. 중세부터 상업이 번성했고 18세기 초반의 인구가 2만명에 달한 대도시였다. 종교적 측면에서 보자면 루터교의 보루와도 같은 곳이었다. 바흐는 성 토마스 교회를 비롯한 이 도시의 모든 교회의 음악을 총괄했다. 교회 부설학교의 학생들에게 음악과 라틴어도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대우와 조건은 좋지 않았다. 바이마르와 쾨텐의 영주들로부터 물심양면의 후원을 받았던 것과 달리, 라이프치히에서는 시의회의 규제와 간섭이 심했다. 예컨대 시의회는 “예배에 사용할 칸타타에 장식음을 너무 쓰지 말 것” 같은 구체적 주문을 내놓기도 했다. 음악가의 자존심을 긁는 처사였다. 바흐의 입장에서 보자면 라이프치히는 ‘사공이 많은 도시’였다. 연봉도 수직 하락했다. 쾨텐 시절의 4분의 1에 불과한 급료를 받았다. 그 때문에 바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치머만 커피하우스’에서 콜레기움 무지쿰을 지휘해 선보였던 세속적인 칸타타와 기악곡들은 지금도 사랑받는 레퍼토리로 남아 있다.

귀엽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코랄을 노래하던 아이는 다시 코랄로 돌아왔고…음악의 ‘고전’, 음악가들의 ‘고향’이 되었다

하지만 라이프치히 시절의 음악적 본령은 종교음악이었다. 특히 이 시절의 바흐는 수많은 교회 칸타타를 작곡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작곡한 칸타타는 300곡쯤으로 추정되는데, 그중 약 200편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세속적 칸타타도 있지만 종교적 칸타타, 말하자면 루터교 예배에서 사용하던 칸타타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루터교의 일요일 및 축일 예배는, 성경 봉독과 칸타타 연주, 이어서 목사의 설교로 진행됐다. 라이프치히의 칸토르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가 칸타타를 작곡하는 것이었다. 아이제나흐의 교회에서 귀엽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코랄을 노래하던 아이는 이렇듯 다시금 코랄풍의 음악으로 돌아왔다. 바흐의 교회 칸타타 전곡(184곡)을 한국어로 번역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라는 책이 최근 국내 출간됐는데, 이 책의 해제에서 음악학자 나주리는 “(18세기 초에 절정에 달한) 칸타타는 바흐의 공적이었다. 오늘까지도 칸타타는 바흐의 장르이고 바흐는 칸타타 작곡가로 여겨진다”고 쓰고 있다.

<시리즈 끝>

[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합창단 소년에서 칸타타의 대가로…그의 뿌리는 ‘코랄’이었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