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정치’를 찾습니다, 한나라·민노당이 단일안 만들던 16년 전 같은

송윤경 기자

연금개혁은 한정된 자원 배분에 관한 정치의 영역이지만, 정치권은 늘 뒷짐만 지고 있다. 전문가들도 의견이 갈린다. 한쪽에선 지금 보험료를 올리자 하고, 한쪽에선 보장성을 높이자 한다. 지난 16년간 몇 차례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전문가 뒤에 숨어 ‘아무 선택도 안 하는’ 선택만 했다. 지도부에게 비전과 의지가 없다면, 우리에게 연금개혁은 없다.

국회 의안과에 법안 서류들이 쌓여 있다.  연합뉴스

국회 의안과에 법안 서류들이 쌓여 있다. 연합뉴스

[주간경향] 연금개혁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금을 3대 개혁과제 중 하나로 제시한 데다, 5년마다 돌아오는 ‘재정계산’까지 겹쳤다. 재정계산은 앞으로의 수입(보험료)·지출(연금액)과 그에 따른 잔액(기금)을 가늠하는 작업이다. 정부는 계산 결과를 토대로 보험료를 올릴지 말지, 연금액을 높일지 낮출지 등을 결정해 법안을 제출한다. 연금 구조의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연금개혁은 그러나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라는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 과정이다. 국민연금 개혁은 2007년 이후 16년째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국민연금을 바라보는 철학이 부딪히고, 이해관계자의 반발도 거세기 때문이다.

올해는 ‘재정계산’ 단계부터 파열음이 나왔다. 재정계산 결과를 토대로 정부에 보험료·연금액 조정안을 제안하기로 한 보건복지부 산하 재정계산위원회(재정계산위)의 민간위원 2명이 사퇴했다. 다수·소수 표기 등 위원회 보고서 구성에 대한 이견이 이유였다. 사퇴 후에는 소득대체율 인상이 배제된 ‘반쪽짜리 보고서’라고 비판했다. 이후 또 다른 민간위원으로부터 반박이 나왔다. 위원회는 소득대체율 인상 방안을 포함시키려 했으나 사퇴한 이들이 보고서 게재 방식과 관련해 한 치 양보도 하지 않다가 ‘삭제’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번 논란의 배경엔 이른바 소득보장 강화론(소득대체율 인상론)과 재정안정론의 오랜 논쟁이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양측 입장차가 커 합의는 끝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시민 의견을 묻는 공론조사도 거론되고 있다.

연금개혁은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지에 관한 정치의 문제다. 그런데 국민연금 개혁에 관한 각자의 정책 답안을 내고 경합을 벌여야 할 정부와 여야는 뒷짐만 지고 있다. 전문가들의 논쟁이 끝나길 기다리거나, 훈수만 두는 모양새다. 정권과 정당들이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한 연금정치는 작동할 수 없다.

국민연금을 바라보는 두 입장(재정안정론·소득강화론)을 정리하고, 한국 연금정치의 역사를 통해 연금정치 복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 월 23만원 내는데 얼마 받을까

1982년에 태어난 A씨는 현재 월 500만원을 버는 18년차 직장인이다. 매월 내는 국민연금 보험료는 약 23만원. 입사 초기부터 낸 보험료와 앞으로 정년 때까지 납부할 보험료를 모두 따져보니 7700만원(보험료 9% 중 4.5% 부담, 앞으로 현 소득을 유지한다는 가정)이다. 사측 부담분(4.5%)까지 더하면 A씨 앞으로 쌓인 보험료는 ‘낸 돈’의 두 배인 1억5400만원이 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보자. 그래서 A씨는 은퇴 후 얼마를 받게 될까? 국민연금공단 홈페이지에서 예상연금을 조회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A씨는 만 65세부터 현재가치 기준으로 매월 138만원을 지급받게 된다. 85세까지 생존하면 약 3억3000만원, 90세까지 생존하면 약 4억1300만원을 돌려받는 셈이다. 그가 직접 낸 돈인 7700만원 기준으로는 최대 5배, 사측과 함께 낸 ‘총 보험료’ 기준으로는 2.6배다.

연금개혁 쟁점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각자 낸 돈이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A씨는 사측과 함께 1억5400만원을 냈다. 그런데 2048년부터 돌려받을 연금액은 3억3000만원(85세까지 생존 시)이다. 1억7600만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기금 수익도 일부 포함돼 있지만, 대부분은 이 시기 청년세대가 낸 보험료로 충당될 것이다. 즉 A씨는 ‘미래 청년세대’와의 연대를 통해 노후소득을 보장받고 있는 셈이다.

올해 1월 서울 중구 국민연금공단 종로중구지사 고객상담실에서 시민들이 상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1월 서울 중구 국민연금공단 종로중구지사 고객상담실에서 시민들이 상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급격한 고령화다. 만약 현재의 국민연금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2055년엔 그간 쌓였던 기금이 모두 소진되고 청년들이 낸 보험료만으로 노인들의 연금액을 충당해야 한다. 그럴 경우 그 시기 청년세대 보험료는 월소득의 약 30%(2060년 기준 29.8%, 직장인은 절반 부담)가 된다. 미래 청년들이 맞을 보험료 인상 충격을 완화해주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현세대의 보험료를 충분히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입장을 ‘재정안정론’이라 부른다.

그런데 A씨가 돌려받을 연금액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A씨는 월 500만원을 벌어 지출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은퇴 후 받을 ‘월 연금액’은 138만원이다. 노후가 다가올수록 A씨는 불안하지 않을까. 연금액 수준을 평가하는 지표로 ‘소득대체율’이 있다. 일하던 시기(보험료 납부 시기)의 소득에 비해 연금액이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낸 것이다. 한국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31.2%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42.2%다(OECD는 일부 국가의 기초연금을 포함한 수치).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국민연금의 보장성은 더 두터워져야 한다. 이런 입장을 주로 ‘노후소득 강화론’ 혹은 ‘소득대체율 인상론’이라고 말한다.

노동·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공적연금강화국민운동 관계자들이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공청회에서 재정계산위를 규탄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노동·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공적연금강화국민운동 관계자들이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공청회에서 재정계산위를 규탄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 기후위기? 공공성 약화?

소득대체율 인상론은 재정안정론 측이 미래세대 부담을 부풀리고 있다고 본다. 부담이 있다고 해도, 기금이 줄어들기 시작할 때 국가재정을 투입해 나가면 된다고 본다. ‘세금도 결국은 그 시기 일하는 청·장년의 부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선 “부자나 기업에 대한 세금부과로 해결할 수 있다.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라고 말한다. 안정론 측은 이에 대해 “그렇게 하더라도 현행 국민연금의 부족액을 채우기도 벅차고, 미래 초고령사회에서는 기초연금, 의료비 등 국가의 재정 수요가 무척 크다”(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는 반론을 편다.

재정안정론은 소득대체율 인상론이 말하는 방안이 실질적인 소득대체율 인상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납부기간에 비례한다. 대기업 정규직 등 중심부 노동자는 긴 가입기간을 유지할 수 있지만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는 가입기간이 짧다. 1970년생의 경우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의 가입기간이 거의 두 배라는 연구결과도 있다(각각 33.9년과 19.4년, 윤석명, ‘국민연금 재정안정화를 위한 공적연금 제도개혁 방안 모색’). 소득대체율을 올려봤자 납부기간을 많이 채운 중심부 노동자에게 혜택이 우선적으로 돌아간다는 게 안정론의 시각이다.

이들은 대체율 상승 대신 보험료 납부를 안 했어도 납부기간으로 쳐 주는 출산·육아·돌봄·군복무 등의 크레딧 제도를 확대하는 데 집중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실질’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OECD 평균 대비 소득대체율이 11% 낮다는 통계에 대해선 저소득층에 더 유리한 ‘하후상박’ 급여구조 등 국민연금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소득 하위 70%의 노인에게 약 30만원씩 지급되는 기초연금 몫을 감안하면 비슷해진다고 주장한다. 기초연금의 강화 역시 안정론이 펼치는 ‘실질’ 소득대체율 인상의 주요방안 중 하나다.

반면 인상론 측은 국민연금이라는 공적연금의 기둥을 약화시키면 사적연금 시장만 부풀 것이며, 이것으로 손해를 입는 이들은 경제적 여력이 없는 중하위 계층이라고 본다. 이들은 크레딧 제도나 기초연금은 보충적 수단일 뿐이고 소득대체율 40%(40년 가입기준)란 천장을 높이지 않은 채 ‘보충’만 해서는 서민의 노후소득 보장을 튼튼히 할 수 없다고 본다.

요컨대 재정안정론이 보는 연금개혁 이슈는 ‘기후위기’와 유사하다. 미래세대의 고통을 덜기 위해 현세대의 부담을 늘리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사안인 것이다. 반면 소득대체율 강화론에서 연금개혁 이슈는 ‘공공성 흔들기’의 문제다. 미래 위기를 과장해 국민연금을 허약하게 만들수록 이득을 보는 건 금융자본이라는 게 이들의 시각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세계관이 완전히 다른 문제다.

2014년 서울 종로의 한 공원에서 노인들이 비를 피해 앉아 있다.  김창길 기자

2014년 서울 종로의 한 공원에서 노인들이 비를 피해 앉아 있다. 김창길 기자

■ 정부와 정당들의 입장이 비어 있다

사실 재정안정과 소득대체율 강화의 양론이 맞부딪친 지 꽤 오래됐다. 논쟁이 본격화된 건 2018년이었다. 당시에도 국민연금 재정계산 결과를 두고 복지부 산하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 내에서 인상론·안정론 논쟁이 불거졌다. 위원회는 결국 합의에 실패해 양측 입장을 담은 복수의 안을 제안했다. 그러자 정부는 경제적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 사회적 대화를 요청했는데, 경사노위 역시 재정안정론과 소득대체율 강화론의 논쟁을 반복해 겪으면서 합의안 도출에 실패했다. 이후 정부의 선택은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지난 수년간의 인상론·안정론 논쟁은 ‘누가 더 옳으냐’를 넘어, 한국의 연금정치를 누가 주도하고 있느냐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전문가들이 전면에 나서 공개 토론을 벌인 지 5년여가 흐른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정의당은 ‘미래세대도 중요하고 노후소득보장 강화도 중요하다’는 원론 이상은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연금개혁이 시급하다”는 국회 시정연설 뒤 구체적 발언이 없다.

최근의 재정계산위 논란에서도 정부와 여야는 뒷짐을 지고 있다. 대체율 인상론 측 위원들이 빠져나간 재정계산위는 보험료를 9→12%, 15%, 18%로 인상하는 것을 전제로 연금수급 개시 연령을 최장 68세로 늦추거나 기금투자수익률을 높이자는 결론을 냈다. 사퇴한 민간위원 2명은 보험료만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은 인상하지 않으면 국민연금은 약화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같은 논의에 대한 정부 입장은 무엇일까.

복지부의 답변은 이렇다. “재정계산위에서 최종 자문안을 주면 그걸로 국민 의견을 듣고, 국회 의견도 들어서 10월에 종합운영계획(정부안)을 제출하겠다.”(최종균 보건복지부 인구정책실장, 9월 4일 국회 연금특별위원회) 아직 진행 중인 민간전문가들의 논의가 끝나면 그것에 대한 여론을 살피다가 맨 마지막에 자신들의 입장을 내겠다는 얘기다.

“10월 얼마 안 남았는데 그때부터 판단해가지고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9월 4일 국회 연금특별위원회)는 비판이 야당에서 나왔지만, 정당들 역시 정부를 탓할 처지는 못 된다. 지난해 구성된 국회 연금특위가 이제껏 한 일은 각 당의 입장은 드러내지 않은 채로, 민간자문위원회를 만들어 개혁의 밑그림을 통째로 위임한 것밖에 없다. 자문위가 개혁안을 마련하면 그후부터 여론 수렴을 한 뒤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겠다는 태도는 정부와 똑 닮았다.

국회 연금특위는 심지어 올해 초 민간자문위에서 소득대체율 인상론과 재정안정론 간 논쟁이 뜨거워지고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자 토론을 멈춰 세우기까지 했다. “모수개혁(보험료와 소득대체율 조정)은 정부 몫”(강기윤 국민의힘 의원)이라고 선을 긋고 민간자문위에 국민연금뿐 아니라 기초·퇴직연금 등 공적연금 전반의 구조개혁을 논의해달라고 했다. 공적연금 전반을 다루겠다니, 큰 결심을 한 것 같지만 실은 뜨거운 감자인 ‘얼마나 더 내고 얼마를 받을 것이냐’ 논쟁에서는 발을 뺀 것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 정당이 대안으로 경쟁하던 시절

한국의 연금정치가 늘 이렇지는 않았다. 특히 연금개혁이 처음으로 사회적 의제로 부각됐던 참여정부 시기, 대통령은 정부의 개혁 방향을 명확히 밝혔고 각 정당은 대안을 가지고 경쟁했다.

당시에도 시작은 ‘재정계산’이었다.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의 대상을 ‘전 국민’으로 넓힌 주체는 1999년 김대중 정부였는데, 이때 개정된 국민연금법에 ‘5년마다 재정계산’이 처음 명문화됐다. 기금소진 등 안정적 재정확보에 대한 우려가 있었기에 도입된 제도였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03년 첫 번째 재정계산이 이뤄졌고, 국민연금 기금은 2047년 소진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개혁 방향과 의지를 분명히 알렸다. “고령사회에 대비해서 국민연금 체제를 ‘적정부담-적정급여’로 전환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중략) 대규모 연금 수급자가 발생하기 전인 지금 고쳐야 합니다.”(2003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 보낸 공개서한문) 2003년 10월 정부는 더 내고 덜 받는 국민연금법 개정안(보험료율 9%→2030년까지 15.9%로 인상, 소득대체율 60%→2008년까지 50%로 삭감)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이어 노 대통령이 직접 서한문을 공개한 것이다.

‘더 내고 덜 받자’는 정부안에 대한 야당들의 반발은 컸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에서 ‘정부가 광범위한 국민연금 사각지대는 방치한다’는 문제 제기가 나왔다. 특히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대안으로 기초연금을 제시했다. 다만 이들의 기초연금은 국민연금의 약화(소득대체율 60→20%로 대폭 삭감)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의 국민연금 약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정부가 국민연금을 받지 못하는 노인빈곤층 등의 ‘연금 사각지대’는 외면한다는 점에 대해선 함께 비판의 목소리를 함께 냈다. 이들은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성격의 기초연금을 제안했다.

1999년 3월 경향신문 실렸던 국민연금 홍보광고. 김대중 정부는 국민연금을 전국민에게 적용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제 4월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전국민 연금제도가 실시됩니다’라는 광고문구가 보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9년 3월 경향신문 실렸던 국민연금 홍보광고. 김대중 정부는 국민연금을 전국민에게 적용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제 4월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전국민 연금제도가 실시됩니다’라는 광고문구가 보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9-40% 체제를 만들었던 연금정치

이 시기 참여정부는 인터넷 세상 속에서도 싸워야 했다. 2004년 ‘국민연금의 8대 비밀’이라는 한 누리꾼의 글이 확산하면서 이른바 ‘안티 국민연금’ 세력이 불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통령은 적극적인 해명을 지시했고, 복지부는 <국민연금의 비밀 바로알기>와 같은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국민연금 홍보에 나섰다. 정권 입장에선 야당들의 반대 속에 안티운동을 진화하다가 임기 후반이 시작됐다. 국민연금법 개정은 동력을 잃고 무산되는 듯했다.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2006년 취임한 유시민 복지부 장관이었다. 유시민 장관은 한나라당의 기초연금 제안을 받아들여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하는 안을 만들었다. 정부가 재정만 우려해 ‘더 내고 덜 받자’고 할 뿐 광범위한 연금 사각지대는 방치한다는 비판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 한국 복지정치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장면도 만들어졌다. 정부안에 맞서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이 ‘기초연금 단일안’을 만들었다. 내용 면에서 한나라당보다는 민주노동당의 색채가 강한 정책 대안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보편적 제도에 가까운 기초연금(노인 하위 80%)을 신설하면서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한나라당 기존 입장보다 대폭 높이는 개정안(소득대체율 20%→40%)을 한나라당으로부터 이끌어낸 것이다. 이후 열린우리당·한나라당 최종협상 결과는 한나라당·민주노동당 간 만들어진 단일안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때의 개혁으로 탄생한 기초연금은 당시 8만5000원에서 현재 32만3000원이 될 정도로 급격히 성장 중이다. 2010년대 내내 40%가 넘던 노인빈곤율은 여전히 세계 최고수준이지만 2020년부터 30%대로 내려왔는데(2021년 기준 37.6%·빈곤율은 중위소득 절반 이하인 사람의 비율), 이를 두고 기초연금의 기여가 컸다고 보는 분석이 많다.

2007년 당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 개혁과 관련해 한나라당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국회 정론관에서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2007년 당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 개혁과 관련해 한나라당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국회 정론관에서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물론 2007년 연금개혁에 대한 비판도 있다. 당시의 개혁은 소득대체율 삭감(60→40%), 국민연금 사각지대 해소(기초연금 신설·8만5000원으로 시작), 보험료 현행 유지(9% 유지)라는 ‘패키지’였지만, 소득대체율 인상론 측은 ‘소득대체율 삭감’을 더 주목해서 평가한다. 기초연금의 도입은 의미 있지만, 국민연금 축소를 뜻하는 소득대체율 20% 삭감은 복구시켜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참여정부는 애초 소득대체율 50%-보험료율 15.9%를 제안했으나 국회 논의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소득대체율 40%-보험료율 현행 9% 유지가 채택된다.)

■책임회피의 정치

참여정부의 연금개혁은 2003년 시작해 2007년에 마무리됐고, 시행은 2008년부터 이뤄졌다. 2008년은 MB 정부 임기가 시작된 첫해이자 국민연금의 두 번째 재정계산이 이뤄진 해였지만, 이때는 사실상 ‘9-40% 체제’의 안착이 주된 과제였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어 박근혜 정부에선 ‘기초연금-국민연금 연계’가 주요 의제로 등장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기초연금 20만원’을 약속해 노인 유권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집권 뒤엔 공약대로의 이행을 포기했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동시에 받는 수급자에게는 일정한 산식에 따라 기초연금을 최대 절반 깎고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첫 복지부 장관이었던 진영 전 장관이 이때 국민연금·기초연금 연계에 반발해 사퇴했다. 그해 국민연금의 세 번째 재정계산이 이뤄졌지만, 기초연금 감액 논란 속에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힘들었다.

네 번째 재정계산은 문재인 정권이 2년차에 접어들었던 2018년 진행됐다. 많은 전문가는 이때를 국민연금 개혁의 ‘적기’로 봤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때 소득대체율 인상을 공약한 터였다.

당시 복지부 산하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는 소득대체율 인상론과 재정안정론의 충돌 속에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복수의 안을 냈다. 하나는 소득대체율을 40→45%로 인상하고 보험료율은 즉각 9→11%로 올린 뒤 5년마다 단계적으로 인상하되 보험료율 최대치는 18%로 잡아, 만약 이를 초과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국가재정을 투입하자는 내용이다. 소득대체율 인상론의 입장을 담은 안이다. 또 다른 안은 재정안정론 측의 것으로, 소득대체율을 40%로 유지하고 보험료율을 13.5%까지 빠르게 인상하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복지부는 제도발전위의 논의를 토대로 개혁안을 청와대에 보고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은 보험료 인상이 가장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당시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한다고 밝혔다. 소득대체율 인상론이나 재정안정론이나 보험료율 인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지만, 대통령이 ‘국민 눈높이’를 들어 보험료율 인상이 곤란하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이후 문재인 정부는 4개의 복수안을 병렬적으로 발표한 이후 연금개혁에 사실상 나서지 않았으며, 공을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넘겼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연금개혁특위에선 수십 차례의 토론이 이어졌지만, 재정안정론과 소득대체율 인상론은 이때에도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이 협의체 역시 복수의 안을 내고 활동을 종료했다. 이후 정부도 국회도 연금개혁 이슈를 다루려 하지 않는 가운데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2021년 노년알바노조 조합원들이 세계 노인의 날을 맞아 국민연금 연계로 인한 삭감이 없는 기초연금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2021년 노년알바노조 조합원들이 세계 노인의 날을 맞아 국민연금 연계로 인한 삭감이 없는 기초연금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 연금정치의 조건

최근의 재정계산위 파행은 2018년의 연금개혁 무산을 떠올리게 한다. 정부에 개혁안을 권고하는 위원회 안에서 전문가가 대립하자 공론조사가 거론되는 가운데 정부·여당과 야당들은 뚜렷한 입장이 없다. 국민연금 관련 위원회 내부의 전문가 대립→합의 불발→사회적 대화(공론조사) 시도→대립의 재연→개혁 무산이 다시 반복될 조짐이다.

‘세대 간·계층 간 연대를 통한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국민연금의 취지를 잘 살리면서 ‘미래세대 부담 완화’라는 당면 과제도 해결하는 연금개혁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피해서도 안 될 과제다.

연금정치를 ‘복원’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영국의 연금개혁 사례를 연구한 책 <코끼리 쉽게 옮기기>를 냈던 김영순 서울과학기술대 인문사회교양학부 교수는 최근 토니 블레어 정권과 문재인 정권의 연금개혁 시도를 비교한 논문을 냈다(‘정책옹호자연합 모형을 통해 살펴본 연금개혁의 성공과 실패: 영국 블레어 정부와 한국 문재인 정부의 사례’).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영국과 한국은 적대 정치가 일상화하기 쉬운 다수제 정치모델의 나라”라면서 영국 블레어 정부는 보수-자민연립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성공적으로 이어지는 연금개혁에 성공한 반면, 한국의 문재인 정부는 연금개혁에 실패한 첫 번째 이유를 “리더십과 정책 조정 능력이라는 자원”에서 찾았다. 한마디로 지도부에게 비전과 의지가 없었다는 얘기다.

“현 정부는 연금개혁을 행정부 주도로 할지 국회 주도로 할지도 정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연금개혁을 주도해야 할 정부와 여당, 즉 권력 상층부가 자기의 안을 밝히지도 않고 있다. 지금처럼 전문가들이 합의해 주면 그것을 우리의 안으로 하겠다는 태도는 무책임하다.” 김 교수의 말이다.

소득대체율 인상과 재정안정론의 대립 속에 정부·정당의 ‘입장이 없다’는 태도가 이어진 지 수년이 흘렀다. 정부와 정당들이 대안으로 경쟁하며 새로운 정책적 돌파구를 만들던 16년 전의 연금정치를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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