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슬픔과 만났다…‘버티는 힘’이 더 세졌다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이 흘렀다. 10년은 세월호 유가족만의 시간은 아니었다. 주위에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었다. 10년 간 슬퍼하고, 싸우고, 위로하는 동안 이들은 다른 재난참사 피해자들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 ‘먼저 길을 닦은 선배’가 됐다. 가족이 재난참사로 목숨을 잃었다는 결코 달갑지 않은 공통점으로 묶였지만 서로 위로하고 다독이다보니 ‘같은 일이 반복되선 안된다’는 의지가 더욱 단단해 졌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재난참사 피해자들이 함께 보낸 시간을 재구성했다.

거리에서 홀로 싸우던 시기, ‘함께하자’며 방 내준 사람들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 유가족 허영주씨(왼쪽)가 지난 17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여다향에서 인터뷰를 하다 눈물을 훔치고 있다. 오른쪽은 동생 경주씨. 서성일 선임기자 사진 크게보기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 유가족 허영주씨(왼쪽)가 지난 17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여다향에서 인터뷰를 하다 눈물을 훔치고 있다. 오른쪽은 동생 경주씨. 서성일 선임기자

2017년 3월31일.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90도로 기울어진 선체가 목포 신항에 접안됐다. 다음날 세월호 희생자 임경빈군 어머니 전인숙씨는 목포 신항으로 갔다. 화물선 스텔라데이지호가 남대서양에서 연락이 두절됐다는 뉴스 속보가 나왔다. 전씨 눈에는 3년 만에 발생한 대형 선박 사고가 세월호와 겹쳐 보였다.

스텔라데이지호는 ‘물이 새면서 배가 기울고 있다’는 통신을 마지막으로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 선원 22명이 실종됐다. 이튿날 한국인 선원 8명의 가족이 서울 선사 건물 회의실에 모였다. 미수습자 허재용씨의 누나 영주·경주씨와 노모 이영문씨도 이곳에 있었다. 구조 소식을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나도 수색은 진척이 없었다. 선사는 ‘진상규명은 정부에 맡기라’고만 했다.

이들을 돕겠다며 찾아온 이들이 여럿이었다. 해상사고 전문이라던 변호사는 알고 보니 선박회사와 연결돼 있었다. 살갑게 인터뷰하고 간 기자는 ‘선원 가족들이 보상금을 기대하고 있다’는 취지의 기사를 내보냈다. 가족이라며 와서 회의 자료만 챙기고 사라진 이도 있었다. 누군가 다가오면 의심부터 들었다. 그때 박래군 4·16재단 이사가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보라 권했다.

2017년 4월29일.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스텔라데이지호 미수습자 가족이 처음 만났다. 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마지막 촛불집회가 열린 날이었다. 넘실거리는 촛불 사이로 영주씨와 전씨가 마주 섰다. 영주씨는 “미안하다. 우리가 제대로 싸우지 못해서 또다시 참사가 난 것 같다”는 말에 전씨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비극 이후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은 5월10일 청와대 앞에 돗자리를 깔고 농성을 시작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세월호 유가족이 ‘우리와 같이 지내자’고 했다. 광화문 광장에는 세월호 유가족이 쓰는 컨테이너가 줄지어 있었다. 오른쪽 끝이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의 공간이 됐다. 세월호 유가족 아버지들이 쓰던 일명 ‘아빠방’이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임경빈 학생의 모친 전인숙씨가 지난 17일 경기 안산 단원고 4·16 기억교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사진 크게보기

세월호 참사 희생자 임경빈 학생의 모친 전인숙씨가 지난 17일 경기 안산 단원고 4·16 기억교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영주씨와 경주씨는 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시민에게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광장에 머무는 날이 많았다. 두 참사의 상징색인 노란색과 주황색을 섞은 리본을 만들었다. 피로가 쌓이면 아빠방에서 잠깐씩 눈을 붙였다.

보수집회가 열리는 주말이면 경찰이 컨테이너 주변을 둘러쌌다. 어떤 이는 “돈 받으려고 고용된 시위꾼”이라고 유가족을 헐뜯었다. 100원짜리 동전을 던지면서 “이 돈 받고 떨어져라”고 조롱하는 사람도, “정치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고 비아냥대는 이도 있었다. 2020년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공사에 앞서 컨테이너는 철거됐다.

경주씨는 ‘조용히 애도만 하라’는 시선이 힘들다고 했다. 지난 7년은 “유가족은 싸우기보다는 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통념에 맞선 시간이었다. 세월호 희생자 박성호씨 누나 예나씨가 “피해자를 멋대로 규정하는 사회가 잘못된 것이지, 우리가 잘못된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며 책 한 권을 건넸다. 유가족들이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다룬 <슬픔의 위안>이었다.

세월호 유가족에겐 ‘나 홀로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낯설지 않다. 전씨도 그랬다. 주저앉고 싶을 때면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의 유가족이 “다 안다”면서 안아줬을 때 느낀 아릿함을 떠올렸다. 전씨는 청와대 앞에서 스텔라데이지호 가족과 함께 손팻말을 들었고, 추모제에 갔다. 아픈 사람의 마음은 아픈 사람이 알기 때문이다.

영주씨가 “고맙다”고 할 때마다 세월호 희생자 전찬호군 아버지 전명선씨는 “미안하거나 고마워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전씨는 “사건을 끝까지 해결하고 진상을 밝히는 게 당신들이 할 일”이라고 힘을 북돋웠다. 경주씨는 그들로부터 “피해자가 당당하게 권리를 요구하지 않으면 참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배웠다.

정치와 정부가 갈라놨지만…끝내 맞잡은 두 손

이후식 공주사대부고 해병대 캠프 참사 유가족 대표가 지난 18일 충남 논산시 노성면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사진 크게보기

이후식 공주사대부고 해병대 캠프 참사 유가족 대표가 지난 18일 충남 논산시 노성면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2020년 5월. 공주사대부고 해병대 캠프 참사 희생자 이병학군의 아버지 이후식씨 휴대전화가 울렸다. 세월호 희생자 유예은양 아버지 유경근씨였다. 유씨는 “참사가 잊혀서는 안 된다”면서 “같이 시사프로그램에 나가보자”고 했다. 뜻밖이었다. 함께 도보행진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멀어진 사이였다.

2013년 7월18일. 충남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로 병영체험을 하러 갔던 공주사대부고 2학년 학생 5명이 파도에 휩쓸려 숨졌다. 캠프 측 부실 대응과 사건 은폐가 경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유가족은 “구조적 참사로 희생되는 일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며 거리로 나섰다. 7월18일을 ‘학생 안전의 날’로 제정해 달라고 정부와 국회에 건의했다. 이듬해 4월 국회 상임위에서 7월18일을 학생 안전의 날로 지정하는 법안이 의결됐다.

이들의 바람과 달리 참사는 반복됐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바로 다음날 이씨는 다른 유가족과 팽목항으로 갔다. 진도 체육관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났다. 이씨는 “상황을 기록해둬야 한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논산으로 돌아왔지만 ‘피란민’ 같던 세월호 유가족 모습이 자주 떠올랐다.

그해 6월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정부 관계자는 이씨에게 “더 큰 피해를 본 세월호 유가족이 있지 않냐”면서 “7월18일을 학생 안전의 날로 끌고 가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생명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냐며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4월16일은 ‘국민 안전의 날’, 7월18일은 ‘연안 안전의 날’이 됐다. 세월호 참사에 밀렸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자연스레 세월호 유가족과의 만남이 뜸해졌다. 세월호 관련 기사를 보면 화를 내는 유가족도 있었다. 트라우마도 커졌다. 이웃들이 ‘자식 잃은 부모’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유가족 다섯 집 중 세 집이 살던 곳을 떠났다. 논산 아파트 8층에 살던 이씨도 2016년 교외 단독주택으로 옮겼다. 아내가 새벽에 아파트 베란다를 서성이는 걸 본 뒤였다.

그래도 매년 홀로 4·16 기억식에 갔다. 한 유가족이 “우리 일도 아직 해결이 안 됐는데 세월호 행사에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 자연스레 유씨와의 연락이 뜸해졌다.

유씨의 제안을 전해들은 다른 유가족의 반응은 차가웠다. ‘우리를 이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아픈 기억을 다시 헤집어야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유씨는 “이대로면 10년 전 대한민국과 20년 후 대한민국이 같을 것”이라며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씨는 출연을 결심했다.

두 참사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왔다. 이씨 아들 병학이도 단원고 학생들처럼 열일곱에 세상을 떠났다. 다른 재난 피해자들과 힘을 합치자는 생각도 통했다. 멀게 느껴졌던 사이가 다시 좁혀졌다. 김동환군 아버지 김영철씨도 “지금 여기에 멈춰 있으면 안 된다”며 거들었다. 김씨는 참사 당시 미흡했던 초동대처를 늘 아쉬워했다.

공주사대부고 해병대 캠프 참사 10주기를 1년 앞둔 2022년. 4·16재단은 10주기 기록집을 만들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흩어져 있던 유가족 다섯 집이 모두 기록집 제작에 참여했다. 기록집을 받아보던 날 김씨는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우리 아이들 기록이 후세까지 남아 있겠다” 싶어 감정이 북받쳤다. 지난해 7월18일 10주기엔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공주사대부고 내 추모비를 찾았다.

지난해 11월 삼풍백화점 참사·대구지하철 참사·세월호 참사·공주사대부고 참사 등 8개 재난참사피해자들이 모인 재난참사피해자연대가 발족했다.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이 겪는 2차 피해를 줄이는 게 모임의 주된 목표다. 이씨는 부대표를 맡았다. 이씨는 “떠난 자식은 돌아오지는 않는다”며 “이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속마음 털어놓을 곳 찾아···세월호 엄마가 이태원 엄마에게

이태원 참사 유가족 최선미씨가 지난 15일 경기 시흥시 한 카페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만난 소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사진 크게보기

이태원 참사 유가족 최선미씨가 지난 15일 경기 시흥시 한 카페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만난 소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2023년 10월.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앞두고 고 박가영양 어머니 최선미씨는 두려웠다.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외치며 거리 위에서 투사처럼 1년을 살았다. 참사 전의 일상에선 멀어진 지 오래였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두려움을 털어놓을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얘길 꺼내면 ‘아이 잃은 불쌍한 엄마’로만 볼 것 같았다. 10년을 견뎌온 세월호 유가족이 생각났다.

2023년 10월11일 이태원 유가족 어머니 10여명이 경기 안산 단원구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를 찾았다. 공터에 쌓인 컨테이너 건물이 최씨 눈에 들어왔다. ‘유가족이 의지할 건 컨테이너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태원·세월호 유가족 20여명이 둘러앉았다. 그간 묻어뒀던 질문들이 목에 차올랐다. 장난기 많던 딸을 보며 웃던 시절, 딸과 함께 여행 가서 본 풍경이 최씨 머릿속에 떠올라 어지러웠다. “제 딸은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세월호 유가족이 “우리 애랑 똑같다”고 맞장구쳤다.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결 풀리면서 마치 ‘학부모 모임’ 같은 분위기가 됐다.

한 엄마가 “내 새끼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게 너무 기가 막힌다”고 했다. 아이의 기일을 어떻게 챙겨야 하는지로 화두가 옮아갔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세월호 엄마들은 자식이 뭍으로 올라온 날을 기일로 삼았다. 자식 생일에는 엄마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한다고 했다. 최씨는 또 울었다. “축하를 주고받아야 할 날이 떠난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 날이 된 게 속상해서요.”

세월호 엄마들이 택한 추모 방식도 궁금했다. 사망신고를 하지 않아 자식의 입영통지서를 받은 엄마가 있었고,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아들 방 문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도 있었다. 아이가 떠난 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견이 오갔다. 이태원 희생자 김의진씨 어머니 임현주씨는 여전히 아들 방 불을 환하게 켜놓고 잠든다. 김의현씨 어머니 김호경씨는 아들이 벗어놓은 반바지와 티셔츠를 의자에 그대로 걸어뒀다. 한 세월호 유가족은 “그때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자식 물건을 빨리 치워버렸는데 이제 와서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세월호 희생자 진윤희양 어머니 김순길씨가 지난 19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사진 크게보기

세월호 희생자 진윤희양 어머니 김순길씨가 지난 19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세월호 유가족의 발자취가 이태원 유가족에겐 ‘이정표’다. 세월호 유가족은 4·16합창단, 4·16가족극단을 꾸려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해왔다. 자식 잃은 아픔을 끌어안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다는 게 최씨는 의아했다. 세월호 유가족은 “아이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슬퍼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외면한다. 참사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 선에서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알리는 게 중요하다.” 이날 대화의 결론이었다.

“형제자매는 잘 지내나요.” 의현씨 어머니 김씨가 1년간 품었던 질문을 던졌다. 의현씨의 누나는 참사 직후 호주 유학 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왔다. 씩씩하던 딸이 하루에 한 끼를 먹는 것도 버거워했다. 1년이 되도록 상담을 계속하는 딸이 걱정됐다. 한 세월호 유가족은 “남은 아이들에게 신경을 많이 써줘야 한다”면서 “몇년간 신경을 못 쓰다가 보니까 참사 이전의 아이들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버티는 삶’으로 모였다. 세월호 엄마들 손에 박힌 굳은살이 최씨 눈에 들어왔다. 세월호 기억 물품인 노란 리본 매듭을 만드느라 생긴 것이라고 했다. 세월호 희생자 진윤희양 어머니 김순길씨가 “오랜 기간 싸우려면 건강해야 한다. 우리는 그걸 잘 몰랐다. 아프지 말라”고 했다. 오후 1시에 시작한 자리는 오후 9시에 파했다.

제주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는 세월호 10주기 도보 행진에서 김순길씨와 최씨가 다시 만났다. 최씨는 안산에서 행진에 합류했다. 지난 15일 경기 광명에서 만나 인사를 나눴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조끼를 입은 두 사람은 세월호 기억공간을 향해 나란히 걸어갔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 최선미씨(왼쪽)와 세월호 참사 유가족 김순길씨가 3월 15일 진실·책임·생명·안전을 위한 전국시민행진 ‘세월호 참사 10주기 안녕하십니까’ 행사에서 함께 걷고 있다. 세월호 이후에도 연속된 재난참사는 가족을 잃은 경험을 공유하는 유가족들을 만들어 냈다. 서로 위로하고 고통의 시간을 견뎌온 이들은 ‘안전한 사회’라는 목표를 위해 연대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사진 크게보기

이태원 참사 유가족 최선미씨(왼쪽)와 세월호 참사 유가족 김순길씨가 3월 15일 진실·책임·생명·안전을 위한 전국시민행진 ‘세월호 참사 10주기 안녕하십니까’ 행사에서 함께 걷고 있다. 세월호 이후에도 연속된 재난참사는 가족을 잃은 경험을 공유하는 유가족들을 만들어 냈다. 서로 위로하고 고통의 시간을 견뎌온 이들은 ‘안전한 사회’라는 목표를 위해 연대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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