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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칼럼]숫자를 감추는 말

입력 2024.04.01 20:08

수정 2024.04.0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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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어떤 말은 숫자를 감춘다. ‘냉전’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전의 세계대전 같은 ‘열전’과 달리 마치 이 기간 동안만은 전쟁 사망자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강대국 사이에 전면전이 없었을 뿐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폴 토머스 체임벌린에 따르면 2차 대전 이후 1990년까지 한국과 베트남 전쟁 등에서 2000만명 이상이 죽었다.

예산 ‘삭감’이라는 말도 그렇다. 예산의 합리적 재조정처럼 포장하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달려 있다. 33년 만에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되면서 수많은 연구원, 대학원생의 자리가 위협받고 있다. 왜 그런 숫자는 보이지 않을까. 냉전 시기 사망자는 대부분 아시아 지역에서 나왔다. ‘장기 평화’를 노래하던 서구 강대국들 눈에 죽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까닭이다. 예산 삭감으로 고통받는 이들도 대체로 약자다. 공적 지출은 상당 부분 개인 노력이나 시장 논리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 의료비 지원, 성 인권 교육 사업과 디지털 성범죄 예방교육 콘텐츠 제작 등의 예산이 줄거나 전액 삭감됐다. 지방자치단체의 청소년 사업 90%가 중단 위기에 처했다. 학교문화예술교육사업 예산 절반이 잘려나가면서 예술강사들의 월평균 임금은 100만원에서 68만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우수 도서를 선정해 국고로 구매하는 ‘세종도서’ 사업 등도 20%가 감축됐고 지역 서점 지원 예산도 줄었다. 공공돌봄을 제공하는 각 지자체의 사회서비스원 예산도 대폭 줄었다. 관계된 사람들의 삶은 급변하거나 어려워졌을 것이다.

이런 예산은 정부로서는 ‘푼돈’일지 몰라도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돈이다. 그런 예산을 없애는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개월간 24차례나 ‘민생토론회’를 개최하면서 특구 지정, 교통망 확충 등에 900조원이 넘는 돈의 투입을 약속했다. 경향신문 분석 결과 실제 추가되는 재정은 45조원가량이라고 한다. 감세에 앞장서며 건전재정을 외치는 정부라곤 믿기지 않는다.

정말 돈이 없는 것일까. 지난해 정부는 수서발 고속열차(SRT) 운영사인 에스알(SR)에 3590억원 규모의 현물 출자를 하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던 고속철도를 ‘경쟁체제’라는 명목으로 두 개로 쪼개고는 적자가 나자 수천억원을 쏟아부은 것이다. 의대 정원을 갑자기 늘려놓고 의료대란이 벌어지자 월 1882억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추가 지원하겠다고 밝힌 건 또 어떤가. 그 정도 돈을 쓴다면 현재 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사인 간 계약이라며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를 미적대는 정부는, 같은 민간 부문인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방어를 위한 사업장 보증 규모를 30조원으로 확대했다. 둘 중 어느 것에 개인 책임이 클까. 예산을 줄여놓고 이제 와서 이공계 대학원 석박사 과정생에게 매달 연구비를 지급한다는 대목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이유는 간명하다. 예산 삭감이라는 말을 앞세우는 그들의 눈에는 냉전 기간 죽은 아시아인들처럼, 약자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선거를 맞아 또 뭘 짓고, 확충하겠다는 현수막이 방방곡곡 나부낀다. 그럼에도 결국, 숫자놀음을 넘어선 사회적 배분은 정치만이 할 수 있다. 쉽게 투표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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