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파격과 저항의 블랙리스트 정강자와 ‘유신 반대 시위’

김종목 기자

지난 달 30일 서울 아라리오 갤러리 정강자 회고전에 갔을 때 가장 놀라운 작품은 1968년 작 ‘억누르고’다. 기사(▶몸으로, 붓으로 남성 중심 세상의 위선과 편견을 벗기다)에 이렇게 썼다.

정강자, ‘억누르고’, 1968년 발표 당시 정강자와 작품. 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정강자, ‘억누르고’, 1968년 발표 당시 정강자와 작품. 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갤러리는 ‘정강자 :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의 메인 작품으로 ‘억누르고’를 내세웠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였음에도 실험미술 기여도가 연구되지 않았고, 여성 신체를 차용한 작업은 선정적인 시각을 감내하는 등 이중소외에 시달렸던 작가”라는 갤러리의 평처럼 이 작품도 그간 소외됐다.

“대형 목화솜 중앙에 쇠파이프를 얹은 작품에서 옷과 침구류 재료인 솜은 여성, 건설과 폭력의 도구인 쇠파이프는 남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쇠파이프는 ‘남근’을 은유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고 썼다. 정강자는 회고전 준비 중에 이 설치작품을 꼭 재현해달라고 갤러리 쪽에 요청했다고 한다.

갤러리는 “작가는 가벼운 솜이 철제 파이프의 무게에 짓눌리는 효과를 통해 당시의 성별 이데올로기와 성정치의 역학관계를 유희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강자는 이 작품에 대해 “억눌리는 존재인 여성을 표현했다”는 짧은 말만 남겼다.]

정강자 ‘억누르고’(2018 재현),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정강자 ‘억누르고’(2018 재현),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정강자’ 이름 석자를 검색하면 주로 1968년 누드 퍼포먼스 <투명풍선과 누드> 결과만 나온다. ‘억누르고’ 기사를 쓸 때까지만 해도 단 1줄도 나오지 않았다. 당시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은 진중한 고발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남자들은 여자에게 저 묵직한 설치 작품의 뜻이 무엇인지, 왜 만들었는지를 묻지 않았던 것이다. 군사 독재와 강고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예 관심 밖에 밀려난 작품이었다. 정강자의 다음 말은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몇 번 해프닝 작업을 하고 나니까 한국 남자들이 술집 여자인 양 쉽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기자들까지도 인터뷰 후 술 마시고 같이 자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는 투로 ‘술 한잔 하러 가자’고 하곤 했다.”(2012년 언론 인터뷰에서)

정강자의 ‘투명풍선과 누드’ 퍼포먼스를 전한 1968년 한국일보 보도.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정강자의 ‘투명풍선과 누드’ 퍼포먼스를 전한 1968년 한국일보 보도.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정강자(왼쪽에서 두번째), 키스미, 1967.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정강자(왼쪽에서 두번째), 키스미, 1967.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난 지난해 김구림의 작품 세계를 다룬 ‘미학의 혁명가 아방가르드 김구림’(▶연재 보기)를 아티션에 18회 연재했다. 6년 전 쓴 글이다. 그때 한국 아방가르드에 관한 자료를 많이 읽었는데, 정강자는 항상 남자 작가들 이름 사이에서나 발견했다. ‘억누르고’ 같은 작품 설명은 찾기 힘들다. ‘한강변의 타살’도 유명한 행위예술인데, 정강자에겐 작품 취지 같은 걸 묻지 않았다. 정강자에게 묻는 질문은 주로 “왜 벗었나”였다.

정강자는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는 퇴폐 작가’ 이미지도 굳어졌다. ‘주간시민’ 1970년 9월 1일자 제목은 ‘장발령 검거 열풍을 몰고 온 여인: 막내린 전위 <무체전>의 정강자’다. 정강자가 관객 참여예술 개념을 도입한 첫 개인전 무체전이 “고위층의 명령을 받은” 정부 당국(공보관)으로부터 강제철거당한다. 그는 주간시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이번 전시회에서 내 예술이 흔히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미풍양속을 해치는 그런 저속한 흥미의 대상이 나리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읍니다. 무체라는 동양철학적인 주제로 일관된 일련의 전시회를 계획한 건데, 정작 내 작품을 와서 알아보지도 않은 회전의자에 앉은 분들이 들리는 소문만 믿고 철거해버린 겁니다.”

정강자는 요즘 말로 ‘블랙리스트’였다. 쉽게 굴하는 존재도 아니었다. 1970년 박정희 독재의 서슬 퍼런 시대에 ‘회전의자에 앉은 분들’을 당당하게 비판했다. 그는 철거통고를 받고, 한국의 문화정책을 통곡한다는 뜻의 포스터를 만들어 ‘무체전 취소’를 알리는 공보관측 통고 포스터에 나란히 붙였다. 그는 검은 장막과 작품 도구를 들고 공보관 앞으로 가 ‘서성거리기’도 했다. 한강 백사장으로 가 한국의 문화정책을 통곡한다고 크게 쓴 플래카드를 불태워버렸다.

정강자, 유신반대 시위, 1973, oil on canvas, 130 x 160 cm. 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정강자, 유신반대 시위, 1973, oil on canvas, 130 x 160 cm. 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무체전 강제 철거 이후 정강자의 외부 활동은 뜸해진다. 정강자가 작품에 손 뗀 것은 아니다. 그는 1970년대 작업을 계속했다. 이번 전시에서 ‘억누르고’ 못지 않게 놀라웠던 또 다른 작품 ‘유신 반대 시위’는 1973년 작품이다.전의경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시위대 사이사이 그려 넣은 플래카드 문구는 ‘독재 타도’ ‘군사정권 물러나라’ ‘군사정권 결사 반대’ ‘총칼로 뺏은 권력 끝내라’이다. ‘당당한 주체로서의 여성’도 잊지 않은 듯하다. 같은 해 ‘명동’이란 작품에서는 상반신을 드러낸 채 명동 거리를 힘차게 걸어가는 자신을 담았다. 여성의 몸을 주체적으로 부각시킨 것을 두고 오도하고 비난한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다.

명동 Myeong-Dong, 1973, oil on canvas, 162.2 x 130.3 cm,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명동 Myeong-Dong, 1973, oil on canvas, 162.2 x 130.3 cm,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1992년 자회상(왼쪽)과 1996년 자화상. 정강자는 실제 바지와 가죽 점퍼를 캔버스에 붙였다. 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1992년 자회상(왼쪽)과 1996년 자화상. 정강자는 실제 바지와 가죽 점퍼를 캔버스에 붙였다. 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아쉽게도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정강자의 작품에 관한 작가 자신이나 비평가 말이나 글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아라리오갤러리가 정리한 글(발체)을 아울러 전한다.

[화실에서 거리로

작가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작품활동에 몰두했던 1960년대 말 한국에서의 상황은 국제사회의 흐름과 직접적인 맥락이 닿아있었다. 국제정치의 부조리와 사회적 불평등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움직임은 1960년대 초중반에 걸쳐 인권운동, 페미니즘 운동, 학생운동으로 확산되었다. 5·16 군사 정변을 겪은 한국 사회에서는 새마을운동의 희망찬 기운과 군정의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교차하고 있었다. 경제적 발전에 대한 기대와 정치적 좌절을 동시에 경험했던 이 시대의 젊은 작가들은 내면으로 침잠하기보다는 외부의 현실에 대해 발언하기 위해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우리는 젊었고, 문화 정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작가가 회고한 바와 같이 정강자가 속했던 1960년대 말의 미술 집단 ‘신전’과 ‘제4집단’은 폐쇄적인 기성세대에 대한 개념에 저항하고자 했던 최초의 집단적 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강변의 타살 퍼포먼스를 전한 당시 경향신문 보도. 모래 속에서 물총 세례를 받는 이가 정강자다.

한강변의 타살 퍼포먼스를 전한 당시 경향신문 보도. 모래 속에서 물총 세례를 받는 이가 정강자다.

사회와 정치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형식주의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이 지배적이었던 한국에 새로운 목소리를 낸 실험적 전위미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참여했던 《청년작가연립전》 개막 첫 날의 가두시위, <한강변의 타살>(1968),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1970)은 모두 거리에서 진행된 퍼포먼스로, 전통적 예술 공간에 귀속되기를 거부하고자 일상의 공간으로 예술을 침투시킨 작업이다. 이들은 삶과 예술의 경계, 전통과 현대의 위계에 도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강자, 휴지로 만든 드레스 (Paper Tissue Dress), 1969. 출처: 강국진작가갤러리

정강자, 휴지로 만든 드레스 (Paper Tissue Dress), 1969. 출처: 강국진작가갤러리

거리의 시위를 방불케 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정강자를 포함한 젊은 작가들은 한국 미술의 독립적 가능성과 주체성을 찾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주체의식은 정강자에게 특별한 작업적 근간을 제공했는데 이는 여성의 몸이라는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에서 나타난다. 《청년작가연립전》에 출품했던 <키스미>(1967)는 여성의 입술을, 지금은 분실된 <STOP>(1968)은 여성의 둔부를, <여인의 샘>(1970)은 여성의 가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여성의 나체를 보여주거나, 노출이 금기시 되던 시대에 여성의 신체부위를 극대화한 이 작품들은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보수적인 성별 이데올로기와 성정치의 역학관계를 유희했다. 그가 여성의 몸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의 몸이 지시하는 함축적 의미와 주체적 정체성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정강자와 ‘여인의 샘’ 1970. 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정강자와 ‘여인의 샘’ 1970. 아라리오 갤러리 제공

하지만 유신시대를 겪으며 표면적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비춰질 수 있는 미술은 기피대상이 되었고, 군정시기의 문화예술계는 경직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정강자의 작업을 비롯한 한국의 실험적 미술은 정부에 의해 공공연하게 금지된 전위활동으로 낙인찍혀 미성숙한 미술운동의 하나로 간주되었을 뿐이었다. 정강자는 이러한 실험적 미술의 전개에 참여했던 소수의 여성 예술가 중 하나로 그의 기여도와 영향력은 실제보다 저평가 되기도 했다. 나아가 평생에 걸친 예술작업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은 1960년대의 선정적인 ‘해프닝-퍼포먼스-쇼’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였다. 정부의 감시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가 다시 1970년대 중반의 이벤트 퍼포먼스로 활동을 이어갔던 여러 예술가들과는 대조되는 행로였다.](아라리오 갤러리 도록 중 부분 발췌)

1966년 화실에서 정강자.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1966년 화실에서 정강자.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