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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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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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서 개인전, 임옥상 작가

<임옥상: 여기, 일어서는 땅>이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지난 21일 임옥상 작가가 신작 ‘성균관 명륜당 은행나무를 그리다’(2022)의 은행나무를 흉내내며 서있다. 1세대 민중미술 작가로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예술활동을 이어온 그는 “민중미술이 오늘날의 문맥에 맞느냐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문재원 기자  mjw@kyunghyang.com

<임옥상: 여기, 일어서는 땅>이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지난 21일 임옥상 작가가 신작 ‘성균관 명륜당 은행나무를 그리다’(2022)의 은행나무를 흉내내며 서있다. 1세대 민중미술 작가로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예술활동을 이어온 그는 “민중미술이 오늘날의 문맥에 맞느냐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문재원 기자 mjw@kyunghyang.com

내 삶이 결코 민중적이지 않을뿐더러
지속적 새겨진 주홍글씨도 힘들었다
또한 민중미술을 교조적으로 보고
확장성 차단하는 내부 문제도 한몫

논란 끝에 호암갤러리서 전시회 등
고 이건희 회장과 크고 작은 인연

문재인 대통령은 차선으로 지지 선언
윤석열 대통령 풍자 그림 경고는
그가 수없이 외친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말뿐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

내가 변화를 멈추는 순간 죽은 목숨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임옥상’(72) 하면 많은 이들이 민중미술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이름 석 자를 수식할 단어는 많다. 그는 회화를 넘어 조각가이자 설치예술 작가이고 문화운동가이자 공공미술가다. 누군가는 그를 ‘흙의 예술가’라 칭하고, 어떤 이는 ‘거리의 예술가’ 또는 ‘환경미술가’라 부른다. 여느 민중미술계 작가들과 달리 제도권 갤러리에서 성공적인 개인전도 여러 차례 치른 스타작가이기도 하다.

지난 2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임옥상: 여기, 일어서는 땅>(2023년 3월12일까지)이 개막했다. 리얼리즘 미술에서 출발한 작가 임옥상의 현재를 조명하며 그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초·중기 작품과 작가노트까지 망라한 자리다. 미술작품으로는 ‘여기, 일어서는 땅’ ‘흙의 소리’를 비롯한 대규모 설치작 6점을 포함해 신작 10여점과 20여점의 과거 작품 등 총 30여점이 전시됐다.

개막일에 맞춰 임 작가를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났다. 그는 활력이 넘쳐 보였다. 관람객들에게 수시로 먼저 다가가 “내가 이거 만든 임옥상이에요”라고 소개하면서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함께 찍으며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이런 열정적인 기질과 시들지 않는 왕성한 호기심이 숱한 장르를 넘나들며 오늘의 작가 임옥상을 만든 게 아닐까 생각했다.

‘여기 일어서는 땅’ 2022, 흙·혼합재료, 200×200×10㎝(36), 1200×1200×10㎝(전체), 국립현대미술관 제작 지원

‘여기 일어서는 땅’ 2022, 흙·혼합재료, 200×200×10㎝(36), 1200×1200×10㎝(전체), 국립현대미술관 제작 지원

-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갖는 첫 개인전인데 소회가 어떻습니까.

“기쁘고 감사하죠. 1976년 작품부터 2022년 작품까지 망라돼 있어 저도 미술작가로서 살아온 제 삶 전체를 볼 기회가 되고 있어요. 각각의 작품들을 보며 새삼 옛 기억이 나네요.”

- 이번 전시 타이틀로 내세운 작품은 12×12m 대규모 설치작업 ‘여기, 일어서는 땅’이에요. 1995년에도 <일어서는 땅>전을 열었는데, 그 연장선상의 작품인가요.

“작품 ‘일어서는 땅’은 1994년 동학 100주년 기념전을 준비하면서 ‘동학은 무엇인가, 결국 수탈당하던 농민들이 일어선 것이 아닌가, 땅과 함께한 그들이 일어선 것은 결국 땅이 일어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삽과 곡괭이로 작업하고 석고를 부어 거푸집을 만들고 종이 펄프로 찍어내 제작했죠. ‘여기’를 붙인 이번 작품 역시 같은 맥락이에요. 특별한 점은 민통선 통일촌 장단평야 내 논에서 작업했다는 점이에요.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자각이 내 평생을 지배해왔거든요.”

- 논을 캔버스 삼아 작업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작년 3월 논 위에 작업을 거의 다 해놨는데 갑자기 수일간 폭우가 쏟아졌어요. 그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됐죠. 땅이 바짝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재작업해야 했어요. 이 작업은 엄청난 먼지와의 싸움이에요. 힘도 많이 들죠. 2×2m 크기의 흙판 총 36개를 이어붙여 완성한 것인데, 흙판 1개의 무게가 30㎏이에요. 논바닥에서 떼어낼 때는 50㎏ 느낌이죠. 혼자서는 불가능해 인부 세 명을 썼는데, 일이 끝난 후 내게 ‘앞으로는 그림 나른다고 하지 말라’고 부탁하더라고요. 너무 힘겨웠던 거죠(웃음).”

‘성균관 명륜당 은행나무를 그리다’ 2022, 캔버스에 흙·먹·아크릴릭, 162×112×3㎝(3), 162×336×3㎝(전체), 임옥상 작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제공

‘성균관 명륜당 은행나무를 그리다’ 2022, 캔버스에 흙·먹·아크릴릭, 162×112×3㎝(3), 162×336×3㎝(전체), 임옥상 작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제공

지난해 나무 그림 100여점으로 채운 <나는 나무다>전을 연 그는 이번 전시에는 ‘성균관 명륜당 은행나무를 그리다’(2022)를 내놓았다. 그는 2017년 개인전부터 캔버스에 흙을 발라 그린 작품들을 보여왔다. 이 작품 역시 물에 젖은 흙을 캔버스에 바른 후 다 마르기 전에 한 번에 큰 붓으로 흙을 밀어내며 나무를 새기듯이 그렸다. 이후 흙이 충분히 마르면 날카롭고 삐죽한 가지와 꽃을 그려넣는 방식이다. 흙이 말라도 균열이 생기지 않는 비결에 대해 그는 “흙과 수십년간 씨름한 결과”라고 말했다.

‘1세대 민중미술가’로 꼽혀온 그는 최근 민중미술과 거리를 두는 발언을 부쩍 많이 하고 있다. “민중미술 작가라는 타이틀이 어느 순간 족쇄가 됐다”거나 “나를 과거에, 그 어떤 것으로 묶지 말아달라”고 했다. 발언 배경을 묻자 임 작가는 “예술가를 특정 범주에 가두는 것은 모독”이라며 “나는 어떤 것에도 갇혀 있기 싫다”고 강조했다. 거기엔 몇 가지 사유가 있었다.

- 스스로 더 이상 민중미술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내 안에 그러한(민중미술) 게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를 돌아볼 때 일단 나의 삶(경제수준 등)은 민중적이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민중작가임을 내세우는 게 낯뜨거워요. 또 대중은 민중미술을 미술 일반으로 보지 않고 불온한 미술, 이상한 미술로 인식해요. 보수정부가 민중미술에 지속적으로 그러한 주홍글씨를 새겼고,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심했죠. 그것이 어느 순간 대중에 먹혀들어갔어요. 주홍글씨가 새겨지면 뭘 해도 색안경을 끼고 봐요. 나는 그게 힘들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소위 민중미술 내부 문제에서 기인해요.”

- 어떤?

“민중미술을 교조적으로, 매우 협소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민중미술도 유연함을 가지고 대중 속에서 발전해나가야 확장성이 있는데, 그걸 차단해요. 모든 시대에는 저마다의 문맥이 있어요. 그 문맥을 리드해야지, 문맥을 규정하고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에요. 민중미술이 시대의 문맥에서 나온 개념이라면 그것의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해요. 나는 민중미술이 오늘날의 문맥에 맞느냐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에요.”

- 민중미술은 수명을 다했다고 보는 거군요.

“여전히 지구촌은 ‘1 대 99의 사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득 불평등이 심각해요. 하지만 1980년대 민중미술의 개념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과 형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귀로 II’ 1983, 종이부조에 석채, 272×182㎝

‘귀로 II’ 1983, 종이부조에 석채, 272×182㎝

임 작가는 1950년생이다. 일제강점기 때 노동자 모집에 자원해 일본에서 피혁 기술을 배워온 아버지는 해방 후 서울의 피혁공장에 다녔다. 6·25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아내와 함께 고향인 충남 부여로 피란을 갔고 거기서 장남인 임 작가를 포함해 아들 셋을 낳았다. 몇년 후 아버지는 홀로 상경해 공장에서 일했다. 임 작가가 아버지가 있던 서울로 올라온 것은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서다. 영등포 변두리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다.

-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은 언제 알았습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서울에 올라와 영등포중학교, 용산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반을 했어요. 나가는 대회마다 상을 받았죠.”

- 원래 성격이 쾌활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교 학생회장 선거에 나서 정견발표를 한 후 스타가 됐어요. 하교 후 소에게 풀을 먹이며 돌아다니면서도 연습했거든요. 이후 웅변대회도 도맡아 나갔어요. 공부도 잘했고요.”

- 서울대 미대 회화과 68학번으로, 유신체제가 공고화된 1974년에 동대학원을 졸업했는데,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뎠습니까.

“화단은 경직돼 있고 미술 공모전은 배타적이었어요. 새로운 발상 자체를 거부했죠. 내가 설 자리는 없었어요.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무엇인가를 생각했어요. 모든 사람은 땅 위에 서 있고, 땅 위에서 산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러면서 땅의 물질성에 관심을 갖게 됐고, 자연스럽게 흙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죠. 삽과 곡괭이, 물감통을 들고 산야를 헤매고 다녔어요. 선을 긋고 그림을 그리고 불을 놓기도 했어요.”

-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기행으로 보였겠어요.

“이웃 마을 주민들이 수상하게 지켜보며 수군대더니 어느날 한 사람이 나섰어요. ‘뭐하는 거냐’면서 ‘당국에 신고하겠다’고 겁을 주더라고요(웃음).”

1982년 문화공보부는 임옥상 작가의 그림 4점을 압수했다. 그 중 하나인 ‘땅 II’(1981, 캔버스에 먹·아크릴릭·유채, 141.5×359㎝)에 대해 그들은 북한이 남한을 적화시키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임옥상미술연구소 사진 제공

1982년 문화공보부는 임옥상 작가의 그림 4점을 압수했다. 그 중 하나인 ‘땅 II’(1981, 캔버스에 먹·아크릴릭·유채, 141.5×359㎝)에 대해 그들은 북한이 남한을 적화시키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임옥상미술연구소 사진 제공

당시 작품 제목이 ‘땅’ ‘불’ ‘나무’ ‘꽃’ ‘웅덩이’ 등이었던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초기작부터 흙과 땅 등 자연을 향한 집요한 관심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황폐화된 농촌, 남북 분단의 대치상황, 개발독재의 폭력과 정치적 격동, 변혁을 향한 욕망을 담아냈다. 1979년 ‘현실과 발언’ 동인 창립 후 현실을 발언하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그의 신념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가 광주교대에서 교편을 잡던 1980년 5월 발생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단행본 <옥상,을 보다>(2017)에서 “나는 은유와 상징에다 직선적이고 구체적인 리얼리즘의 시각을 첨가했다”며 “나는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에 붓을 들어 현실에 맞섰다”고 회고했다.

- 1981년 제1회 개인전에서 공개한 ‘땅 Ⅱ’ ‘땅 Ⅳ’ ‘얼룩’ ‘웅덩이 Ⅱ’ 네 작품을 이듬해 당국에 압수당했지요. 당시 상황이 어땠습니까.

“지금은 작고한 최민(미술평론가) 선배가 연락해왔어요. ‘청와대 비서관에게 들었는데 중앙정보부에서 너희들(현실과 발언)을 손보려고 한다. 최대한 막아보겠지만 준비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어요. 이후 중정에서 문화공보부로 이첩했더라고요. 이들이 화가 7명을 압축하며 조직도까지 그렸어요. 내 대학 동기동창인 신경호가 총책, 나는 부책임자가 돼 있더군요. 당시 나는 전주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는데, 문공부 공무원 두 명이 집으로 찾아와 싹 뒤졌어요.”

- 그림을 찾는 거였나요.

“그들은 압수 그림 목록이 담긴 두꺼운 책자를 들고 왔어요. 그림마다 캡션이 붙어 있었어요. 제 작품은 빨간색을 많은 사용한 그림만 4점을 찍었는데, 그들이 적은 캡션을 보니 안보적 상상력이 뛰어나더라고요(웃음). 온 집 안을 뒤져도 그림을 못 찾자 그들은 내년(1983년) 1월10일 안에 돌려주겠다며 문제의 그림들을 서울로 가져오라 했어요. 하지만 그림을 돌려받은 시기는 노태우 정권의 힘이 빠진 1989년 초였어요.”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됐다 국가에 기증된 임옥상 작가의  ‘두 나무’(1981, 캔버스에 아크릴, 187× 139㎝)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 두 나무를 묶어 전혀 다른 국면을 만들어냄으로서 통일의 염원을 형상했다. 임옥상미술연구소 사진  제공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됐다 국가에 기증된 임옥상 작가의 ‘두 나무’(1981, 캔버스에 아크릴, 187× 139㎝)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 두 나무를 묶어 전혀 다른 국면을 만들어냄으로서 통일의 염원을 형상했다. 임옥상미술연구소 사진 제공

1984년 서울미술관 개인전을 마친 그는 그해 가을 돌연 프랑스 앙굴렘 미술학교로 2년간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리다 귀국 후 완성한 ‘아프리카 현대사’로 1988년 가나화랑에서 개인전을 성황리에 마쳤다. 1991년 호암갤러리에서 <임옥상 회화전>이 열렸다. 41세의 젊은 작가를, 그것도 민중미술 계열의 작가를 초대한 것 자체가 파격이었다. 호암갤러리 사상 최대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았다. 제도권 미술공간에서 얻은 성과로 민중미술의 위상도 달라졌다.

- 한때(1992~1998) 가나화랑 전속작가였는데, 당시 가나화랑 대표였던 이호재 회장(서울옥션 회장)과는 언제 첫 인연을 맺은 건가요.

“내가 유학 중일 때였어요. 이 회장이 프랑스에 출장을 왔다가 우연히 만났죠. 1984년 내 개인전에 왔다가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어요. 그날 많은 작품을 구매했더라고요. 귀국 후 그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아프리카 현대사’ 한 작품으로 개인전을 연 거예요.”

- 민중미술에 대한 편견이 짙던 시절 어떻게 재벌이 운영하던 갤러리에서 전시가 가능했습니까.

“당시 호암갤러리는 1991년 새롭게 부상한 민중미술 작가 임옥상의 개인전을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갑론을박했다고 해요. 당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임옥상처럼 젊고 논쟁적인 작가의 작품전을 여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며 교통정리를 했다고 해요.”

- 사후에 공개된 이건희 회장 컬렉션에 임 작가의 ‘김씨 연대기’(1992)와 ‘두 나무’(1981)가 포함돼 있더군요.

“저도 몰랐던 일이라 놀랐어요. 이건희 회장이 내 작품 ‘검은새’와 ‘일어서는 땅’을 소장하신 것은 알았지만 ‘김씨 연대기’와 ‘두 나무’는 누구에게 구매했는지 몰라요.”

- 이건희 회장과 직접 교류가 있었습니까.

“한 번 식사 자리가 있었어요.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후 가나화랑도 재정적 어려움에 빠져 1988년 겨울에 전속작가들을 해체해야 했어요. 경제적으로 궁핍하던 2000년 어느 날 이호재 회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이건희 회장·홍라희 여사 부부가 가나화랑을 방문하니 인사도 할 겸 점심을 같이하자는 내용이었어요.”

- 어떤 대화가 오고 갔나요.

“식사 자리에서 내가 불쑥 이건희 회장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했어요. 옆에 앉아 있던 이호재 회장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더라고요. 이건희 회장이 ‘얘기해요’ 하길래 ‘IMF로 모든 작가들이 어렵습니다만, 저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페이트런(후원자)이 돼주십시오’라고 했어요.”

- 이건희 회장이 뭐라던가요.

“‘그럽시다’ 해요. 식당에서 나오면서 이호재 회장이 나를 보며 ‘하,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에요’ 하더라고요(웃음). 다음달 초부터 1년간 매달 상당한 금액의 지원을 받았어요.”

2017년부터 청와대 본관 로비에 전시된 ‘광장에, 서’(2017, 혼합재료, 1620×360㎝)는 촛불집회 현장의 감동적 장면들과 SNS에 무수히 올라온 생생한 시위 기록사진들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해 30호 캔버스 108개를 연결해 흙을 물감 삼아 완성했다. 가나아트 제공

2017년부터 청와대 본관 로비에 전시된 ‘광장에, 서’(2017, 혼합재료, 1620×360㎝)는 촛불집회 현장의 감동적 장면들과 SNS에 무수히 올라온 생생한 시위 기록사진들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해 30호 캔버스 108개를 연결해 흙을 물감 삼아 완성했다. 가나아트 제공

임 작가는 “변화를 멈추는 순간 죽은 목숨”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스펙트럼이 넓다. 1995년 이후 회화에 국한하지 않고 조각과 설치미술로 표현영역을 넓혔다. 소재도 흙뿐 아니라 나무, 쇠, 철로 확장했다. 공간도 거리로, 광장으로 확대됐다. 2000년부터 십수년간은 공공미술에 집중했다. 매향리 상징 조형물인 ‘자유의 신 in korea’(2000), 서울 녹색병원의 ‘글 비 나리는 뜰’(2001), 마포 하늘공원의 ‘하늘을 담는 그릇’(2009) 등이 이 시기에 완성됐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전국이 들끓던 2016년 겨울에는 주말마다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대작 ‘광장의, 서’(2017)를 완성했다. 집회 현장의 감동적 장면들과 SNS에 무수히 올라온 생생한 시위 기록사진들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해 30호 캔버스 108개(총 길이 가로 16.2m, 세로 3.6m)를 연결해 흙을 물감 삼아 완성한 작품이다.

- ‘광장에, 서’는 2017년부터 청와대 본관 로비에 걸렸어요.

“작가로서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어요. 수락 후 바로 후회했죠.”

- 왜요.

“권력의 가장 핵심에 작품이 걸린다는 것 자체로 어떤 프레임에 갇힐 수 있으니까요. 나는 특정 대통령이나 당을 지지하지 않아요. 그런데 청와대에 그림이 걸리는 순간 사람들은 나를 이른바 ‘문빠’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 2016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을 하지 않았나요.

“차선의 선택이었죠. 양당체제하에서 우리 모두는 지금껏 차선의 선택을 강요받아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이 양당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 촛불정부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문재인 대통령은 인격적으론 훌륭하지만 5년 만에 정권을 잃었어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 최근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한 고교생 만화 수상작을 문체부가 엄중 경고 조처한 것에 대해선 어떤 견해를 갖고 있나요.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말뿐이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죠. 윤석열 대통령도 얼마나 자유를 외쳤습니까.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예요.”

그는 대학원생 시절 스스로에게 ‘한바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하나의 바람’ 또는 ‘큰’ 바람처럼 살다 가자는 마음에서였다. 어느새 고희를 훌쩍 넘은 노작가는 뜻을 이뤘을까. 꿈이 있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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