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정원식·사진 김정근 기자

문학텍스트처럼 ‘비평적 픽션’으로 딱딱한 서술 탈피

지난해 가을 출간된 <아파트 게임>으로 호평받은 박해천씨(43)는 이력이 특이하다. <아파트 게임>과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던 <아파트>와 <아파트 한국사회>의 저자는 건축학 전공 교수들이다. 그러나 박씨는 디자인 연구자다. 카이스트(KAIST) 학부와 석사 과정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고 영국 미들섹스 대학에서 공간문화연구 석사 과정을 마쳤다. 지금은 홍익대와 국민대에서 디자인사와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디자인 전공자가 ‘아파트의 사회학’이라 불릴 만한 책을 쓰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2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박씨는 “사회학자나 인류학자와 달리 디자인 연구자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입지가 있었다”고 말했다.

[뉴 파워라이터](11)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 사회학자나 인류학자와 구분되는 ‘독특한 입지’란 뭔가.

“디자인사를 연구하면서 인간과 인공물이 주고받는 영향 관계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인공물이 인간의 사고·인지·문제해결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신체적 감각을 재배치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기는 어렵기 때문에 예민한 작가들이 이런 변화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찾아보고 신문기사들도 참고하면서 큰 틀에서 재해석하려 했다. 또 인간·인공물의 영향관계를 보려다 보니 특정한 역사적 국면보다는 한 사람의 생애주기 안에서 인간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대해 쓰게 됐다. 그래서 비평적 픽션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아파트 게임>은 박씨의 세 번째 책이다. 첫 책 <인터페이스 연대기>(2009)는 디자인과 테크놀로지가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을 어떻게 변형시켰는가를 살펴본 연구서였다. 이어 두 번째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2011)부터 아파트가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주요 대상으로 아파트가 등장했다. 이 책이 “아파트가 한국의 시각 문화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아파트 게임>은 “20세기 디자인의 역사는 사실상 중산층의 역사이고, 한국 중산층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아파트의 역사”라는 인식 위에서 쓰인 책이다.

■ 한국 중산층 성장하는 데 아파트가 중요한 역할

두 책은 그가 ‘비평적 픽션’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스타일로 이목을 끌었다. 항공 카메라의 시선에 1인칭 화자의 역할을 부여하거나 가상의 화자를 내세워 마치 1인칭 문학텍스트처럼 읽히는 구성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그의 책들은 아파트라는 사회학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딱딱한 서술을 탈피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필자를 찾는 출판계 종사자들과 가독성 높은 교양서적을 찾는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이론적 논의의 비중이 컸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2011년 출간 후 지금까지 6000부쯤 팔렸다. 이론적 논의를 걷어낸 <아파트 게임>은 이보다 속도가 빨라 지난해 9월 출간 이후 석 달 동안 4000부쯤 팔렸다.

- 아파트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디자인사를 들여다보면 196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전자제품이나 상품들이 최종적으로 모이게 되는 공간이 아파트다. 디자인은 대량생산 체제에서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량생산되는 사물의 소비자가 바로 중산층이었고 한국에서 중산층이 성장하는 데 아파트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아파트를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들의 시선,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시각적 경험을 다뤘다. <아파트 게임>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물음표로 남겨둔 문제를 다뤘다. 어떤 방식으로 중산층이 소비활동을 할 여건을 만들 수 있었는지, 아파트라는 공간이 주거공간이기만 한 게 아니라 독특한 형태의 상품으로서 중산층의 자산소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뉴 파워라이터](11)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 대학 시절 독서 경험이 다른 방식의 글쓰기에 도움

- 디자인 관련 책이나 부동산 문제를 다룬 책에서는 보기 드물게 문학텍스트를 연상하게 하는 글쓰기다. 실제로 책을 보면 박완서, 박민규 등 많은 소설가들의 작품이 인용되기도 한다. 영향받은 작가들이 있나.

“1989년에 카이스트에 입학했다. 1990년대 대학은 요즘 같은 스펙 경쟁이 없던 시절이어서 유람하듯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가들의 책을 많이 봤다. 쿤데라, 보르헤스, 당시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했던 포스트모더니스트 작가들, 박완서, 김원일, 이문열, 김영하, 백민석 등의 책을 좋아했다. 학계에서 요구하는 논문 스타일로는 내 문제의식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고민이 있었는데, 대학 시절 읽은 문학작품들에 대한 독서 경험이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모색하는 데 주효하게 작용했다.”

- <아파트 게임>에서는 10년 주기로 되풀이되는 개별세대 구성원들과 아파트의 상관관계를 살폈다. 세대 문제에 주목한 이유는.

“한국사회의 세대 담론에서 아파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사회에는 각 세대가 중산층이 돼 과거를 회고하면서 자기 세대에 이름을 부여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386 세대의 경우 20대에 한국사회의 모순에 대해 반발했던 엘리트들이 30~40대에 아파트 공간에 포획돼 이전의 급진성을 잃으면서 20대의 정치적 지향으로 자기 세대를 호명했다. 그런데 세대 담론이란 고도성장기에만 가능했다. 지금은 젊은 세대가 ‘집’을 갖기 어렵고 ‘방’에서 살아야 하는 시대다. 사실상 세대담론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에 왔다.”

- 아파트가 주거공간의 표준이 되면서 발생한 부정적인 효과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서 아파트 거주자들은 시민사회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소비자가 됐다. 시민들이 모두 소비자가 되는 데 아파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떤 공동체의 질적 가치를 판단할 때 얼마나 좋은 공동체인가가 아니라 아파트의 가격을 따지게 됐다. 시민주권 대신 소비자주권의 비중이 높아졌다.”

- 아파트의 대안은 없나.

“중산층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자녀의 사교육에 많은 비용을 지불할 수 있었던 근간은 아파트를 통한 자산소득 증대였다. 하지만 고도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욕망의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아파트에서 공동체를 만들며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의 주거모델 확립의 역사에서 시민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새로운 주거모델이나 생활양식을 모색한 경험이 없고 여기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할 생각도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경제상황이 새 대안을 강요하는 상황이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새 모델이 나올 것이라고 본다.”

- 글쓰기 훈련은 어떻게 했나.

“대학원에서는 논문 형식의 글쓰기만 했다. 그러다 1999년에 선배들과 다른 방식의 활동을 해보려 했던 디자인 전공 친구들과 함께 ‘DT’라는 이름의 동인지를 만들어 같이 활동했다. 그러면서 자유분방한 글쓰기를 익힐 수 있었다. ‘슬기와 민’이라는 디자인그룹에서 활동하는 최성민 서울시립대 교수, 미술 평론가 임근준 등이 동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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