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철학자 진태원

김종목·사진 강윤중 기자

번역 오류에 철학자 탓하는 현실 고치려 공격적 비평

“단독 저서도 없는데 ‘뉴 파워라이터’에 들어가도 되나요?(웃음)….” 지난 6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47)는 “그래서 인터뷰를 해도 되는지 고민했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진 교수를 뉴 파워라이터에 추천한 출판사 관계자, 출판 전문가들은 그의 왕성한 번역과 비판적 글쓰기에 주목했다. 진 교수는 <법의 힘>(문학과지성) 등 데리다 책 4권, <폭력과 시민다움>(난장) 등 발리바르 책 4권에다 피에르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그린비)까지 9권을 번역했다. 올 상반기엔 랑시에르의 <불화> 번역본이 나온다. 공역자로 참여한 책을 포함하면 번역 목록은 더 늘어난다.

그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 서점 알라딘 서재에서 ‘balmas’라는 필명으로 데리다 번역본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번역비평가로 이름을 떨쳤다. “오역을 찾는 것보다는 제대로 번역된 문장을 골라내는 것이 훨씬 빠르다” 같은 독설을 마다하지 않았다. 서평을 쓸 때도 주례사 비평과는 거리가 먼, 에두르지 않는 직설의 언어를 주로 사용한다. 그는 성실한 글쟁이다. 박사 과정 이후 이후 계간지, 학술지 등에 4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한 장씩 참여한 책도 꽤 된다. <알튀세르 효과>(그리비)를 엮었다. 진 교수의 블로그(http://blog.aladin.co.kr/balmas)에 들어가면, 그간 지식의 행로와 성과를 확인할 수 있다.

진 교수가 민망해하는 ‘단독 저서’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수권을 내고도 남을 사유의 축적을 이뤄냈지만 단독 저서를 내지 않았다. 인문학 바람에 기댄 서평책들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의아한 일이었다.

[뉴 파워라이터](12) 철학자 진태원

- 여러 권 냈을 법한데 왜 내지 않았나.

“책이 갖는 무게감 때문이다. 철학을 전공해서인지, 나한테 책은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같은 것이다. 책이란 이름, 무게에 걸맞은 책을 쓰기엔 준비가 덜 됐다고 생각했다.”

■ 후배들에게 제대로 번역된 텍스트 읽히고 싶어

- 번역은 어떤 의미인가.

“학부 때부터 영어, 독일어 원서로 강독하고 번역했다. 좋아하는 철학자가 생기면서 번역되지 않은 책을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97년 박사과정에 들어갔을 때 데리다 책의 오역이 많아 처음으로 비판적 서평을 썼다. 번역은 내게 학습의 의미가 있다. 사상가, 철학자에 대한 공부다. 약간의 책임감도 느낀다. 후배들, 철학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제대로 번역된 텍스트를 읽히고 싶다.”

- 공격적 비평을 하는데.

“번역의 중요성 때문이다. 오역이 많은 번역본을 읽고 ‘이게 무슨 철학자냐.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쓴다’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철학자의 문제라기보다 오역 문제인데도 철학자를 탓하는 현실을 바로잡고 싶다.”

진 교수도 2009년 랑시에르의 영문 텍스트를 번역한 글이 오역이라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신속하게 “안이했다”며 독자에게 사과했다. 오역을 지적한 로쟈 이현우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정오표를 올렸다.

- 비판받았을 때 어땠나.

“남들을 비판했으니까 당연히 비판의 권리를 줘야 한다. 그 뒤 더 꼼꼼하게,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 불어책을 주로 번역하는데 언어 공부는.

“학교에서 불어 강좌 듣고, 알리앙스 프랑세즈를 7~8년 다녔다. 프랑스 리옹 인문계 고등사범학교에서 연구원을 지냈다. 20년 정도 불어를 공부했다. 프랑스 대중매체도 시간 나는 대로 접하려고 한다. 우리말 공부도 중요하다. 대학원에 갔을 때 번역투 문장을 많이 쓰고 있었다. 고치려고 많이 노력했다.”

[뉴 파워라이터](12) 철학자 진태원

■ 내 삶, 학문의 기준은 하고 싶은 공부 하며 사는 것

- 번역가인가, 서평가인가, 철학자인가.

“늘 연구자라고 생각한다.”

- 블로그 대문에 데리다 사진과 함께 ‘해체라는 유물론을 위하여’라고 적어뒀는데.

“언젠가 쓸 데리다에 관한 책 제목이다. 데리다를 좋아한다. 데리다는 다른 철학자의 텍스트를 읽고 분석할 때 공정, 엄밀하다. 다른 주석가들은 자신이 연구하는 철학자의 모순이나 불합리한 점을 쳐내고, 체계를 잘 다듬어내 완벽하다는 걸 보여주려 애쓴다. 그러나 데리다는 ‘해체’나 ‘탈구축’이라는 방법으로 세심하게 분석하면서도 그 철학자의 체계가 피할 수 없는 모순, 즉 아포리아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준다. 그 체계와 다른 식의 철학 이론을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 사회정치적 측면은.

“데리다의 사회정치 철학은 ‘혁명 이후’, ‘해방 이후’를 지향한다. 혁명하고 이전 지배자들이 행했던 폭력과 똑같은 폭력을 가하고 그것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고 난 뒤에야 진정한 해방을 추구할 거냐고 묻는다. 데리다는 혁명·해방·전복이 새로운 지배자를 세우는 것과 달라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오래 숙고했다. 나한테도 중요한 화두다.”

진 교수는 2010년 말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K군에게’라는 공개 편지글을 쓴 적이 있다. 그는 K군에게 서울대 학부 출신이 아니거나 영미권 유명 대학원에 진학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인문학, 특히 철학은 하지 말기 바란다며 다른 길로 가라고 조언했다.

- 지금도 같은 조언을 하겠는가.

“더 비관적이다. 한국 대학원에 가는 것은 외국 대학원에 가기 위해 외국어 배우는 과정에 불과하다. 석사과정만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 깊이 연구하고 서로 경쟁하는 학풍, 학파가 생길 수 없다. 서양에서 공부한 분들은 미국, 독일, 프랑스가 내 나라인 것처럼 착각한다. 독일 철학은 그 나라의 역사 흐름, 지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 나라 현실 문제를 신음하다 나왔다. 그것을 ‘나의 철학’, ‘우리 철학’이라고 생각하면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 또는 삶 문제에 무관심하게 된다. 학문 공론장이 없다는 게 문제다. 문제를 사고하고 실천적 해법을 제안하는 일이 힘들다. 대학 교수도 기업 직원 같은 처지가 됐다.”

- 비정규직인데 정규직 교수가 되고 싶지 않나.

“신분 불안정은 연구자에게 큰 제약이다. 지금 있는 곳은 잡무가 없어 공부하기 굉장히 좋다. 정규직으로 가면 좋겠지만, 목매달며 무리할 생각은 없다.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웃음).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사는 게 제일 보람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 삶, 학문의 가장 큰 기준이다.”

- 계획은.

“스피노자에 관한 박사논문을 더 보완해 책으로 내야 한다. 2007년에 출판사와 계약했는데 아직 못 썼다(웃음). 스피노자, 데리다 연구나 번역을 더 하고 싶다. 발리바르 책도 3권을 계획 중이다. 발리바르는 문장이 길고 복잡해 번역이 쉽지 않다. 이 작업은 내 지적 삶의 큰 부분을 떼어내는 것이다. 20년 동안 6~7년을 발리바르 책을 번역하는 데 보내는 셈인데, 어찌 보면 미친 짓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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