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수유너머R 연구원 고병권

김종목·사진 서성일 기자

“내 삶·행동과 일치하는 말이 사회를 중요하게 변화시켜”

고병권 수유너머R 연구원이 ‘뉴파워라이터’에 선정되고 나서 어느 학자로부터 “고 선생이 왜 뉴파워라이터냐”는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그간 지식운동, 사회운동을 활발히 했고 출간한 책도 많으며 인문학계에 존재감도 큰데 ‘뉴(new)’라는 수식어로 묶을 수 있느냐는 지적이었다. 고 연구원은 연구·생활 공동체 수유너머로 치면 16년, 서울사회과학연구소(서사연)까지 거슬러 포함하면 20년을 공부하고 강의한 제도권 밖 지식인의 대명사같은 존재다. 2001년 첫 단독저서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소명출판)을 시작으로 최근 <“살아가겠다”>(삶창)까지 9권의 책을 냈다. 이달 중 니체에 관한 새책이 나온다. ‘뉴’라는 말에 어폐가 있을지 모르겠다. 고 연구원을 뉴파워라이터에 추천한 이들은 40대 초반이라는 생물학적 젊음, 철학과 당대 사건을 아우르는 글쓰기와 함께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추방된 여러 현장에서 새로운 실천적·급진적 철학을 이끌어내는 사유 방식에서 여전히 신선함을 느낀 듯하다.

고 연구원의 휴대전화는 오래 꺼져 있었다. 지난해 8월 취재차 ‘인문학 열풍’에 관한 의견을 구했을 때 그는 “인문학과 지식인을 걱정하는 건 한가해 보인다. 한참 낙담하고 있을, 밀양송전탑에서 농성하는 노인분들이 더 걱정”이라고 했다. “요즘 세상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컨텍스트에서 벗어난 텍스트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휴대전화는 인터뷰 섭외 때도 먹통이었지만 e메일은 열려 있었다. 지난 설 연휴 직전 서울 용산 해방촌 수유너머R연구실에서 만난 고 연구원에게 ‘뉴파워라이터’ 선정에 이의가 있었다는 말을 꺼냈더니, 그는 “파워가 떨어져서 그런 거 아닌가요”라며 웃었다.

[뉴 파워라이터](15) 수유너머R 연구원 고병권

-신간 <“살아가겠다”>는 어떤 책인가. 제목에 따옴표를 달았는데.

“책에 적은 건 강연이나 인터뷰, 현장 방문 때 들은 말이다. 그래서 따옴표를 쳤다. ‘해고는 살인이다’처럼 지난 몇년간 한국 사회 갈등 현장 복판에는 ‘삶’ 내지 ‘생명’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에 ‘살려달라’고 했는데, 이번 제목은 ‘네가 어떻게 하든 나는 살아가겠다’는 선언이다. 이계삼 선생이 ‘별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별 수 없이 여기 있을 수밖에 없고 단호하게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게 중요하다. 혁명은 빠른 걸음, 지름길에 있는 게 아니라 단호한 것에 있다.”

-밀양송전탑, 대추리 같은 현장에서 사유를 끌어냈다.

“현재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현장이며 밀양은 삶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시공간이 형성된 곳이다. 사람들이 멀리까지 사유를 밀고 갈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논밭 보상이 불충분하다’는 님비가 ‘이 송전탑이 다른 데로 가면 괜찮은가, 핵발전소는 필요한가’라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사유로 갈 수 있다.”

-니체 책은 어떤 내용인가.

“가제는 ‘언더그라운드 니체’다. 그라운드라는 게 토대, 근거인데 ‘근거들의 근거 없음’의 영역이 있다. 금권정치든, 귀족정이든 각각의 근거나 원리가 있다. 민주주의는 그런 근거의 근거 없음을 드러낼 때 시작된다. 한 예로 리영희 선생은 독재정권의 근거 아래로 뚫고 내려가 근거 없음을 폭로했다. 언더그라운드 개념을 정치체에 적용하면 민주주의를 사유할 수 있다. 아이디어를 준 게 니체의 <서광>이다.”

[뉴 파워라이터](15) 수유너머R 연구원 고병권

-철학자의 가난을 주제로 강연을 한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비싸게 여기는 것들은 철학자한테 애당초 필요없는 것들이다. 철학자들은 검소하고 가난하게 보이지만 풍족하게 산다. 삶의 가치를 뒤바뀌야 한다. 가난은 오래 전부터 고민한 주제다. 개인 경험도 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나. 세들어 살 때 열 살 어린 집주인이 어미니한테 큰 소리를 질렀다. 그 남자의 힘, 어머니의 침묵과 무력함이 어디서 왔을까. 그 사람이 천박해보였고 그 사람처럼 될까봐 두려웠다. 가난은 찢어진 팔꿈치가 아니라 그게 신경 쓰이는 것이다. 재화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갖는 감정이다. 빈곤은 재화의 결핍이고 가난은 고생이라는 뜻이 있다. 빈곤사회학은 ‘빈곤’을 탈출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그러면 사유하지 않게 된다. 가난학을 공부하고 싶다.”

-공부란 무엇인가.

“좋은 공부는 자기한테 부딪치거나 맺혀 있거나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과 싸우는 좋은 방법이다. 요즘은 ‘배움 이전의 배움’을 많이 생각한다. 어떤 각성의 순간이 있다. 장애인 학교에서 검정고시를 배우던 어느 장애인 여성이 난생 처음 MT라는 걸 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그런 각성을 한다. 각성의 순간이 변혁적 사회과학 지식을 배울 때가 아니라 별을 보면서 일어난 거다.(웃음) 사람들이, 사회가 ‘집에 처박혀 있으라’고 했는데, 그걸 뒤집는 체험을 한 거다. 그러면 이전에 배운 지식과 정보가 새롭게 읽힌다. 수십년 집에 갇혀 살던 이 여성은 이후 독립해 이동권 투쟁에 열심히 나섰다. ”

-글쓰기란 게 어떤 의미인가. 형식은 신경 쓰나.

“제 삶의 형태가 읽고 쓰고 말하기 밖에 없다. 생계의 의미도 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를 쓸 때, 처음에는 논문 형태로 쓰다가 화가 났다. 민주주의를 스타일로도 보여주고 싶었다. 결론 다음에 결론에 반대함이라고도 쓰고 민주주의 창작 동화, 아포리즘도 넣었다. 세상에 없는 책도 인용했다. 형식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은 것을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는 데 신경 쓴다. 다만 급진적 형식은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동화를 하나 쓰고 있다. 딸한테 도움 받아서 한 초등학교에서 마음을 주제로 강연한 걸 글로 옮긴 거다. 많은 걸 느꼈다.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동화작가다. 최고의 경지다. 아이들은 속아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웃음)”

-마무리 말을 한다면.

“내가 말 많다는 걸 잘 안다.(웃음) 말을 줄여야 한다. 요즘 말과 삶이 멀어져 있다는 생각이다. ‘진실한 말’이란 걸 좋아하게 됐다. 사실과 일치하는 말이 아니다. 나한테 중요한 건 자기자신과 일치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에 일부 사실이 틀렸다고 하는데 중요한 건 그 대자보가 진심을 담은 말을 한 거다. 자신의 삶과 행동과 일치하는 말이 사회를 중요하게 변화시킨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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