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여성학자 정희진

글 정원식·사진 김영민 기자

“뻔한 얘기는 독자 모독… 사회통념 재구성에 관심”

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정희진씨(46)와의 인터뷰는 수차례 e메일이 오고간 후 어렵게 성사됐다. 그는 “자격도 안되고 인터뷰는 본래 잘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5년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이 나왔을 때 몇몇 매체와 인터뷰를 한 후 그동안 언론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그 사이에 <페미니즘의 도전>은 2012년까지 14쇄를 찍고 지난해 2월에는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13일 경향신문에서 만난 그는 내내 빠르고 경쾌하게 말했다.

[뉴 파워라이터](16) 여성학자 정희진

■ 그 어떤 ‘주의’도 아니고 합리적 방식 선택

- 인터뷰를 꺼리는 이유는 뭔가.

“글은 잘 쓰고 싶지만 유명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거나 내 정체성이 어느 하나로 규정되는 게 싫다. 내 관심사는 다양하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 ‘페미니스트 정희진’으로만 나가게 될 것 아닌가. 인터뷰에서 한 발언들이 내 의도와 달리 굴절되는 것도 싫다. 예컨대 내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본래 맥락은 평등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양성이라는 것 자체가 남성과 여성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개념이어서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문제의식은 쏙 빼놓고 마치 내가 성평등 자체에 반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 사진으로 보던 모습과 달리 머리가 아주 짧다.

“몇 년 전에 삭발을 한 뒤 짧게 유지하고 있다. 집 밖으로 잘 안 나가기 때문에 머리를 기를 이유가 없다. 머리 감기에도 편하고, 샴푸도 싫어한다. 세수할 때도 쌀뜨물을 사용하고 화장품은 쓰지 않는다.”

- 생태주의자인가.

“나는 그 어떤 ‘주의’도 아니다. 생태주의자도 아니고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생활방식을 선택할 뿐이다. 그냥 살면 되는 문제이지 무슨무슨 ‘주의자’라고 할 필요는 없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하는 거다. 생활비도 거의 안 든다. 거의 지출이 없다. 집에 옷장도 없다. 책을 사고 뭘 먹는 데만 돈을 쓴다. 책 구입은 내가 유일하게 하는 사회운동이다. 좋은 책은 반드시 제값을 내고 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출판사들이 책을 보내는데, 책을 보내지 말라고 한다. 내 책을 낸 출판사에도 홍보용으로 책을 뿌리는 일은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다. 제값 치르고 책을 사는 게 유일하게 의식적으로 하는 좋은 일이고 나머지는 그냥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다.”

- <페미니즘의 도전>이 나온 지 햇수로 8년째다.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변화가 있었나.

“일단 내가 나이를 먹었다(웃음). 그 사이에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나고 사회적인 역할도 커졌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긴급한 필요성이 약해졌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간 게 아니라 여성들의 노동시간이 늘어났다. 저출산은 그 결과다. 페미니즘이 한물갔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한물가거나 필요없는 지식이란 건 없다.”

- 페미니즘에 대한 당신의 생각에서 달라진 점은 없나.

“지금은 건강, 나이듦, 죽음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젊을 때는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 완전한 것은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후에는 세계관이 달라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남성들의 사고 메커니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젊었을 때와는 달리 지금 내게 페미니즘은 내 정체성의 한 부분이다. 페미니즘은 다른 목소리일 뿐,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지금 내 관심은 <페미니즘의 도전> 개정증보판 저자 소개에 쓴 것처럼, ‘다(多)학제적 관점의 공부와 글쓰기’다.”

- 글 쓸 때 원칙이 있다면.

“글은 생각이다. 글쓰기에서는 생각과 입장이 중요하다. 첫째, 진부하고 지당한 말을 안 쓴다. 일단 소재가 떠오르면 노트에 그 소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들의 목록을 적는다. 예를 들어 복지라면 ‘복지가 늘면 게을러진다’ ‘복지가 늘어나면 성장이 둔화된다’ 같은 말들. 그런 다음 통념적인 생각들은 소거해버리고 그동안 없었던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둘째, 글을 쓸 때 내가 아는 가장 까다로운 독자를 상정한다. 여기서 말하는 독자는 실제로 내가 아는 사람이다. 대중은 균질적인 존재가 아닌데 대중을 상정하고 쓰면 반드시 글이 실패한다. 셋째, 내가 몰랐던 걸 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새롭게 배우거나 내가 변해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의 통념, 기존의 논쟁 구도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이 있다. 아는 걸 쓰면 진부해진다. 뻔한 이야기를 쓰는 건 싫다.”

[뉴 파워라이터](16) 여성학자 정희진

■ 지식사회적 관점서 ‘강준만 평전’ 쓰는 게 꿈

- 책을 고르는 기준은 뭔가.

“지적으로 자극적인 책, 문체가 치열한 책, 독특한 책, 정치색이 있는 책이다. 베스트셀러는 안 읽는다. 나는 아무리 많이 팔리는 책이라도 1만부가 넘지 않는 게 좋은 일이라고 본다. 그래야 시장의 위계 때문에 팔리지 않는, 소수자의 입장을 담은 책, 당파성이 있는 책들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당파성 있는 책들이 다양하게 많이 나와야 한다.”

- <페미니즘의 도전> 이후 단독 저서가 없다. 출간 계획은.

“그동안 저자로서는 공백기였다. 단행본으로 낼 원고는 쌓여 있었지만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책을 내지 않았다. 올해는 우울증에 대한 책과 글쓰기·글읽기에 대한 책, 국방 문제에 대한 책, 평화정치학 입문서, 그리고 ‘메타 젠더-이분법을 넘는 사유’라는 제목의 책을 낼 예정이다.”

- 꼭 쓰고 싶은 책이 있나.

“지식사회학의 관점에서 강준만 전북대 교수 평전을 쓸 계획이다. 강 교수는 한국 사회 지식인들 중에서 과소평가돼 있고 지나치게 정형화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한국 남성 중 최초로 정체성의 정치를 보여줬다. 한국 남성 지식인들은 아무도 지역이나 학벌 정체성을 내세워 글을 쓰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을 보편적 주체로 상정해 대의나 민족의 관점에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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