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연극 | 예지 그로토프스키
문학에 대한 섣부른 좌절은 나를 다른 것에 몰두하게 했다. 대학 시절, 나는 연극 동아리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그 시절 학교 앞에 동아리 선배가 운영하던 카페가 있었다. 차 한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책을 봐도 주인이 관심을 주지 않는 곳이었는데, 벽마다 한 남자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반라인 모습은 순교자의 마지막 같은 인상을 풍겼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무아지경의 눈과 몸짓이 날 끌어당겼다.
카페 주인인 선배가 어느 날 <가난한 연극>이라는 책을 보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극이 가난하다는 생각은 놀랄 것이 없었기에, 제목만으로 흥미가 생기진 않았다. 하지만 책을 사서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 책에는 카페에서 봤던 그 사진 속 남자가 있었다. 리샤르트 치에슬락, 폴란드 <연극실험실>의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의 페르소나였다!
<가난한 연극>은 폴란드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의 실험적 연극론이다. 의상이나 분장, 조명이나 음향효과가 없어도, 객석과 구분되는 무대가 없어도,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가지지 않아도 연극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우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배제하고 할 수 있는 연극, 그것이 그로토프스키가 말하는 ‘가난한 연극’이다. 배우는 연극의 핵심이며 공연은 한계를 초월하는 행위라는 그의 연극론은 나를 사로잡았다. 또한 그로토프스키의 협력자이자 분신으로 언급되는 치에슬락을 보며 배우가 신성하고 창조적이며 헌신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후로 연극을 하게 되고 배우로 살게 되면서 내 기준은 언제나 치에슬락이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어떤 연극을 하고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