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에 걸친 인간극장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아마도 압축된 희로애락에서 재미나 공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극적인 삶을 산다는 사람이 한둘씩은 있을 법도 하고. 하지만 인류역사상 인간 드라마를 집대성한 기록으로 <사기(史記)>만 한 게 있을까.
<사기>는 중국의 전설적 시대부터 한나라 무제까지 2000여년의 역사를 130편(52만6500자)에 담은 방대한 기록물이다. 빼어난 역사서인 동시에 인간이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긴 탁월한 문학서다. 유태인에게 <탈무드>가 있다면 중국인에게는 <사기>가 있다.
저자 사마천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지만, 역사서를 쓰라는 선친의 유언을 이행하기 위해 치욕적인 궁형을 감수하고 20년에 걸쳐 이 엄청난 역작을 완성했다.
경제인으로서 내가 제일 관심 있게 읽은 부분은 사마천식 경제평론에 해당하는 ‘화식열전(貨殖列傳)’이다. ‘화식열전’은 “입고 먹는 것이 나라 다스림의 근원”이고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며 ‘재산(貨)을 불리는(殖)’ 일의 중요함을 설파한다. 공자의 이름이 높아진 것도 부유한 자공의 경제력 때문이었다고 사마천은 대놓고 주장한다. 자공이 말 네 마리가 끄는 수레에 공자를 모시고 비단을 들고 제후들을 찾아다닌 덕분이라는 것이다. 중농억상(重農抑商)가치관이 지배한 당시에 상공업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니 얼마나 파격적이었을까. 화식의 세계관은 중국이 개혁·개방 30년 만에 미국을 넘보는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되는 데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오래전 이야기들이지만 <사기>는 지금 봐도 생생한 드라마다. 자주 쓰는 고사성어인 다다익선(多多益善), 사면초가(四面楚歌) 같은 말들이 이 드라마의 명대사들이다. 자주 찾아서 읽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