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사회역학자 김승섭과 편집자 조유나

김유진 기자

“편집자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만큼 오지 못했을 거에요.” 최근 만난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40)가 말했다. 2017년 첫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이어 1년여만인 지난달 펴낸 <우리 몸이 세계라면>으로 각광받는 저자의 반열에 오른 그다. 사회역학의 눈으로 소수자들의 내밀한 상처를 응시한 첫 번째 저서는 그 해 언론들의 ‘올해의 책’과 여러 출판상에 거의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인문사회 출판사 중에서 그에게 원고 청탁이나 기획을 제안하지 않은 곳을 찾기가 더 어렵다는 소문도 들린다.

불현듯 얻은 명성으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갈 법도 한데, 김승섭은 연신 조유나 동아시아 인문사회 팀장(34)에게 공을 돌렸다. 그는 서울 중구 명동의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함께 일하면서 대중서 쓰는 데 있어서는 이 분의 눈이 나보다 훨씬 밝다는 점을 알게 됐다”며 두 권 모두 ‘더불어 만든 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 명동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오른쪽)와  조유나 동아시아 인문사회 팀장이 함께 펴낸 <아픔이 길이 되려면>(2017)과 <우리 몸이 세계라면>(2018)을 들고 있다. 김 교수는 조 팀장을 가리켜 “나와 계속 함께 달려준 사람”이라며 “덕분에 그동안 해 온 공부를 훨씬 더 좋은 형태로, 두 권의 책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감사한 경험을 얻었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지난 15일 서울 중구 명동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오른쪽)와 조유나 동아시아 인문사회 팀장이 함께 펴낸 <아픔이 길이 되려면>(2017)과 <우리 몸이 세계라면>(2018)을 들고 있다. 김 교수는 조 팀장을 가리켜 “나와 계속 함께 달려준 사람”이라며 “덕분에 그동안 해 온 공부를 훨씬 더 좋은 형태로, 두 권의 책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감사한 경험을 얻었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우리 몸이 세계라면>의 모태는 저자가 고려대에서 강의해 온 교양 과목 ‘공중보건의 역사’다. 편집자가 지난해 3월부터 한 학기 동안 강의를 청강하며 녹취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강의 내용을 책으로 묶어내려던 애초 계획과 달리, 책 전부를 새로 썼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속편 같은 느낌이다”는 편집자의 말 한 마디가 저자를 이끄는 ‘방향타’가 됐다.

조유나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달했다고 주장하지만, 김승섭은 속편 언급에 ‘화들짝’ 놀랐다. 그래서 연구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라는 익숙한 틀을 벗어나, 몸과 질병에 관한 방대한 지식 세계를 정면으로 겨누는 작업을 시도했다. 일제강점기 인종주의 과학부터 담배회사의 상술, 차별이나 폭력, 재난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이르기까지 책이 언급하는 주제들에 관해 발표된 한국어와 영어 논문을 죄다 읽겠다는 각오도 다졌다. “공부하지 않으면 고스란히 티가 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첫 책 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는 김승섭에게 조유나는 “성격 때문이다. 선생님은 뭘 해도 그랬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하지만 저자의 집요함을 격려하다 못해 더욱 부추긴 이가 바로 편집자 자신이었다. 조유나는 “현재성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며 “아주 오래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읽었을 때 필요한 이야기인지를 고민해보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섭은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500년전 이야기들이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생생한 뜨거움으로 다가오는 지점을 찾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연구를 논하면서도, 단순히 지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지식’이 과연 무엇인지를 줄기차게 묻고, 객관의 외피를 두른 연구에 작용하는 권력을 근본에서부터 문제시한다. 과학자가 쓴 책이면서도 사회와의 접점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전작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승섭은 “세상에 무료로 재미있게 읽을 것이 얼마나 많은데, 사회적 상처나 과학·역사를 다루는 심각한 책을 돈 내고 사서 읽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싸움이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지금까지 7만부가 팔리며 일반 독자들에게도 호응을 받았다. 조유나에게 성공을 예감했느냐고 묻자 “내가 원고를 읽으며 느낀 감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며 “연구주제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감성을 끌어내는 글들이 많다”고 답했다. 인문사회서로는 이례적으로 초판 1만부로 시작한 <우리 몸이 세계라면>도 출간 2주를 넘기기 전에 또 다시 5000부를 찍으며 순항하고 있다.

2017년 출판계 화제작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이어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펴낸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왼쪽)는 “나는 세상에 무슨 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쓰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쓰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고 말했다. 두 권의 책을 편집한 조유나 인문사회 팀장은 이 말을 듣고 “그런데 선생님은 묘하게 그 두 가지가 종종 겹친다”며 “개인의 학자적 욕심과 사회적 요구 사이의 교집합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2017년 출판계 화제작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이어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펴낸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왼쪽)는 “나는 세상에 무슨 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쓰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쓰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고 말했다. 두 권의 책을 편집한 조유나 인문사회 팀장은 이 말을 듣고 “그런데 선생님은 묘하게 그 두 가지가 종종 겹친다”며 “개인의 학자적 욕심과 사회적 요구 사이의 교집합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두 권의 책을 만드는 내내 저자가 편집자에게 한 당부가 있다. “뜻이 있겠거니, 하지 말고 마구 손을 대라”는 것이었다. 첫 책으로 쌓은 신뢰 덕분에 두번째 작업에서는 한층 긴밀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원고 집필을 시작한 지난해 5월부터 6개월여간 둘은 매일같이 전화나 메신저로 교신했다. 저자는 주제에 관한 새 논문을 찾을 때마다 즉시 편집자와 공유했다. 문단과 문장의 구조, 때로는 단어를 놓고서도 열띤 토론을 벌였다.

편집자에게 마음껏 글의 수정을 요구했다고 해서 저자가 곧이 곧대로 수정안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자칫하다가는 고유의 문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논리적 흐름이 빈약해질 우려가 있어서다. 김승섭은 “한국에서 진지한 교양서가 서 있는 땅이 너무 불리하기에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려고 한다. 신뢰하는 편집자의 코멘트를 적극 반영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며 “편집자와 저자는 이야기나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 전략을 함께 세우는 사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빈 운동장에 서서 모든 것을 함께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동료가 됐다. 숨가쁜 책 작업의 와중에도 틈틈이 새로운 기획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안식년을 맞아 다음달 하버드대로 떠나는 김승섭은 당장 1~2년 내에 저작을 내놓을 계획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향후 10년간의 저술 구상을 마친 상태다. 교수 평가에서 단행본 저술이나 번역이 응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실정인데도 대체 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까.

김승섭은 ‘목적’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임상의사가 아닌 보건학자의 길을 택한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였다”며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공부의 목적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항상 고민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중서 집필이 학자 본연의 일과도 별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대중서는 어려운 내용을 대중적으로 푼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대중서 집필은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어떻게 한국 사회와 소통할 것인지를 놓고 탐구하며 정리하는 일이에요. 학계에서 대중서를 쓰는 작업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목적이란, 달리 말하면 ‘소명’이다. 김승섭은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했던 한 청년이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나오는 문장 ‘혐오는 혐오입니다’를 외쳤다가 일부 극단적 기독교인들로부터 폭력에 시달렸다는 에피소드를 전했다. 그는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꼈다”며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내 말이 상처를 입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책을 낸 후 여기저기서 환영해주지만 이제 겨우 마흔이 된, 시작하는 연구자”라며 “막 신발끈을 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고도 했다.

이제 5년차에 접어든 편집자 조유나는 앞으로도 김승섭 같은 저자들의 첫 책을 많이 만들고 싶다. 그는 “교양서의 경우 첫 책은 저자가 하려는 이야기의 정수를 가장 먼저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다”며 “아직 대중적 글쓰기를 하지는 않지만 널리 알리고 싶은 일을 하는 분들을 저자로 발굴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북인스티튜트(SBI)를 수료하고 동녘에서 편집자로 첫 발을 내디딘 그는 2017년 1월 동아시아로 옮긴 이래,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 김상욱의 <떨림과 울림> 등 화제작들을 잇따라 만들었다. “책의 쓸모를 많이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냥 의미있는 책이 아니라, 실제로 독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글이나 작가가 지닌 매력을 잘 드러내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두 권의 책으로 출판계에서 각광받는 저자가 된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는 지난 15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십대 초반부터 어떤 삶을 살아야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왔다”며 “활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또 세상과 소통하려는 욕망이 오래전부터 내게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두 권의 책으로 출판계에서 각광받는 저자가 된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는 지난 15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십대 초반부터 어떤 삶을 살아야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왔다”며 “활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또 세상과 소통하려는 욕망이 오래전부터 내게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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