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이 신의 손이었다니… 호쾌한 상상과 SF의 경이로운 버무림

소설가

쾌: 젓가락 괴담 경연

찬호께이 외 지음|김영사|696쪽|1만9800원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젓가락이 신의 손이었다니… 호쾌한 상상과 SF의 경이로운 버무림

*이 글에는 <쾌: 젓가락 괴담 경연>에 수록된 찬호께이의 소설 ‘해시노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경이>가 끝났다. 너무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 화가 올라온 걸 알면서도 차마 보지 못하고 아껴두는 중이다. <구경이>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 당분간 이 드라마가 끝나지 않은 세계에서 살기로 마음먹고 비슷한 추리물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쾌-젓가락 괴담 경연>에 수록된 찬호께이의 소설 ‘해시노어’다.

찬호께이는 최근 몇 년간 가장 많이 추천받은 추리소설 작가 중 하나다. 아마 장르 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그의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더라도 이름 정도는 익히 들어왔을 것이다. 나는 홍콩 작가 찬호께이의 명성을 듣고도 아직까지 그의 책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독자였다. 그에 대한 인상은 홍콩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추리극을 쓰는 작가라는 것이었는데, 대표작 <13.67>을 읽어볼까 하다가도 막상 결정적 순간이 오면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랬던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너무 추천을 많이 받은 작가의 소설은 왠지 미뤄두게 되는 버릇이 발동했던 것 같다. 너무 대작일 것 같아서 부담스러운 나머지 책을 펼치는 데에 마음의 준비가 꽤 오래 필요하다고 할지.

‘해시노어’는 다섯 명의 아시아 작가가 릴레이로 쓴 소설을 모은 앤솔러지 겸 연작집이다. 다섯 명의 작가는 젓가락 괴담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각자 다른 스타일로 요리해 내놓았다. 각 작가마다 앤솔러지의 중심 소재인 젓가락 괴담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보는 것이 <쾌>를 읽는 즐거움인데, 찬호께이의 해석이 꽤 신선하고 흥미롭다.

우선 젓가락 괴담이 무엇인지 잠깐 설명해야 하려나? 밥에 젓가락 두 개를 꽂으면 죽은 사람을 위한 제삿밥이 된다는 건 아시아인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주로 숟가락을 꽂는 것으로 알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84일 동안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밥에 젓가락을 꽂는 행위를 하면 젓가락님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 이 괴담의 요지다. 그런데 호락호락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는 세상에 없다. 젓가락님을 소환하면 꿈에 여덟 사람이 나타나 한 명씩 죽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일종의 러시안룰렛 게임에서 살아남아야만 소원이 이루어진다. 꿈속에서 본인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찬호께이는 공포 미스터리를 포기하고 젓가락 괴담에 유쾌한 모험과 SF를 섞어 버린다. ‘해시노어’의 주인공 핀천은 짝사랑하는 샤오쿠이와 원인불명의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로 동승했던 샤오쿠이의 부모님은 사망하고, 샤오쿠이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SF 요소를 넣었다고 했으니 타임루프를 해서 샤오쿠이를 구하려는 이야기일까? 그렇게 추측했지만, 아니었다. 샤오쿠이는 곧 깨어난다. 핀천과 샤오쿠이, 정체가 불분명한 아원은 어느새 팀을 이루어 젓가락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함께 풀고 있다. 아주 오래된 유물로 추정되는 젓가락은 핀천과 샤오쿠이가 당한 자동차 사고의 비밀을 푸는 열쇠다.

이야기가 후반으로 가면서 비밀이 하나씩 풀리는 과정에서 찬호께이라는 작가의 매력이 드러난다. 이래서 그렇게들 읽어보라고 추천한 것이었구나. 찬호께이는 이 단편소설에서 수많은 조각들을 맞춰나가며 큰 그림을 완성하는 퍼즐 맞추기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한편, SF와 판타지 요소를 섞어 장르 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이감을 함께 제공한다.

젓가락 괴담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찬호께이는 이 질문을 앞에 놓은 다음, 주인공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찬호께이의 상상 속에서 젓가락의 유래는 나뭇가지가 아니라 신의 손가락이다. 젓가락 괴담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 이야기는 몇 천 년 전으로 훌쩍 거슬러올라가 신화와 결합된다.

찬호께이는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젓가락 괴담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젓가락 괴담 게임의 법칙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주인공이 당한 자동차 사고의 원인은 무엇인지, 주인공은 왜 젓가락 한 짝을 찾아 돌아다니는 모험을 해야 했는지를 성실하게 설명한다. 사실 나는 소설의 중반부에서는 작가가 지나치게 꼼꼼하게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것이 약간은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비밀이 풀리는 후반부로 넘어가서는 현실의 제약을 훌쩍 뛰어넘는 작가의 호쾌한 상상에 문득 즐거워졌다. 그래, 소설이 이런 것을 할 수 있었지. 어차피 소설인데 젓가락이 신의 손가락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들 어떻단 말인가. 이런 상상이야말로 이야기, 특히 장르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이 소설의 논리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 유일하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작가가 왜 굳이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인물을 중학생으로 설정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미스터리는 아마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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