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는 내게 중요했던 사람들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건 아닐까

이종산 소설가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어쩌면 나는 내게 중요했던 사람들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건 아닐까


지다웨이 지음 | 문희정 옮김 | 글항아리 | 200쪽 | 1만3000원

지다웨이의 <막>을 읽은 건 ‘타이완 퀴어 SF문학의 진수’라는 출판사 마케팅 문구 때문이었다. 타이완, 퀴어, SF. 각각 무척 매력적인 키워드인데 그 세 가지가 합쳐져 있다니! 그래서 정말 그 이름값을 하는 책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렇게 단순하게 ‘예’나 ‘아니요’로 대답하고 싶지 않아지는 작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막>의 주인공은 ‘모모’라는 여자다. ‘모모’라는 이름은 그녀의 동화 같은 탄생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다. 그녀의 엄마가 옛 친구와 언덕을 올라갔는데 그곳에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두 사람은 나무에서 탐스러운 복숭아를 꺼내 반으로 쪼갰다. 그들이 복숭아를 둘로 쪼갠 것은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분도(分桃)’라는 아름다운 이야기 때문이었다. 복숭아를 쪼개 나눠 먹는 행위에는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남다른 우정이라는 뜻이 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짐작이 가시겠지만,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였다. 두 사람이 ‘분도’를 위해 복숭아를 쪼개자 그 안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엄마의 옛 친구는 아이가 복숭아에서 나온 데다 얼굴도 복숭아를 닮았으니 ‘모모타로’를 따서 아이의 이름을 ‘모모’라고 짓자고 했다.

모모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자주 떠올린다.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모모는 어릴 때 몸 전체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어쩌면 나는 내게 중요했던 사람들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건 아닐까

에 퍼진 균을 없애기 위해 수술을 받았다. <막>에서 이 수술은 주인공의 인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심적인 기억으로 남는다. 더 정확히는 모모가 수술을 기다리며 병원 생활을 하던 기간에 앤디라는 친구를 만났던 기억이 그녀의 일생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 앤디는 외부와 차단된 1인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던 모모에게 어른들이 소개해준 친구였다.

모모는 금세 앤디를 사랑하게 되고, 그와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수술을 끝내고 나온 뒤 모모는 평생 앤디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모모는 앤디를 만날 수 없게 만든 엄마를 원망하고, 그 원망이 불씨가 되어 모녀 관계는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틀어져 버린다. 모모는 집에서 먼 학교에 가서 피부관리를 배우는데, 재능이 있던 그녀는 최고의 피부관리사 중 한 명이 된다.

<막>에는 SF소설로서 흥미로운 설정들이 꽤 많이 들어 있다. 이 세계에서는 피부관리사가 매우 각광 받는 사회의 주요 인사라는 설정도 이 소설의 재미있는 아이디어 중 하나다. <막>의 세계에서 인류는 오존층 파괴로 인해 더 이상 육지에서 살지 못하고 바닷속에 도시를 지어 이주했다. 이들에게는 자외선 때문에 피부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던 공포가 심어져 있다. 그것과 함께 다른 몇 가지 이유가 합쳐져 이 세계의 인류는 피부관리에 무척 신경을 쓴다. 이 세계 최고의 피부관리사들은 책 바깥세계의 일류 의상 디자이너와 비슷한 사회적 위치를 가진다.

모모가 최고의 피부관리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타고난 재능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녀만이 가진 비밀 크림(일명 M-Skin)의 덕택이 크다. M-Skin을 모모가 가진 최고의 손기술로 몸에 발라주면 피부 위에 한 겹의 막이 생긴다. 이 막은 외부의 자극이나 오염을 완전히 막아주는 데다 그 막 아래에 있는 피부는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꿈의 기술이다.

비밀스러운 꿈의 기술을 가진 유명 피부관리사 모모는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한 가지 결핍이 있다. 그것은 어릴 때 헤어진 친구 앤디에 대한 결핍이다. 앤디가 사라진 뒤부터 모모는 항상 그 아이를 그리워했다. 앤디가 모모를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로봇이었고, 모모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앤디의 신체 일부를 모모에게 이식하는 수술을 했다는 것은 이 소설의 반전이 아니다. 모모는 수술을 받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이 앤디의 신체 일부를 이식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린 모모가 수술을 받는 동안 앤디의 몸이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 같은 환상을 보는 장면이 책 앞부분에 있어서 독자도 초반부에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모모는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앤디를 느끼며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이 어디까지 앤디인지, 어디까지가 모모 자신인지에 대해. 이 소설의 진짜 반전은 이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한때 가장 친밀했던 사람, 사랑했던 이는 그가 과거가 된 후로도 나의 일부를 이룬다.

우리는 서로에게 일부를 나눠준 뒤 이별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를 이루는 것 중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몇 퍼센트 정도일까? 어쩌면 나를 이루는 조각 중 대부분이 ‘나’가 아니라 나에게 중요했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SF적인 설정들이 다소 덩어리져 있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막>이 사랑에 관한 중요한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점 때문에 나는 이 책에 애정을 느낀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