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 분장’한 백인 배우···조롱·혐오를 넘어 BTS·양쯔충이 있기까지

이영경 기자

미국에서 찾은 아시아의 미

황승현 지음|서해문집|272쪽|2만1000원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양쯔충(60·양자경·미셸 여)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양쯔충(60·양자경·미셸 여)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지난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아시아인들의 잔치였다. 말레이시아 출신 배우 양쯔충이 아시아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남우조연상은 베트남 출신 배우 키 호이 콴에게 돌아갔다. 양쯔충은 “나처럼 생긴 소년 소녀들에게 이 상이 희망과 가능성의 불꽃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콴의 수상소감은 더 극적이었다. “보트를 타고 긴 여정을 거쳐 큰 무대까지 올라왔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가 영화에만 나온다고 말하지만, 이게 바로 ‘아메리칸드림’ 아닐까요?”

지난해엔 <오징어 게임>의 배우 이정재가 아시아인 최초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미국 빌보드차트에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가 1위를 오르락거린다.BTS의 리더 RM은 최근 스페인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유럽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대해 일침을 놓기도 했다. 아시아 문화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권 도처(에브리웨어)에서, 동시에(올 앳 원스) 무대의 중심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룹 BTS(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지난달 20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 총회장에서 열린 제2차 지속가능발전목표 고위급 회의 개회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룹 BTS(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지난달 20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 총회장에서 열린 제2차 지속가능발전목표 고위급 회의 개회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19세기엔 미국의 어떤 무대에서도 아시아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백인 배우가 흑인 분장을 하고 흑인 역할을 맡았던 ‘블랙페이스(black face)’가 있었다면, 백인 배우가 ‘황인 분장’을 하고 아시아인 역할을 맡는 ‘옐로페이스(yellow face)’가 존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가 아시아인을 포용하기 전까지, 아시아인은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었으며 ‘추’하다고 여겨졌다.

황승현 인천대 영문학과 교수·극단 씨어터2 예술감독의 <아시아의 미>는 미국 문화의 주변부에서 차별받던 아시아인이 주역으로 서기까지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펴본다. 미국 건국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제정세와 미국 정치 변화 속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이 ‘추’에서 ‘미’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연극·뮤지컬·영화 등을 통해 분석한다. 미국 이민법·시민법 변화의 흐름과 함께하며,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싸워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풍부한 사례가 보여주는 백인 중심주의가 재현한 ‘아시아인’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달리 말해, 아시아인은 눈이 찢어진 ‘칭챙총’이기 이전에 ‘털 없는 원숭이’에 가깝게 그려졌다.

지금의 할리우드가 있는 곳, 캘리포니아는 200년 전 일거리를 좇아온 이민자들로 넘쳐났다. 동아시아에서 거의 100만명의 이민자가 왔으며, 대부분은 중국에서 건너온 노동자였다. ‘골드러시’ 바람을 타고 미국에서 경제적 부를 이루겠다는 ‘아메리칸드림’을 좇아왔다. 미국 내 전체 중국인 수는 1870년 6만3000명에 달했고, 미국 전체 노동인력의 25%에 해당했다. 중국계 노동자들은 미국의 첫 번째 대륙횡단철도인 캘리포니아철도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인력으로 환영받았다. 이들은 유럽계 이민자들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고도 일했기에, 유럽계 노동자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비도덕적이고 기술 없는 쿨리(제2차 세계대전 전의 중국과 인도 노동자)이자 악덕한 일탈자”로 여겨졌다.

19세기 연극에서 아시아인은 백인이 ‘황인 분장’을 하고 출연했다. <나의 파트너>에서 윙리를 연기하는 찰스 파슬로.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연극 컬렉션.

19세기 연극에서 아시아인은 백인이 ‘황인 분장’을 하고 출연했다. <나의 파트너>에서 윙리를 연기하는 찰스 파슬로.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연극 컬렉션.

황인 분장을 한 백인 ‘차이나맨’···
어리석거나, 돈만 밝히거나, 여성적이거나

1870년대 백인 배우 찰스 파슬로는 중국인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우스꽝스러운 황인 분장을 한 파슬로는 어리석거나 돈만 밝히는 ‘중국인 도둑’이거나, 나약하고 여성적인 중국 남성의 모습을 무대에서 재현했다. 파슬로의 캐릭터는 ‘차이나맨’으로 불렸다. <톰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은 아시아인 혐오자였다. 브렛 하트와 함께 쓴 희곡 <아신(Ah Sin)>의 주인공 ‘Ah Sin’이라는 이름은 ‘아, 죄!’ 같기도 하고 ‘나(I) 죄!’ 같이 들려 경멸적 함의를 띤다. 주인공 아신은 천진난만하고, 순진하거나 무지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트웨인은 “차이나맨은 미국 전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될 것이고, 또한 어려운 정치적 문제가 될 것이다. 대중이 무대 위의 차이나맨을 조금이나마 연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아신>의 등장인물 템페스트의 대사는 무척 노골적이다. “이 중국인의 반짝이는 무지는 항상 사람을 괴롭힌다” “꼬리가 있어야 할 곳에 두지 않고 머리 위에 올려 둔 가엾고 멍청한 동물” “노란 창자의 찢어진 눈” 등 혐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머리 위의 꼬리’는 중국인들의 변발을 가리킨다.

‘중국인 도둑’이란 고정관념은 금광과 노동시장에서 중국인과 백인 노동자가 벌인 경쟁에서 비롯한다. 무대 위의 중국인 등장인물은 대부분 돈에 집착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존 차이나맨을 어떻게 할까요?>,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존 차이나맨을 어떻게 할까요?>,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변발은 백인들의 놀림거리였다. 체구가 작고, 머리를 뒤로 길게 땋은 중국 남성들은 남성성이 박탈되고 여성화된 존재로 그려졌다. 반중 정서로 인해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비교적 개방된 일자리는 청소·요리·세탁과 같은 서비스산업, 즉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진 일자리였다. 파슬로가 연기한 중국인들도 가사노동자, 세탁소 종업원, 빨래 등으로 돈을 번다. 중국인 여성이 성매매를 한다는 편견에 근거한 중국 여성 이민 금지로 중국인 남성들이 집단거주하면서 자연스레 설거지 등 가사노동을 하는 모습이 보이면서 이런 편견은 더해졌다. 당시 미국은 중국인을 배척했다. 1873년, 샌프란시스코에선 중국인의 변발을 금지하는 ‘변발 조례’가 제정되고, 1882년엔 중국 노동자의 이민을 10년간 금지하는 ‘중국인배척법’이 만들어졌다. 1913년 ‘캘리포니아 외국인토지법’이 제정돼 일본계 이민자들이 땅을 빼앗는가 하면, 1924년 이민법은 아시아계 이민자를 외국인으로 분류하고 입국을 금지했다.

20세기 초, 전 세계의 다양한 민족이 몰려들어 섞이는 ‘멜팅폿(용광로·Melting Pot)’으로 묘사됐던 초기 미국은 철저히 유럽 중심의 다민족 국가였다. 아시아계는 그저 영원한 외국인, ‘차이나맨’일 뿐이었다.

영화 <왕과 나>에서 시암 왕과 백인 여성 애나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

영화 <왕과 나>에서 시암 왕과 백인 여성 애나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

‘왕과 나’ ‘남태평양’…뮤지컬 넘버를 타고 흐른 인종 간 사랑
1950~6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담긴 ‘인종차별 비판’

변화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찾아왔다. 일본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중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연합할 필요가 있었다. 인종차별 국가라는 불명예를 씻어내야 할 필요도 있었다. 냉전 시기 소련은 미국의 인종차별을 신랄히 공격했다. 이 시기 중국인배척법이 폐지되고 시민권에 대한 인종·국가적 출신 장벽을 제거하는 이민국적법이 제정됐다.

1932년, 펄 벅의 소설 <대지>가 퓰리처상을 받고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며 영화로도 제작된 것은 이런 변화를 반영한다. 빈농 왕룽 일가가 재산을 일궈 대지주가 되는 과정을 그린 <대지>는 인간미가 엿보이는 중국인의 삶을 그려냈다. 마거릿 랜던의 <애나와 시암의 왕>, 제임스 미치너의 <남태평양 이야기> 등의 소설이 아시아에 대해 이해하고 친숙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줬으며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도 이를 무대와 스크린에 옮겼다.

1950~1960년대 미국 뮤지컬 황금기를 장식한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은 인종 간 사랑을 그리며 백인 순혈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화려한 쇼와 음악 속에 담아냈다. 율 브리너 주연으로 유명한 영화 <왕과 나>는 뮤지컬로도 인기를 끌었다. 1860년대 시암이 유럽 제국에 둘러싸여 있던 때를 배경으로, 왕자의 가정교사 애나는 미국 민주주의를 전파하며, 왕은 이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뮤지컬 넘버 ‘멋진 것’은 미국 민주주의를 찬양함과 동시에 인종 간의 낭만적 관계를 보여준다.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남태평양>은 뮤지컬 넘버 ‘조심스럽게 배우는 거예요’를 통해 인종 편견이 문화적으로 학습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미워함과 두려움은 배우는 거예요. …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이 되기 전에/ 당신 친척들이 싫어하는 모든 사람을 미워하도록/ 조심스럽게 배우는 거예요.”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한 장면.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한 장면.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덧씌운 고정관념 ‘모델 마이너리티’
성실한 아시아인 이미지로 흑인 인종차별 은폐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증가한 ‘아시아 증오 범죄’

1960년대, ‘아시아계 미국인(Asian American)’이란 용어가 자리 잡는다. 1964년 민권법 제정으로 인종·성·종교·국적을 떠나 미국 시민의 평등권이 보장되며 ‘영원한 외국인’으로 배제됐던 아시아계 사람도 미국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사회적·문화적으로 수용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덧씌워진 새로운 고정관념은 ‘모델 마이너리티’다. 역경을 거쳐 미국 사회에서 성공을 거둔 성실한 아시아인을 추켜올리는 듯한 이 신화는 흑인 인종차별을 은폐하는 도구가 됐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근면성과 강한 교육열을 강조하면서 제도적 인종차별주의를 부정하는 근거로 이용됐다.

‘우월한 백인 미국인-영원한 외국인에 가까우면서 덜 열등한 아시아계 미국인-내국인이지만 열등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사회적 삼각관계가 형성됐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누적된 사회적 불만을 아시아계 공동체로 분출했는데, 1992년 LA폭동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정체성을 확립하고, 아시아계 미를 미국적 미의 기준에 포섭되게 하고 전파하려고 노력한 과정을 그려나간다. 1960~1970년대 아시아계 미국 극작가들은 아시아인을 무대에 세우기 위해 애썼다. 그동안 ‘옐로페이스’를 한 백인 배우들이 아시아인 역할을 맡았다. 1960년 텔레비전 영화 <라쇼몽>에서 일본계 배우 마카토 이와마쓰는 “진짜 일본인이라서 너무 눈에 띄네요. 다른 배우가 일본인처럼 보이도록 분장을 했는데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1980년대 데이비드 헨리 황의 토니상 수상작 <M 버터플라이>는 아시아계 미국인 남성 배우가 순종적이며 자기희생적 여성을 연기하게 해, 여성화되거나 약한 남성으로 코드화된 아시아계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폭로했다. 다음 세대는 ‘아시아’보다 ‘미국인’의 정체성에 더 가까워졌다. 자신들이 아시아계 미국인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개별적 작품 세계를 추구했다. 희극 배우 마거릿 조는 자신의 한국 어머니와 한국 사회에 대한 농담을 하며 한국 문화와 거리감을 확보하고 미국인으로서 유머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체어>는 가상의 아이비리그 대학 영문학과 학과장을 맡아 여성이자 유색인종, 싱글맘으로서 분투하는 한국계 미국인 김지윤(샌드라 오)의 이야기를 담았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 <더 체어>는 가상의 아이비리그 대학 영문학과 학과장을 맡아 여성이자 유색인종, 싱글맘으로서 분투하는 한국계 미국인 김지윤(샌드라 오)의 이야기를 담았다. 넷플릭스 제공

이제 아시아계 미국인은 미국 문화의 주역이자 주체로 자리 잡고 있다. 넷플릭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주인공을 백인으로 바꾸려는 ‘화이트 워싱’을 거부하고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를 내세워 성공을 거뒀다. 샌드라 오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어>에서 최초의 유색인종 여성 학과장 역할을 맡았다. 캡틴 아메리카로 대변되던 마블에도 ‘샹치’라는 아시아계 영웅이 등장했다. 하지만 차별과 배제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미·중의 대립으로 아시아계 사람을 향한 증오범죄가 증가했다. 샌드라 오는 2021년 ‘아시안 증오 반대’ 시위에 앞장섰다.

미국 사회 속 아시아인을 탐구한 저자는 긴 여정 끝에 한국 사회 내부의 타자를 바라본다. “한국 사회의 주류와 비주류, 미와 추에 대해서 돌아보고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책과 삶]‘황인 분장’한 백인 배우···조롱·혐오를 넘어 BTS·양쯔충이 있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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