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천국에 가두지 말라”···자연에 깃든 영성, 기후위기 ‘열쇠’

이영경 기자

자연과 구별하는 서구적 인식에

기후 위기에 처한 오늘날 세계

·

유·불·선, 힌두, 이슬람, 기독교···

경전과 옛 문헌에 담긴 문장들로

자연과 연결성 중시했던 인류

잃어버린 통찰을 되짚어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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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방식 넘어 “믿음 체계 바꿔라”

종교학자가 일깨워주는 지헤

인간과 우주의 이미지. 언스플래시

인간과 우주의 이미지. 언스플래시

성스러운 자연

카렌 암스트롱 지음·정영목 옮김|교양인|236쪽|1만8000원

인류는 지옥의 문을 열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예언자처럼 외쳤다. “인류의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산업화 시대 이전에 비해 지구의 온도가 2.8도 높아지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지난 20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기후목표 정상회의에서 한 연설로, 이 자리에 세계 탄소배출량 1·2위를 차지하는 미국과 중국은 초대받지 못했다.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꺼지지 않는 산불과 전례 없는 홍수, 기록적 폭염을 경험하며 ‘지옥’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도 점점 더 파괴적 영향을 미치는 이상 기후 속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종교학자는 기후변화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연과 인간을 별개로 생각하는 서구의 근대적 세계관에서 원인을 찾는다. 자연을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도구와 자원으로만 여겨온 현대 문명이 인간과 자연의 근본적 연결을 끊어버리고 그 결과 자연은 물론 인간 종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쓰레기를 줄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생활 방식만이 아니라 믿음 체계 전체를 바꿔야 한다.”

암스트롱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자연 세계와 맺어 왔던 연결성, 통합된 관계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유교·도교·불교·힌두교·이슬람교·기독교, 신비주의와 낭만주의 시까지 인류의 모든 문화와 전통에서 “자연은 성스럽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맹자는 “만물 모두가 내 안에 있다”고 말했고, 욥은 자연을 향해 “거룩하다”고 외쳤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주는 구름 속에 계셨다”고 말했고 월리엄 워즈워스는 “자연의 빛과 찬란함”에 대한 시를 썼다. 저자는 다양한 종교와 문학 작품을 넘나들며 우리가 근대 이후 500년 동안 잃어버린 자연과의 연결성을 찾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암스트롱은 열일곱 살에 수녀원에 들어갔지만 7년 만에 환속해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가르친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끌림은 그의 행보를 다시 바꾸었다. 종교학자가 되어 <축의 시대> <신의 역사> <신의 전쟁> 등의 책을 펴냈다. <성스러운 자연>은 본격적인 종교서나 역사서는 아니다. 기후변화가 몰고올 파국 앞에서 종교학자가 자연과 인간의 통합과 연결을 일깨우려는 다급한 외침에 가깝다. 그는 ‘축의 시대’(기원전 900년~기원전 200년경) 동안 개발된 통찰과 관행으로부터 여전히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자연의 성스러움에 대한 통찰이 인류를 구할 수 있을까? 한가한 소리가 아닐까? 하지만 지옥문이 열려 화염이 쏟아져 나오는데, 화석연료를 들고 제발로 걸어가지 않으려면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책은 우리가 익숙해서 고리타분하게 여겼거나, 오해와 편견에 가려져 있던 종교에 대한 지식을 통찰력 있게 전달한다. 유교와 도교의 우주론이 재발견되고, 오해에 가려 있던 이슬람교를 새로 보게 된다. 책장을 덮고나면 우리는 이전보다 “더 슬프고 지혜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쿠바 작가 토마스 산체스의 그림 ‘El otro yo’. 교양인 제공

쿠바 작가 토마스 산체스의 그림 ‘El otro yo’. 교양인 제공

신화에서 벗어난 세계 , 제 1세계 사람들에게만 편안
영적 혁명 없이는 우리 행성을 구하지 못한다

암스트롱은 먼저 신화를 오해로부터 건져올린다. 미토스(mythos)와 로고스(logos)는 인류가 진리에 다가가는 두 가지 방식이었다. 미토스는 시간을 초월한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인간의 가장 깊은 차원을 파고들었다. 오늘날은 로고스가 세상을 파악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여겨진다. 암스트롱은 로고스는 기술 발전을 가져올 순 있어도 인간 삶의 궁극적 가치에 관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불가해한 고통과 슬픔을 받아들일 때 신화에, 제의에 의지했다. 근대 이후 서구 세계는 과학과 기술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며 신화를 깎아내리기 시작했지만 “신화에서 벗어난 세계는 운 좋게도 제1세계에 살던 사람에게는 편안했을지는 몰라도 지상낙원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신화가 열등한 사고 양식이라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화는 그저 이야기가 아니라 제의와 의례를 통해 인간이 행하는 ‘실천적 행위’였다고 말한다. “우리와 같은 인간, 우리가 속한 인종적·민족적·이데올로기적 부족을 넘어서는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돕는 좋은 신화가 필요하다. 지구를 다시 신성한 것으로 공경하는 데 도움을 주는 좋은 신화가 필요하다. 기술적 천재성이 발휘하는 파괴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영적 혁명 없이는 우리 행성을 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암스트롱은 근대 이전 인류가 어떻게 우주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봤는지, 자기중심주의를 넘어 자아를 외부로 확장할 수 있었는지, 그 지혜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초기 문명에 속한 사람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힘을 초자연적이고 따로 구분된 ‘신’으로 경험하지 않았다. 고대 중동에서 ‘신성’을 뜻하는 일람, 인도에서 궁극적인 존재를 뜻하는 브라흐만, 중국에서 우주의 근본적 길로 말하는 ‘도’는 자연 만물에 깃든 초월적 존재에 가까웠다.

인간과 자연을 구분한 기독교···아퀴나스, 욥은 ‘자연의 거룩함’ 이야기

기독교는 조금 달랐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던 히브리 성경은 자연 세계보다는 인간사에서 신성을 경험했으며, 근대 초기 유럽에서 자연과 신성의 연결은 끊어졌다. 인간은 신을 대신해 자연을 다스리고 이용했다. 하지만 저자는 유럽 기독교도 성스러운 존재가 어디에나 있는 힘으로서 자연에 가득하다고 봤다는 흔적을 찾아낸다. 13세기 도미니크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이 “만물 어디에나 현존한다”고 말했다.

<욥기>가 대표적이다. 욥은 하느님의 시험에 들어 혹독한 고통을 겪는다. 자식들이 다 죽고 욥은 병에 걸려 머리에서 발끝까지 악성 궤양으로 뒤덮인다. 욥은 신에게 묻는다. 왜 고결한 자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느님은 욥에게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이야기한다. 인간의 자기중심적 관점이 편협하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다. “성경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자연이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 힘, 완결성,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보여진다. “<욥기>의 저자는 욥이 성스러운 자연의 아름다움과 힘과 신비를 드러내 보여준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욥은 이스라엘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예언자였다.

카렌 암스트롱은 인류의 종교가 보편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연결성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언스플래시

카렌 암스트롱은 인류의 종교가 보편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연결성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언스플래시

고리타분한 유교?···‘기’는 자연과 우주를 인간의 연속체로 인식

유교는 글쎄, 한국인에게는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는 무협영화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유교의 ‘기’는 우주의 본질, 모든 생명에 스며 있는 에너지를 뜻했다. 인간과 우주는 똑같은 실재를 공유해 둘로 나뉠 수 없으며 기가 인간의 가슴속에 담길 때, 그를 ‘성인’이라 했다. 자연 세계와 우주를 인류의 연속체로 봤으며, 인간이 특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독특하지도 않다. 공자가 기원전 6세기에 처음 선언한 황금률-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기소불욕물시어인)-은 단지 인간관계의 덕목이 아니라 만물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고대 아리아 유목민들은 르타, 브라흐만으로 불리는 궁극적 실재가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 자아의 핵심에도 스며들어 있다고 여겼다. “근대 서양에서는 신을 천국에 가두지만 인도인들은 계속 전 세계 어디에나 성스러운 존재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슬람교야말로 자연의 성스러움 강조

이슬람교는 오해와 편견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한 종교일 것이다. 저자는 이슬람교야말로 자연의 성스러움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경전 쿠란은 자연의 질서가 신의 계시라고 말한다. 이슬람교도는 일찍이 자연과학을 발전시켰고, 자연과학이 성스럽다고 여겼다. 저자는 비이슬람교도가 쿠란의 매력을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쿠란은 독송이란 뜻으로, 큰 소리로 읽도록 기획된 경전이며 단어의 소리와 의미가 핵심적이었다. 최초의 이슬람교도들은 쿠란의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쿠란에서 주제, 단어, 구절, 소리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 음악에서 최초의 선율을 증폭하면서 복잡성을 켜켜이 쌓아 하는 변주와 같다고 말한다. 저자는 쿠란을 통해 종교적 가르침이 이성적이라기보다는 미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본다고 말한다.

자기를 비우는 비움, 자기중심적 에고를 벗어나는 길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케노시스, 자기 ‘비움’이라는 개념도 인상적이다. 노자가 말한 도는 자기를 비워낸 상태를 의미한다. 붓다는 아나타(무아)라는 수행을 통해 자기가 없는 내적 상태에 이를 수 있었다. ‘나’와 ‘나의 것’이라는 자기중심적 관념이 질투, 자만 과대망상, 오만, 폭력에 이르게 된다고 봤다. 어린 시절 붓다는 밭을 가꾸는 것을 보다가 어린 풀이 뜯겨 나가고 벌레와 알이 죽는 것을 보면서 슬픔과 기쁨을 느낀다. “한순간에 자연스럽게 동정이 나타났고 붓다를 자기를 넘어선 곳으로 데려가 고통이 그의 심장까지 뚫고 들어오게 해주었다.” 엑스타시스(망아 상태)의 경험이었다. 예수의 삶과 죽음 역시 케노시스를 보여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역설은 가장 급진적 케노시스를 요구한다.

자이나교의 무해함, 아힘사···만물에 감정이입하는 “슬프고 지혜로운 사람”

극단적 금욕주의로 유명한 인도의 자이나교의 영성의 핵심은 아힘사(무해함)다. 자이나교도는 떨어진 과일만 먹고, 혹여나 벌레를 밟지 않을까 조심조심 움직인다. 저자는 아힘사에서 만물의 고통에 대한 감정이입을 읽는다. 이 감정이입을 통해 우리는 세계가 고통 속에 있음을 깨닫고 우리가 자신과 다른 종에게 끼치는 피해에 주목할 수 있다. 자신을 넘어 타인, 동식물, 자연에게까지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분명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더 슬프고, 비통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전보다 슬프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지혜는 인류를 영적인 측면 뿐 아니라 기후변화라는 외적 위기에서도 구해줄 길잡이가 될 것이다.

[책과 삶]“신을 천국에 가두지 말라”···자연에 깃든 영성, 기후위기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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