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에 대한 오해와 진실
“고통받는 사람이 있어서 구했다”
하버드 출신 기자 배리언 프라이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구출
하지만 ‘영웅’이 될 생각은 없었다
“치매 어르신의 자서전을 만들다”
노인돌봄 사회복지사 오정숙
돌봄에 사려깊고 창의적인 헌신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는 않는다
경쟁·보상 집착 ‘능력주의’ 말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작은 노력
사회를 떠받치는 다양한 ‘능력’도
관심·존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최근 <신경끄기의 기술> 등을 쓴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 마크 맨슨이 우리나라를 찾아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하다’라는 영상을 공개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맨슨은 영상에서 ‘모 아니면 도’라는 한국인의 뿌리 깊은 사고방식을 소개했는데요. 그는 분야 상관없이 모두가 일제히 정상을 향해 가열차게 ‘노력’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이런 ‘K노력’의 중심에는 ‘능력 있는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간다는 ‘능력주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문득 조금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간 ‘능력주의’에 대해선 이런저런 말을 해왔지만, 과연 그 ‘능력’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능력’에 비례한 보상이 정당하다고 했을 때 그 ‘능력’의 내용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무엇일까요? ‘능력’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능력들은 얼마나 많을까요? 만약 그런 ‘능력 바깥의 능력들’을 모두 무시한다면 우리는 좋은 삶과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번 레터에선 이런 질문들을 품고 ‘다양한 능력’에 대해 해찰해보기로 했습니다.
안 유명한 영웅의 엉뚱한 ‘능력’
배리언 프라이(1907~1967)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아마 처음 들어보신 분들이 대부분일 텐데요. 그는 하버드대 출신의 20세기 미국 저널리스트이고요. 1940년대에 한나 아렌트, 마르크 샤갈, 막스 에른스트 등 세계적인 유대인 학자와 예술가 200여명을 포함한 총 2000여명의 유대인들을 나치의 탄압으로부터 피난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구출 활동을 주도적으로 벌이다가 당시 프랑스 정부 등과 마찰을 일으켜 체포당할 위험에 수차례 놓이고, 구출 대상들을 위해 위조 여권을 만들고 생활비를 지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주목하려는 부분은, 이 대단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는 생전에도, 죽고 나서도 딱히 ‘영웅’으로서 대단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왜일까요?
미국계 유대인 소설가 데어라 혼은 그의 논픽션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의 한 챕터에서 배리언 프라이라는 인물의 다소 기이한 삶과 ‘능력’에 주목합니다.
프라이는 여러 면에서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대학 시절 딱히 사회정의에 대단한 관심이 있지도 않았고 그저 예술적 취향이 조금 있는 정도였죠. 프리랜서 기자, 작가 생활을 하던 프라이는 특파원 당시 우연히 나치의 유대인 탄압에 맞닥뜨리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0년엔 탄압이 심해지자 파리의 유대인 지식인들을 구출하는 긴급구조위원회에 합류해 주도적으로 구조를 시작합니다. 딱히 정의감에 넘쳤다기보다는, 그에게 있어선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죠. 그냥 고통받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했습니다.
‘능력’이라는 렌즈로 그의 삶을 바라보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 고통받는 사람을 ‘그냥’ 구하는 능력, 괴팍할 정도의 고집, 잡다한 임기응변 능력, 소외된 자로서의 감수성, 어설픈 예술애호가 감성(창작 능력은 별로 없음), 부적응, 조증 증상, 솔직함, 자신의 명성엔 신경 쓰지 않는 무던함, 고생을 자처하는 습성, 자신의 이익보다도 미래를 바라보는 이상주의….
‘이런 것들이 능력이라고?’라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는데요. 실제로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고, 남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었으며, 슈퍼맨처럼 슈퍼파워를 갖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대체로 조증에 가까운 활력을 품고서 대부분의 일들을 헌신과 대단한 임기응변으로 처리해내는 고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그의 ‘능력’들이 모여서 ‘실제로’ 업적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꽤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이처럼 프라이가 갖은 어려움을 다 겪으면서 구해낸 사람들이 구조 당시에 그를 ‘일꾼’처럼 부리고 구조 이후에도 그를 오히려 철저히 무시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누가 자기 노력을 알아주지 않아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무던함’이라는 특수한 능력으로 묵묵하게 콧대 높은 예술가들을 섬겼고, 이후에도 그들에게 크게 아쉬움을 표하지 않았죠.
데어라 혼은 결과적으로 프라이의 엉뚱하고 어리둥절해지는 능력에 대해 ‘예언자의 능력’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예언자처럼 미래를 바라보고, 남을 위해 헌신하고, 타협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이죠. 그는 “오늘날 배리언 프라이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진짜 이유는 그의 재능이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우리가 구했어야 하는 것은 유럽 문화보다도 배리언 프라이 같은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저는 프라이에 대한 이상하고 낯선 이야기를 읽고서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우리 주변에 얼마나 이런 ‘엉뚱한 능력’들이 ‘능력 아닌 것’ 취급당하고,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일까? 하고요.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체로 ‘능력주의’라고 할 때 일컬어지는 능력에는 프라이의 엉뚱한 능력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돌봄이라는, 손해 보는 ‘능력’
이런 ‘능력이 되지 못한 능력’은 비단 ‘나치로부터 예술가를 구하는 대단한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흐르지 않는 시간을 찾아서>는 약 20년간 노인돌봄 현장에서 사회복지사로 활동해온 오정숙 센터장이 쓴 에세이인데요.
그의 헌신적인 돌봄 업무 역시, 그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능력’들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그의 대단한 ‘능력’에 대해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중재력, 경청 능력, 헌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공감력, 인내력, 섬세함, 창의력, 궂은일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능력, 갈등을 관리하는 능력….
정말로 중요한 능력들인데요. 다만 제가 위에서 소제목을 ‘손해 보는 능력’이라고 쓴 이유가 있습니다. 이처럼 저자를 비롯한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등은 이런 헌신과 능력을 지니고서 어르신들을 대하지만, 사회는 이런 능력을 제대로 인정하고 전문가로서 대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려 깊음과 헌신하는 능력을 잘 보여주는 인상적인 사례는 한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한 남자 어르신과 관련된 일화였습니다. 치매 증상이 있어 기억도 좋지 않고 글씨를 잘 쓰지도 못하는 어르신은 언제부턴가 저자에게 “자서전을 출판하고 싶다”며 여러 번 요구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기억이 가물한 노인의 자서전을 내줄 출판사는 없을 것입니다. 그의 딸 역시 “무시하라”고 하죠.
여러 번 저자는 그의 요구를 피해 다닙니다만,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어 어느 날 묘안을 짜냅니다. 그에게 공책과 사인펜(손에 힘이 없는 사람은 볼펜보다 사인펜이 쓰기 편합니다)을 주고, 글을 받아다 직접 사무실 컴퓨터로 타이핑을 하고 초록색지로 표지를 붙여 ‘한 권짜리 자서전’을 만들어드리기로 한 것이죠. 그러자 어르신은 “고맙다,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고, 항상 머리맡에 그 자서전을 두고서 소중히 여겼다고 합니다.
이는 저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어떤 형태로든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려 깊게 헤아렸기 때문에 가능한 창의적인 묘안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효율성’, 가성비만 따졌다면 이 한 권짜리 자서전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이런 ‘돌봄’은 과연 수치로 계량화될 수 없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일까요?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는, 이런 돌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적성과 능력, 각별한 수고가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런 ‘능력’을 전문적인 것으로서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여파는 노동자 본인뿐 아니라 돌봄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나아가 우리 사회에까지 크게 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능력’ 역시 ‘능력 밖의 능력’으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왔습니다. 대체 능력주의의 능력이란 무엇을 위한 능력인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기묘하게 이득 보는 ‘능력’
반면 이상할 정도로 대단한 평가를 받는 ‘능력’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능력주의’라고 할 때 해당되는 아주 좁은 범위의 능력이고요. 그 핵심 특징은 엄격한 자격시험을 통해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살펴볼, 일본 역사가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쓴 <과거: 중국의 시험 지옥>은 수험자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과거 합격을 위해 노력했고, 감독관은 얼마나 지독하게 공정한 시험 집행을 위해 노력해왔는지의 싸움에 대한 내용인데요. 저는 이 책에서도 ‘과거시험(자격시험)을 통해 평가하려 했던 능력이란 무엇인가’에 주목해보았습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과거시험에서 평가하는 능력은 제도가 지속됨에 따라 ‘쓸모없는 능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시험을 위한 능력, 단지 변별력 문항을 통과하기 위한 능력이죠. 제도 초기엔 실용적인 능력을 지닌 우수한 인재를 뽑겠다는 취지에 어느 정도 맞는 인재를 발탁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제도가 안정화되고 수험생들의 수준이 상향 평준화됨에 따라 점차 변별력을 위한 킬러 문항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처럼 ‘시험을 위한 시험’이 될수록, 당연히 온갖 ‘변화구’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부유층이 훨씬 유리하게 됩니다. 미야자키는 “경쟁이 심해질수록 승부의 판가름에는 단순히 개인의 능력보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이 더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공정’한 시험이라는 것은 허상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불평등하게 평가된 ‘능력’을 기반으로 시험에 통과한 이들은 평생 실용적인 업무와는 관계없이 ‘지대추구’에 집중하며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경쟁에 매진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험을 위한 능력’에만 매진하고, 실질적인 능력은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저자는 여기서 ‘공정’을 기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 못 박습니다. 결과적으로 시험을 위한 시험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능력주의의 폐해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이죠. 저자가 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대안을 내놓진 않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시험’에만 매달려서는 우리 사회의 능력과 관련된 문제를 바로잡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맺음말
세상에는 ‘시험을 위한’, 아주 비좁은 능력 외에도, 수많은 이상하고 엉뚱하고 손해 보는 ‘능력’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능력들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거나 혹은 그냥 재밌게 만듭니다. 과연 이처럼 다양한 ‘능력’들의 면면을 소중히 살펴보자고 하는 것이 이상주의자의 이야기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사회적 명예나 부와 직결되지 않더라도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다양한 능력들, 그리고 설령 그런 능력이 있더라도 이를 자신의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 쓰지 않은 ‘촛불’ 같은 삶을 살다 간 이들을 기억합니다.
‘능력주의’가 너무도 당연한 돌덩이처럼 여겨질 때, 그 ‘능력’에 들어가지 못한 다른 능력들을 떠올리면 우리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오늘 레터가 수많은 보이지 않는 능력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연구자님들도 각자가 지닌 ‘능력 밖의 능력’에 대해 떠올려보시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위쪽 QR코드를 촬영하거나, 포털에 ‘인스피아’를 검색해서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