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하게 활용되는 공포와 연민…시청자만 있고 피해자는 없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실화 재연’ 프로그램들

대화의 밀도가 높은 시간이었다. 상대는 별것 아닌 일도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고 우리는 자주 웃었다. 어느 순간 상대는 지인이 겪은 일을 나에게 풀어놓았다.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있게. 때로는 나의 반응을 살피며 이야기의 속도를 조절하며. 그 ‘썰’은 내가 만나본 적 없는 타인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로 시작하는 사연은 남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기막히고 드라마틱했다. 연민과 경악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 들뜬 열기가 뒤섞인 그 눈을 보며 문득 울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삶을 볼거리로 만들고 자신은 구경꾼의 자리에 설 때,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언가를 놓친다.

심야괴담회

심야괴담회

MBC 예능 프로그램 <심야괴담회>는 지난 8월 잇달아 실화 소재의 사건을 방영했다. 8월12일에는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그 옆집에 살던 여성의 사연을, 8월19일에는 1999년 씨랜드 화재 사건이 발생한 이후 폐건물 보존 임무를 맡은 의경이 의문의 소리를 들었다는 내용을, 8월26일에는 1990년 일어난 서울 송파구 세 모자 피살 사건을 다뤘다. 씨랜드 화재 사건은 청소년 수련시설인 씨랜드에서 화재가 발생해 유치원생 19명과 인솔 강사 4명 등 23명이 사망한 참사이다. 일부 재연 장면에서 무당이 “이 동네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끊기질 않는다. 그 혼을 달래주지 않으면 사달이 날 것이다”라고 하는 대사가 포함되었다. 방송 후 비판이 쏟아졌다. 실존하는 사고의 피해자들이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는 뉘앙스가 적절하지 못하며, 사건을 흥미 위주의 괴담 소재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씨랜드 참사 유가족 대표는 자료 요청에 응하면서 이런 식으로 사용될 줄 몰랐다며 유감을 표했다. 송파구 세 모자 피살 사건은 범인의 정체를 반전으로 활용하여 시청자와 패널의 놀라움을 유도하고, 잔혹한 살해 장면이 여러 차례 재연된다. 그런가 하면 한 여성이 겪고 들었던 이상한 일과 소음은 기괴하고 의문스럽게 연출된다. 그리고 복면가왕의 정체를 공개하듯, 사실은 유영철이 이웃이었다고 짜잔 밝힌다. 패널은 경악하고 시청자와 어둑시니(판정단)는 공포에 질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구경꾼이 되면 갖는 인식의 오류
‘저건 나완 상관없는 타인의 비극’

씨랜드 참사 등 실화 다룰 땐
정의와 관음 사이의 줄타기 아닌
윤리적으로 접근해 재연해내야

괴담은 당대의 의식이나 사건·사고 등을 기반한 가상의 이야기다. 시대정신이나 보편적인 감정이 반영된다. 그런데 재미를 위하여 실재를 가공하고 미디어에서 유통하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소비하는 충격과 공포는 즐거움으로 전환된다. 동시다발적으로, 불특정 다수가 소비하며, 일부 패널의 리액션을 통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대리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사건은 그렇게 ‘충격 실화’가 되어 엔터테인먼트라는 롤러코스터로 재탄생한다. ‘타인의 고통’은 그렇게 잠깐 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는 용도로 쓰이고 끝난다. 그래도 되는 걸까?

그것이 알고싶다

그것이 알고싶다

<그것이 알고 싶다>(SBS·이하 <그알>)는 현실의 사건을 심도 있게 취재하여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피해를 조명하고, 은폐된 진실을 파헤친다. <그알> 팀의 집요한 취재력이나, 관련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얽혀 있는 고리를 포착하는 통찰력에 시청자는 자주 감탄한다. 그러나 아동 성추행 사실을 재연할 때 대역 배우인 아동과 실제로 신체적 접촉을 하는 등의 문제, 자신들의 확신을 근거로 무고한 사람을 진범으로 몰아가는 구성, 자극적인 연출 등은 꾸준히 비판받았다. <그알> 애청자로서 느끼는 딜레마는 다음과 같다. <그알>은 분명 ‘좋은 일’을 한다. 그런데 TV 프로그램이다 보니 적정 수준의 ‘재미’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알>의 연출은 한껏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다양한 의문을 제기하며 점점 제작진이 찾은 하나의 진실로 다가가도록 이끈다. 범죄의 심각함, 가해자의 악마성을 강조하고자 다양한 방법이 활용된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삽입하거나,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해 가해자가 피해자를 잠식하는 과정을 스펙터클로 만들고, 피해 사실을 기록한 끔찍한 이미지가 나온다. 시청자는 경악하고 분노하며, 의심할 나위 없이 강렬하게 ‘매혹된다’. <그알>이 만든 유튜브 채널의 이름은 ‘그알 레전드’였다. 이 명명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충격적인 사건일수록 인기를 끌어 레전드가 될 수 있다. 다행히도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이어져, 현재는 ‘그알 캐비닛’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SBS·이하 <꼬꼬무>)는 역사 전문 교양 프로그램으로, 세 명의 이야기꾼이 역사적 사건이나 유명한 범죄 사건을 눈앞의 게스트에게 말로 풀어주는 구성이다. 첫 방영 이후 큰 인기를 얻으며 현재 시즌 3까지 순항 중이며 특히 유튜브 조회 수가 높다. <꼬꼬무> 역시 시즌 1 때 일부 소재가 자극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유혜승 PD는 “과거에 일어난 다 지난 일이지만, 왜 우리가 오늘 다시 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지 그 질문을 시청자에게 던지고 싶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꼬꼬무>는 현재의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하여 새롭게 사유하는 프레임을 제공한다. 가부장적인 재판기록을 공개하며 우리 사회의 젠더의식을 검토해보거나, 변화한 인권의식을 바탕으로 시대의 폭력을 분명하게 폭력으로 규정하는 점 등이 그렇다. 아니 근데. 아니 근데! 이 좋은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위화감을 느낀다. 이야기를 흥미롭게 끌어가는 이야기꾼과, 잔뜩 몰입한 게스트가 격렬한 감정적 반응을 보일 때 특히 그렇다. 이야기꾼은 재미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서사를 재구성하고, 게스트는 분노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린다. 마치 ‘지금’ ‘여기’ ‘이곳’,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듯이.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다는 듯이. 사건과 피해자는 철저하게 과거로 타자화되고, 현재의 나는 그로부터 일어난 감정을 충분히 느낀 후 나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재원 역·도서출판사 이후·2004)에서 사진 이미지가 유통되고 소비되는 양상을 틀로 삼아, 전쟁의 본성과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한계를 고찰한다. 손택은 폭력과 잔혹함의 이미지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유희거리로 소비해버리고, 이로 인해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져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되는 것을 우려한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잔인한 사건과 범죄의 현장을 이미지로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역사적인 사례와 이론으로 증명한 손택은 잔인한 사건의 이미지를 보는 행위의 윤리적 의미를 분석한다. (흑인 학살 전시회를 두고) “이 사진들이 전시됨으로써 우리도 이들과 똑같은 구경꾼이 되어버린 셈이다. 도대체 이런 사진들을 전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들의 분노를 일깨우려고? 사람들을 ‘후회’하게 만들려고,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슬퍼지게 만들려고? 애도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서? 이제는 이 끔찍한 일들을 처벌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꼭 이런 사진들을 봐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이미지들을 본다고 해서 우리가 더 선량해지는 것일까? 이 사진들이 정말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있기는 한 것일까?”(140페이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잊지 않아야 하며, 그러려면 직시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믿음과 조금 다른 주장이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손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통해, 이 글에서는 미디어를 통해,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을 ‘볼’ 특권을 향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연민과 공포를 느낌으로써 내가 그 고통의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은 무고한 자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원글에서는 전쟁이었지만 실화 재연 프로그램을 두고 본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유희거리이자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정의감과 관음증적 욕구는 얼마나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가? <그알>이나 <꼬꼬무>에서 다루는 잔혹하고 기막힌 사건을 접할 때, ‘그것’과 거리를 두고 경악하고 연민할 때, 안전하고 무고한 ‘나’가 살아가는 현실은 무엇을 은폐하는가?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며 ‘이곳’의 내가 안도할 때 현재진행형인 국가폭력이나 젠더폭력, 차별금지법 하나 통과시키지 못할 만큼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현실은 지워진다는 것을 잊지 말자. 실화 재연 프로그램 제작진의 윤리의식과, 이를 소비하는 대중의 기민한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Today`s HOT
아르메니아 국경 획정 반대 시위 이란 유명 래퍼 사형선고 반대 시위 올림픽 성화 범선 타고 프랑스로 출발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