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처럼···눈보라 헤치며 시간과 싸운다

김창길 기자
Solovki  White  Sea  Russia 1992  ⓒPentti Sammallahti,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Solovki White Sea Russia 1992 ⓒPentti Sammallahti,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사진에는 없는 게 많다. 목소리, 향기, 맛, 감촉, 움직임…. 있는 것이라곤 고작 외눈박이 렌즈에 통과된 한 줄기 빛뿐인데, 어떤 빛은 사진이 현상되는 것처럼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 강렬하게 들러붙으며 파장을 일으킨다. 누군가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진실함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게 울림을 주는 사진의 마력은 다른 곳에 있다. 사진은 늘 무언가 부족하다. 좋은 사진일수록 그렇다. 상상의 여지가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이 큰 사진일수록 울림의 파장은 증폭된다.

색깔이 없는 흑백 사진은 그래서 더 뭉클하다. 흑백의 반대는 컬러가 아니다. 컬러는 그 속에 이미 흑백을 품고 있다. 흑백 필름은 화려한 색계의 스펙트럼에서 빛의 명암만을 추출해 받아들인다. 그래서 흑백은 추상이다. 그리고 흑백은 개념이다. 흑과 백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한계치”라고 미디어 이론가 빌렘 플루서는 말한다. 흑은 빛 속에 포함된 모든 진동의 총체적인 부재이고, 백은 모든 진동의 총체적인 현존이다.

흑백의 사태는 광학 이론이기 때문에 현실에 없다. 그러나 흑백 사진은 존재한다. 개념의 흑백이 현실에 가장 근사치로 접근했을 때는 언제일까? 나는 겨울의 풍경을 담은 흑백 사진 속에서 개념과 추상의 흑백을 찾아 헤매곤 한다. 겨울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도 없는 게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 잎새까지 붉은빛으로 타들어 간 가을이 저물면 모노톤의 겨울왕국이 시작된다. 겨울은 계절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겨울은 그저 가을의 끝자락에서 시작되는 봄의 기다림이리라.

Ristisaari Finland 1974 ⓒPentti Sammallahti,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Ristisaari Finland 1974 ⓒPentti Sammallahti,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사진도 기다림이다. “사진기는 사진 찍기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이를 위해 이를 갈고 있다”고 빌렘 풀루서는 사진 찍기를 맹수의 이빨에 비유했다. 카메라의 이빨은 셔터다. 노년의 사진작가 펜티 샤말라티는 사진 찍는 행위를 다른 동물에 비유했다.

“나는 포인터 개처럼 셔터를 누를 시점을 기다린다. 운과 그때 상황에 모든 게 달려있다.”

영국 사냥개 ‘포인터’는 사냥감을 발견하면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다리 하나를 든다. 사냥감이 있는 곳의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냥의 결정적인 순간을 판단하는 것은 사냥꾼의 육감이다. 그래 그건 육감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연못에서 개구리가 얼굴을 내밀고, 골든레트리버처럼 덩치 큰 개를 노려보며 짖어대는 까만 새, 고장 난 자동차 엔진룸을 열고 수리 중인 한 남성을 바라보는 새, 염소를 올라탄 원숭이, 잠자는 소 등 위에서 잠자는 개를 찍을 수 있는 기회는 마냥 기다린다고 얻어걸리는 장면은 아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어떤 느낌이 있어야 사진가의 기다림은 가능하다. 늙은 사냥꾼의 표현은 간결하다.

“운이 좋았죠!”

한국의 겨울이 포근하다며 농하던 사진가의 고향은 북유럽의 핀란드다. 영국인들이 난방을 시작한다는 영하 10도의 날씨에 핀란드 사람들은 슬슬 긴소매 옷을 입기 시작한다나. 영토 대부분은 타이가(taiga)라 불리는 침엽수림이다. 타이가는 무수히 많은 호수를 품고 있다. 숲과 호수를 보호하는 것은 물론 어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요정들과 정령들이리라.

Helsinki, Finlande, 2002ⓒPentti Sammallahti,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Helsinki, Finlande, 2002ⓒPentti Sammallahti,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가 기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수도 헬싱키의 이름 모를 숲이다. 완벽하게 수평을 이룬 나뭇가지 양쪽에서 앉은 큰까마귀 두 마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까마귀의 이름은 생각이라는 뜻을 가진 ‘후긴’과 기억이라는 의미의 ‘무닌’이다. 인간 세상을 돌며 이야기 거리를 물고 온 두 마리 새는 대왕신의 커다란 어깨 위에 앉아 수다를 떠는 ‘오딘’의 전령이다.

후긴 : 큰일이네. 아스가르드(신의 세계)와 미드가르드(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나무 ‘위드그라실’은 아닐 거야. 그래도 부러진 모양새가 너무나 요상해 대왕신 오딘에게 보고는 해야겠는 걸. 숲속에 사는 하얀 하마 ‘무민’ 짓일까? 아니면 망치질 좋아하는 ‘토르’ 짓일까?

무닌 : 음, 기억 못 하나 보군? 거 있잖아, 몇 년 전에 잠자던 토르의 부인 ‘시프’의 금발 머리를 잘라낸 ‘로키’라는 녀석 말이야. 머리에 뿔 두 개 달려있었지 아마. 분명 로키 짓일 거야. 어이, 거기 늙은 사냥꾼 양반! 누가 그랬는지 혹시 봤어?

늙은 사냥꾼 : 찰칵!

펜티 사말라티에 따르면 부러진 나뭇가지는 2년 동안 수평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늙은 사냥꾼의 겨울 동화는 러시아에서도 펼쳐진다. 11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 그러니까 1년의 반 정도가 혹한의 날씨라 바다가 얼어붙는다는 백해(White Sea)에 섬들이 무리를 짓고 있다. 가장 큰 섬 솔로베츠키에 튼튼하게 축조된 수도원은 러시아 혁명의 파고와 함께 쓰임새를 달리했다. 스탈린 시대가 시작될 무렵 교정노동수용소인 ‘굴라크’의 전신이 됐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해군 훈련소로 쓰였다. 구소련이 해체되자 수도원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펜티 사말라티는 바로 이즈음 백해를 건너 솔로베츠키에 도착했다.

Solovki  White  Sea  Russia 1992  ⓒPentti Sammallahti,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Solovki White Sea Russia 1992 ⓒPentti Sammallahti,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사진에 담긴 모든 것들이 신기하다. 언뜻 배트맨의 오토바이처럼 투박하게 보이는 이륜차는 설상 주행을 위한 튜닝을 마치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마찰 면적이 넓은 두꺼운 바퀴에 그물을 장착하고, 보조 바퀴 대신 양옆에 스키를 달았다. 아마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설상 오토바이가 아닐까? 안장 위에는 검둥개가 배트맨처럼 늠름하게 앉아 있다. 한 번만 태워 달라는 듯한 친구들 부러운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검둥개는 오토바이를 지키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펜티 사말라티가 포착한 동물들은 초망원 렌즈로 포착할 수 있는 보기 힘든 야생 동물이 아니라 사람과 더불어 사는 가축들과 반려동물이다. 사람과 가까우니 프레임 안에 가두는 일은 어렵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 안에 담긴 어떤 사건이다. 다시 빌렘 풀루서의 말을 빌리자면 사진가는 “자신의 사냥감을 넓은 초원이 아니라 문화 대상의 덤불 속에서 추적”한다. 그가 덫을 놓는 곳은 “문화라는 인공적인 타이가로 형성”되어 있는 사건의 길목이다. 늙은 사냥꾼 펜티 사말라티는 그 길목에 서서 카메라 셔터의 날을 갈고 있다.

소련이 해체됐다. 말로만 인민을 위했던, 서슬 퍼런 공산체제의 붕괴를 동물들이 먼저 알아차렸던 것일까? 해가 뜨지 않는 극야(polar night)의 끝에서 먼동이 틀 무렵 주인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검은 개, 함박눈을 맞으며 설상차가 끄는 썰매를 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동네의 개들, 군함의 출항을 막아서며 얼어붙은 백해를 건너는 하얀 말과 검은 말, 보드카와 갓 구운 빵이 들어 있을 것 같은 주인의 가방을 입에 물고 가는 개를 바라보는 고양이, 연설하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진을 바라보는 검은 개, 혹한의 날씨 속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움직임들…. 솔로베츠키의 겨울 이야기는 개혁과 개방이라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인한 냉전의 종식을 축하하는 우화(寓話)가 된다.

Solovki  White  Sea  Russia 1992  ⓒPentti Sammallahti,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Solovki White Sea Russia 1992 ⓒPentti Sammallahti,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백해의 작은 섬에서 펼쳐지는 동물들의 이야기에 대한 나의 상상은 늙은 사냥꾼이 의도했던 시나리오는 아니다. 사진가는 시나리오를 쓸 수 없다. 펜티 사말라티는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자신의 사진 방법론을 설명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무언가를 볼 때 대부분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보이는 것은 다르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포기할 때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펜티 사말라티가 말하는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보이게 될 때를 기다려 셔터를 누른다는 뜻일 게다.

펜티 사말라티의 사진은 없는 게 많다. 일단 제목이 없다. 심지어 ‘무제’라는 제목 아닌 제목도 없다. 그는 사진이 찍힌 장소와 연도만 표기한다. 이유가 뭔지 묻고 싶지만, 그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다. 펜티 사말라티의 사진전을 진행 중인 서울 삼청동의 한국 에이전시가 그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메일 뿐이다. 물론, 답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들의 관심을 너무 홀대하는 것 아니냐고? 아닌 것 같다. 단지 자신의 작품을 생산능력 이상으로 광고하고 공급하기 싫어하는 성미가 있는 것 같다. 그 흔한 작가의 홈페이지도 없다. 그의 사진 이력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한국 에이전시를 비롯한 해외 갤러리와 한정판 사진집에 실린 타인의 짧은 소개글을 뒤적여야 한다.

펜티 사말라티의 흑백 사진은 대형 사이즈가 없다. 같은 말이겠지만 그의 사진은 작다. 보통 사람들이 사진관에서 뽑을 수 있는 A4지 크기의 사이즈가 많다. 큰 것을 걸고 싶어 하는 근래의 사진 유행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는 구식 사람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사진은 그 정도도 큰 사이즈다. 아주 자랑하고 싶은 장면들을 우리는 A4지 크기로 뽑아 벽에 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그의 작업실에서 직접 인화할 수 있는 젤라틴 실버 프린트의 크기가 그 정도이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관람객들은 펜티 사말라티의 사진을 보기 위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다.

사진의 넘버링도 없다. 이론상 무한 복제가 가능한 사진술로 제작된 사진은 한정판으로 넘버링을 매겨야 사진 값이 비싸진다. 그렇다고 그가 무한정 자기 사진을 복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 찍는 것의 열 배만큼은 정성을 쏟는다는 그의 암실에서 제작될 수 있는 사진은 그리 많지 않다. 펜티 사말라티는 다만 노력한 만큼의 값어치를 책정하는 사람이다. 옥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다시 말해 반시장적이다. 수요 곡선을 뭉개버리고 자신이 흘린 땀방울의 무게만 정확히 잰다. 사진값은 1백만 원에서 3백만 원. 더 올려도 잘 팔릴 것이라는 충고에도 그는 고개를 젓는다.

펜티 사말라티

펜티 사말라티

디지털 사진에 ‘대체 불가 토큰(NFT)’을 삽입해 인위적으로 값을 매기는 요즘의 사진 시장을 펜티 사말라티는 어떻게 생각할까? 얼굴을 붉히며 옳고 그름을 따질 성미도 아닌 것 같다. 안 사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할 사진의 역사가 있다. 사진술을 완성한 사람은 두 명이다. 영국의 헨리 폭스 탤벗과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 세상이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사진술은 프랑스 사람의 것이다. 영국인과 달리 프랑스인은 사진술의 특허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핀란드 사람 펜티 사말라티는 장사꾼이 아니라 사냥꾼이다. 포만감에 익숙해진 사냥꾼은 다시 사냥에 나설 수 없다. 몸이 허락하는 한 그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카메라 셔터의 날을 벼리며 침엽수림과 눈밭을 떠돌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냥꾼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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