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뷔, 자메뷔, 그리고 랑데부

김창길 기자
사진을 위한 공간 ‘아트스페이스J’에서 < 병치(竝置)의 즐거움 Ⅰ_Mix & Match > 전시가 오는 3월 29일까지 열린다. /아트스페이스J 제공

사진을 위한 공간 ‘아트스페이스J’에서 < 병치(竝置)의 즐거움 Ⅰ_Mix & Match > 전시가 오는 3월 29일까지 열린다. /아트스페이스J 제공

여인의 삶은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렸다. 열여덟 살에 그녀는 이미 늙어 있었다. 눈자위에 거무스레한 무리가 지며 조숙한 느낌을 풍기기 시작했을 때는 겨우 열다섯 살 반이었다.

그녀는 메콩강을 건너고 있었다. 여인은 그때의 영상을 떠올려보지만 가물거린다. 강을 건넜던 그날, 그녀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면 사진 한 장쯤은 남겨 놓을 수 있었을 텐데. 강을 건너던 그날의 영상은 숫제 제거됐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바로 이 부재의 영상을 상상하며 자전적인 소설 <연인>을 쓴다.

“그때 나는 보았을 것이다. 남성용 모자 밑에서, 볼품없이 야윈 얼굴이, 어린 마음에 결점처럼 여겨지던 그 모습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야윈 얼굴이 자연의 숙명적이고 잔인한 현상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떨치고 그와는 전혀 반대로 된 것을. 다시 말해, 기질(氣質)이 선택한 어느 달라진 모습이 된 것을.”(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민음사, 20쪽)

절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소녀는 어떤 변화가 필요했다. 남성용 펠트 모자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모자를 쓰지 않았다면 백인 소녀는 연상의 중국 남자를 바라볼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메콩강에서의 운명적인 ‘랑데부(만남, Rendezvous)’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라고 소설에 쓴다.

랑데부는 반복된다. 연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다. 가족사진에서 발견한 네 살 때의 꾀죄죄한 모습, 메콩강을 건너던 열다섯 살의 얼굴, 이미 늙어버린 얼굴을 발견했던 열여덟 살의 영상, 그리고 과거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그녀. 자신의 모든 이미지 중에서 진정한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영상은 바로 현재의 이미지다. 한 남자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한다.

“모두들 당신은 젊었을 때가 더 아름다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지금의 모습이 그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의 당신, 그 쭈그러진 얼굴이 젊었을 때의 당신 얼굴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남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미지의 그 남자를 사진작가라고 상상해본다. 나의 상상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단지 그녀와 그가 만났다는 한 가지 사실을 물고 늘어질 뿐이다. 아마도 몇 차례의 만남이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초현실적인 장면들을 사진 찍고 있던 미국인 사진작가 랄프 깁슨이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찾아간다. 사진가는 그녀에게 애독자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검은 뿔테안경을 쓴 노년의 소설가는 피우던 담배를 손에 쥔 채 그를 바라본다. 사진가는 셔터를 누른다(1974년). 17년 후 작가는 사진가의 사진집 <프랑스의 역사>의 서문을 쓴다.

랄프 깁슨, Bastienne‘s Eye, 1987 (Gelatin Silver Print ) / 아트스페이스J 제공

랄프 깁슨, Bastienne‘s Eye, 1987 (Gelatin Silver Print ) / 아트스페이스J 제공

랄프 깁슨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사진작가다. 미국 대공황의 참상을 기록한 도로시아 랭을 거쳐 현대사진의 선구자로 불리는 로버트 프랭크의 조수로 일했던 랄프 깁슨은 세계 최고의 사진가 그룹 매그넘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단 1년도 채우지 않고 매그넘에서 탈퇴했다. 랄프 깁슨은 선언했다. “사진 행위는 더 이상 어떻게 찍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찍느냐에 있다.” 여기서 ‘무엇’은 찍힌 대상(object)이 아니라 주제(subject)를 말한다. 다큐멘터리처럼 어떤 사실을 서술하는 사진이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을 환기시키는 그 무엇이 담긴 사진.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가사 없는 연주곡이다. 허스키한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과 전위적인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싱어 루 리드와도 협업할 정도로 연주 실력이 뛰어난 그는 기타를 연주하듯이 사진을 찍었다.

랄프 깁슨의 사진을 비평가들은 초현실주의로 분류한다. 난감한 분류법일 수도 있다. 현실을 담지 않은 사진을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카메라가 현실이 아닌 것을 포착할 수 있을까? 비평가들이 말하는 ‘초현실’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일상의 언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현실(real)이 아닌 ‘비현실’을 말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성의 통제로 억눌려 왔던 광기, 환상, 백일몽, 신경증, 히스테리 속에 잠겨 있는 또 다른 현실을 찾는 것이 초현실주의다. 초현실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던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설명은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간은 발걸음을 모방하려 했을 때, 다리와는 닮지 않은 바퀴를 발명했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현실주의를 실천한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사물(바퀴)의 이면에 감추어진 어떤 잠재태(발걸음)를 발견하기 위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몽유병자(Somnambulist)’ ‘데자뷔(Deja Vu)’ ‘밤(Die Nacht)’ ‘데 키리코(Di Chirico, 초현실주의 화가의 이름)’라는 사진 연작의 제목들은 사진가가 자기 사진의 내용을 스스로 간파하며 찍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 ‘사분면(Quadrants)’ ‘수직의 수평선(The Vertical Horizon)’이라는 또 다른 제목들은 초현실주의적인 내용을 찍기 위한 사진 미학을 사진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제목들이 의미하는 바를 몰라도 상관없다. 랄프 깁슨의 사진은 그냥 슬쩍 쳐다보기만 해도 초현실적이라고 말하게 되는 이미지들이다.

절단되고 생경한 각도에서 클로즈업한 신체 일부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어떤 감정을 환기시킨다. 랄프 깁슨의 ‘바스티안느의 눈(Bastienne’s Eye)’은 내게 데자뷔를 불러일으킨다. 처음 본 것인데 이미 봤던 것 같이 착각하는 기시감(旣視感)이다. 한없이 깊고 검은 바스티안느의 눈 속에서 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묘사한 일찍부터 늦어 버린 삶을 살아야 하는 소녀의 눈빛을 본다. 눈에 띄는 얼굴, 초조한 표정, 눈자위에 거무스레한 무리가 진 조숙한 눈.

“불현듯,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불현듯, 나는 마치 다른 여자를 보듯이 나 자신을 보았다. 그 여자는 밖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모든 시선에 자신을 드러내고, 도시와 도시를, 길과 길을 싸돌아다니며 자신을 굴리는, 욕망에 자신을 맡기는 여자 같았다.”(같은 책)

소녀의 자메뷔(jamais vu)다. 평소 익숙했던 것들이 ‘불현듯’ 생소하게 느껴지는 미시감(未視感)을 자메뷔라 한다. 기시감의 반대 현상이다. 소녀는 언캐니한 자메뷔가 마음에 든다. ‘언캐니(uncanny)’는 친밀한 대상에서 느끼는 낯선 두려움이라고 프로이트가 정의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영감을 얻은 초현실주의자들은 우연한 만남이 만들어내는 언캐니한 이미지들을 경이롭고 아름답게 여겼다. 논리적으로 상관없는 대상들의 낯선 만남과 병치는 표면 아래 잠들어 있던 미지의 것들을 드러나게 한다.

이명호, Tree 05, 2008 (Archival Inkjet Print) / 아트스페이스J 제공

이명호, Tree 05, 2008 (Archival Inkjet Print) / 아트스페이스J 제공

박화영, Spring and Sky, 2021 (Oil in Canvas) / 아트스페이스J 제공

박화영, Spring and Sky, 2021 (Oil in Canvas) / 아트스페이스J 제공

‘병치의 즐거움’을 주제로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짝짓는 전시가 3월29일까지 갤러리 아트스페이스J에서 열린다. 사진과 그림의 만남이다. 이미지의 소재에 따라 짝을 이룬다. 나무를 그린 박화영의 ‘Spring and Sky’와 이명호의 사진 ‘Tree 05’, 식탁 위의 오브제를 찍은 임안나의 ‘Romatic Soldiers #3’와 식탁 위의 정물을 접시에 그린 요나스 우드의 ‘Fruit Plate’, 그리고 달항아리를 찍은 구본창의 ‘Vessel’과 최영욱의 그림 ‘Karma’의 병치는 어떤 이미지가 사진이고 그림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며 매체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임안나, Romatic Soldiers #3, 2011 (Pigment Print) / 아트스페이스J 제공

임안나, Romatic Soldiers #3, 2011 (Pigment Print) / 아트스페이스J 제공

요나스 우드, Fruit Palte, 2020 (Ceramic) / 아트스페이스J 제공

요나스 우드, Fruit Palte, 2020 (Ceramic) / 아트스페이스J 제공

랄프 깁슨의 사진 ‘바스티안느의 눈’ 옆에는 알렉스 카츠의 ‘드가에게 바치는 오마주’가 걸려 있다. 후자는 화사한 색깔로 간결하고 단순하게 그려진 여인의 초상이다. 전자는 초현실적인 느낌이라 설명을 보기 전까지는 사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두 작품은 여러모로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면 모종의 공통분모가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랄프 깁슨의 사진과 알렉스 카츠의 그림 이미지는 모두 절단된 신체를 포착했다. 랄프 깁슨의 사진은 한 여인의 눈이라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낯선 앵글과 극단적인 접근으로 어딘지 모르게 뒤틀리고 어긋난 주술사의 환영처럼 보인다.

알렉스 카츠의 그림도 많은 부분이 크로핑된 이미지다. 작품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떨어져 나간 퍼즐의 조각을 맞출 수 없다. ‘드가에게 바치는 오마주’라는 제목에 등장하는 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는 발레리나를 즐겨 그렸다. 알렉스 카츠도 무용수를 즐겨 그렸다.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여인의 초상인 ‘드가에게 바치는 오마주’는 춤추는 무용가의 몸짓 중 얼굴 부분을 클로즈업한 장면인 것이다. 머리를 감싸는 무용수의 팔은 렌즈의 프레임 밖으로 잘려 나간 것처럼 사진 크로핑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단색의 배경은 그림의 주제를 선명하게 한다. 사진으로 치자면 스튜디오의 단색 배경지 같은 역할을 한다. 배경지의 색깔에 따라 피사체는 화면 안으로 수축하기도 하고 밖으로 팽창하기도 한다. 단색의 배경에 그려진 무표정한 얼굴들은 일본 에도시대의 퐁속화 우키요에를 떠오르게 한다. 서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한 우키요에는 목판화로 복제됐고 화폭에 담을 수 있는 얼굴의 형태는 가면처럼 단순화됐다. ‘드가에게 바치는 오마주’ 역시 판화 기법의 일종인 에칭으로 만들어진 그림이다.

알렉스 카츠의 가장 큰 매력은 어렵지 않은 그림을 그린다는 점이다. 미술사조나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삐딱하게 생각하면 실험정신이 없다고 그를 공격할 수도 있겠다. 소싯적의 그는 비평가들로부터 쓴소리를 들었다. 캔버스 위에 페인트를 뿌린 그림을 만든 잭슨 폴록 등 추상표현주의가 1960년대 미국 미술계를 풍미할 때였다. 알렉스 카츠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사물의 형태를 해체하지 않는 구상화를 그려 나갔다. 소재는 주변에 널렸다. 친구들인 뉴요커의 얼굴, 무용수와 연기자의 몸짓, 별장 앞에 핀 꽃, 그리고 그의 아내 에이다. 90세가 넘도록 그린 에이다의 초상은 250점이 넘는다.

알렉스 카츠, Homage to Degas-Contemporary Portrait Lime Green, 2020 (Archival pigment inks on Innova Etching Cotton Rag) / 아트스페이스J 제공

알렉스 카츠, Homage to Degas-Contemporary Portrait Lime Green, 2020 (Archival pigment inks on Innova Etching Cotton Rag) / 아트스페이스J 제공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에이다를 여전히 아름답게 그리는 알렉스 카츠의 모습을 상상하는 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병치시켜 본다.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 연인은 그의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당신만을 사랑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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