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찬 문화부장
연극 <햄릿>에서 ‘무덤파기’로 출연하는 배우 권성덕.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햄릿>에서 ‘무덤파기’로 출연하는 배우 권성덕. 신시컴퍼니 제공

“이제 산 자는 잠에 들고” “죽은 자 눈 뜨는 때” “깊은 물로부터, 타는 불로부터” “젖은 대지로부터, 탁한 대기 속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온다. 어릿어릿 희뜩희뜩!”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인 <햄릿> 도입부에서 유랑극단 배우 1~4가 말하는 대사다.

이 연극이 인상적이어서 셰익스피어의 원작 희곡 첫 페이지를 넘긴다면 허탕이다. <햄릿>은 이렇게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출가 이해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2016년 처음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의 극본은 현재 한국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극작가로 꼽히는 배삼식이 썼다. 유랑극단 배우 역은 박정자·손숙·윤석화·손봉숙 등 베테랑 배우가 연기했다. 네 배우 연기 경력을 합치면 210년이다. 권성덕·전무송·정동환·김성녀 등 원로 배우들도 단역으로 힘을 보탰다. 16세기 영국 극작가가 창조한 캐릭터와 줄거리를 차용하되,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연극을 지탱해온 배우들과 탁월한 연출·극작가가 새로운 햄릿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햄릿은 여전히 ‘영국산’인가.

따져보면 현대의 연극 무대에 오르는 많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오이디푸스, 메데이아 같은 비극은 고대 그리스산이지만, 현대의 서울, 프라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각 문화권의 색깔로 바뀌어 공연된다. 현대의 고전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분쟁지역에서는 평화를, 분주한 대도시에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으로 해석되고 공연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70년 전 사뮈엘 베케트가 펴냈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고도라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갈구한다.

뮤지컬제작사 오디컴퍼니의 신춘수 대표는 같은 맥락에서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과 창작 뮤지컬의 경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는 “관객은 뮤지컬이 한국에서 만들어졌는지, 외국에서 왔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작품의 만족도를 따진다”고 말했다. 한국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해 한국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면, 그 작품의 원작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지난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는 한국영화 2편이 경쟁 부문에서 수상했다.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이 감독상을, <브로커>의 배우 송강호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들은 ‘한국영화’로 분류됐지만, 제작진은 한국인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의 주연 여우는 중국인 탕웨이다. 애초 박 감독과 정서경 작가는 탕웨이 캐스팅을 염두에 두고 한국에서 일하는 중국인 간병인 캐릭터를 구상했다. 용의자 서래(탕웨이)와 형사 해준(박해일)은 서로를 관찰하는 와중에 조금씩 사랑을 느낀다. 이들의 절실하면서도 기묘한 의심과 사랑은 서래가 사극으로 배운 문어체 한국어, 중국어를 번역한 한국어에서 촉발된다. 번역기를 거치며 ‘심장’으로 오역된 ‘마음’, ‘무너지고 깨어짐’이라고 뜻풀이되는 ‘붕괴’ 등의 어휘가 <헤어질 결심>의 키워드가 된다. 두 문화와 언어의 뉘앙스 차이가 영화의 결을 풍성하게 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 왼쪽)와 해준(박해일). | CJ ENM 제공

영화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 왼쪽)와 해준(박해일). | CJ ENM 제공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함께 일하고 싶은 배우로 틈날 때마다 ‘송강호’를 언급했다. <브로커>는 고레에다의 바람이 현실화한 영화다. 고레에다가 쓴 일본어 대본을 한국어로 번역해 배우들이 연기했다. 배두나는 일어 대본을 구해 읽었고, 이지은(아이유)은 한국식 욕을 더했다. 감독의 일본 감성과 영화 속 한국 배경이 어딘지 삐걱거린다는 평도 있지만, 이는 두 문화가 섞일 때 나타나는 새로운 감성의 사례이기도 하다.

몹시도 폐쇄적인 나라에 사람은 드나들기 힘들지 몰라도 영화, 드라마, 노래, 옷은 흘러든다. 멋지고 좋은 외래 문화가 있다면 그것을 동경하고 모방하다가 고유의 감성이 배합된 전혀 새로운 문화로 나타난 사례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흔하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한국 아이돌 그룹은 영미식 팝음악·일본식 아이돌 문화의 계승이자 변이다. 박찬욱·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한국뿐 아니라 유럽, 미국, 일본의 숱한 거장들 이름을 언급한다.

문화는 섞일수록 아름답다. ‘순수 혈통’을 가진 문화처럼 절멸에 취약한 것도 없다. ‘문화의 국적’을 따지는 것처럼 무용한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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