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트’의 겸손과 자긍심

백승찬 문화부장
[백승찬의 우회도로] ‘헌트’의 겸손과 자긍심

10일 개봉해 300만 관객을 넘기며 선전 중인 <헌트>(사진)는 1983년을 배경으로 한다. <헌트>는 당시 독재 정권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던 안기부의 해외팀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팀 김정도(정우성)의 대결을 다룬다. 조직 내 북한 스파이 ‘동림’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둘이 서로를 의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백승찬 문화부장

백승찬 문화부장

<헌트>에는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상상이 뒤섞여 있다. 안기부 요원, 북한 간첩, 민주화운동하는 대학생 등이 등장하지만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없다. 실제 인물이 아니면서도 모두 당대 시민들이 할 법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안기부 요원들은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면서도 조직 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에도 열심이다. 전 안기부장은 직원들을 닦달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고 착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딴주머니를 차고 착복하는 인물이다. 새 안기부장은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직원들의 충성심과 직무능력을 은근히 시험한다. 운동권 대학생들은 성숙하고 현명한 운동가라기보다는, 취중에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두고 말다툼하다가 술집 기물을 파손해 깨진 유리를 풀죽은 모습으로 정리하는 순진한 청년들로 그려진다.

무엇보다 <헌트>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실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이정재 감독의 태도였다. 북한 공군 장교가 미그기를 몰고 귀순하는 대목은 <헌트> 중반부의 주요 변곡점이다. 실제 사건인 이웅평 대위의 귀순을 모티브로 했다. 이웅평이 북한 해변에 흘러온 남한 라면 봉지를 보고 귀순을 결심했다는 것은 당시 신문에도 보도된 내용이지만, 이웅평이 제공한 암호 체계로 남한 내 북한 간첩을 색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상이다. 미얀마에서 벌어진 아웅산 테러 역시 실제 사건이지만, 장소는 태국으로 바꿨다. 테러 직후 테러리스트와 총격전이 벌어지는 대목 역시 영화적 각색이다. 사실과 상상이 이처럼 경계 없이 뒤섞였는데, 어색하거나 영화 완성도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먼 조선시대 사건을 다룰 때도 종종 ‘역사 왜곡’ 논란이 일어 창작자들이 난처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헌트>는 40년 전 이야기면서도 별 논란이 없다.

국회에서 당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 3일 뒤인 2016년 12월12일 투자·배급이 발표된 <1987>에는 박종철·이한열·김정남 등 민주화 관련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검사, 기자, 고문경찰 등의 행적 묘사도 실제와 거의 유사하다. 박근혜 탄핵으로 1987년 민주화 세력의 직계라 할 만한 이들이 정권을 잡은 직후 개봉한 이 영화는 민주화에 헌신한 이들에 대한 찬사와 민주주의 서사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개봉 당시 문재인 대통령도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조국 민정수석 등과 함께 <1987>을 관람했다. 문 전 대통령이 “영화 보는 내내 울면서 아주 뭉클한 마음으로 봤다”는 감상 소감을 남긴 것도 무리는 아니다. 1987년 한국의 민주화는 세계 민주주의 교과서에 실릴 만한 자랑스러운 역사였기에, 자연스러운 정조이기도 했다.

현대사를 다루는 각본가·감독으로서의 이정재의 태도는 영화 <1987>과는 다르다. 이정재는 유튜브 ‘이동진 파이아키아’에 출연해 “재연하기 싫었지만 에둘러 비켜가기도 싫었다”는 말로 역사에 대한 태도를 밝혔다. 역사적 사실에서 소재를 가져오되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볼 수 있도록 “레이어(역사적 배경)를 두껍게 만들지 않고 최대한 얇게 만드는 작업을 했다”고도 말했다. <1987>은 민주화 역사, <헌트>는 정보기관 내 스파이 색출전으로 각기 다른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도 요인이 있겠지만, <헌트>는 <1987>보다 한층 역사로부터 자유롭다. 그렇다고 역사를 모르거나 무시하지도 않는다. 한 시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세밀히 살피되 창작자로서 그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했다.

이정재가 직접 연기한 박평호의 운명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이룰 수 없는 것까지 이루고 싶어서 과도한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은가. 다음 세대에 맡겨두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정재는 할 일을 최대한 하되, 하지 못할 일은 흔쾌히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역사를 존중하되 빚을 느끼지는 않는다. 겸손과 자긍심의 적절한 배합은 데뷔 이래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정상을 지킨 스타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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