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 생각하며, 자유롭게 살아요” 온 세상 엄마들에게 하고픈 말이다

김공숙 국립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교수·대중문화평론가

넷플릭스 영화 ‘정이’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설 연휴 시즌에 맞추어 신작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 가장 화제를 모은 것은 넷플릭스 영화 <정이>다. 강수연의 유작이자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 작품이다.

영화 ‘정이’에서 ‘전투 AI’로 개발되는 역할을 맡은 김현주 배우.  넷플릭스 제공

영화 ‘정이’에서 ‘전투 AI’로 개발되는 역할을 맡은 김현주 배우. 넷플릭스 제공

<정이>는 가까운 미래, 급격한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의 전설적 용병이었던 ‘정이’(김현주)의 뇌를 복제해 최고의 전투 AI ‘정이’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이는 30여년 전 어린 딸 서현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마지막 전투에 나갔다가 식물인간이 되었고, 그 딸은 세월이 흘러 전투로봇 ‘정이’ 프로젝트의 팀장이 되었다.

연상호 감독은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으로도 유명하다. <정이>는 그가 처음으로 도전한 SF 영화인데, 나오자마자 넷플릭스 세계 영화 부문 1위에 올라 나흘째 글로벌 1위를 지키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영화 중 1위는 <승리호>(2021) 이후 <정이>가 처음이다. 그런데 넷플릭스가 판권만을 사서 재미를 본 <승리호>와 달리 <정이>는 기획부터 제작까지 넷플릭스가 모두 관여했다.

<정이>의 글로벌 1위 달성에는 그간 독창적인 이야기 세계를 펼쳐온 연상호의 작품이라는 화제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 대만, 태국, 홍콩, 브라질, 콜롬비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세계의 시청자들이 <정이>를 <승리호>를 잇는 새로운 한국형 SF 영화로 호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정이>는 글로벌 1위를 차지했음에도 반응이 엇갈린다. 미국 영화정보 사이트 IMDB의 이용자가 매긴 <정이>의 평점은 5.4점(10점 만점)에 그쳤다. 국내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를테면 기존의 수많은 유명 SF 영화들의 설정을 답습하면서도 이를 어설프게 짜깁기하고 있어 새로움이 없다, 거창한 우주 전쟁 서사시인 듯 시작하지만 정작 연구소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소하고 빤한 모녀의 가족 신파에 불과하다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연상호 감독의 SF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것 같다.

연상호 감독의 첫 SF 도전작이며
강수연 배우의 유작인 영화 ‘정이’
호불호가 엇갈린 평가 속에서도
공개되자마자 넷플릭스 글로벌 1위

한국적인 멜로와 SF 서사의 결합
한국인에겐 진부한 ‘신파’이지만
외국인에게는 새로운 장르일 수도

강수연 배우가 유작이된 영화 ‘정이’ 촬영 현장에서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강수연 배우가 유작이된 영화 ‘정이’ 촬영 현장에서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연상호의 이야기 세계는 흔히 연니버스(연상호 유니버스)로 불릴 만큼 관심의 대상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감독은 과연 연니버스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몰랐을까. <정이>가 이런 비판을 받을 것을 예측하지 못하고 모성애 신파를 만든 것일까.

답은 금방 찾아졌다. 메이킹 영상에서 고 강수연은 “가장 한국적인 SF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연상호 감독의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정이>는 감독의 의도가 실현된 영화다. 감독은 <정이>를 기획할 때부터 ‘고전적인 한국의 멜로’와 SF를 결합하고 싶어 했다. SF 장르로 AI 소재를 채택했지만 영화 전반에 깔린 정서는 인간성과 모성애 등 매우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한국적 공감의 메시지를 담아내려 했다.

‘AI 전투용병 정이, 인간으로부터 탈출하라!’ <정이> 포스터에 제시된 메시지다. 감독은 “전투 영웅이라는 아이콘으로서의 인물의 해방기를 생각했고, 그 인물의 해방을 하는 주체가 딸이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해 SF 영화로서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고 한다.

<정이>는 SF 장르의 온갖 클리셰를 가져오지만 그것을 SF물이라면 익히 아는 전제라고 치고, 대신 많은 SF적 설정을 인물 간 갈등 관계를 부각하는 배경으로 활용한다.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에서 “기후변화로 지구가 폐허가 되자 탈출한 인간들이 우주에 만든 새로운 터전 ‘쉘터’에서 수십 년째 내전을 벌이는 상태”라는 거창한 자막이 제시되지만, 정작 내전의 실체는 등장하지 않는 식이다. <정이>는 로봇 액션 SF 장르가 구현해온 종합엔터테인먼트적인 화려한 볼거리보다 엄마와 딸의 감정에 집중한다.

<정이>의 감정을 이끄는 주인공은 강수연이 연기한 딸 서현이다. 서현은 엄마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 정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려 하지만 무산되자, 전쟁의 아이콘이라는 틀에 갇혀 맘대로 죽을 수도 없는 엄마(사실은 AI 정이)를 해방시켜주려 한다. 즉 <정이>는 SF 영화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엄마와 딸의 사적인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여기서 멜로는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인물 간의 감정 과잉이 강조된 용어다. 영화의 애초 기획과 의도가 이렇다 보니 지구 구출, 전쟁 종식 같은 거창한 SF 서사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정이>는 무늬만 SF, 실상은 사소한 가족 신파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신파는 흔히 한국적 멜로드라마를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가족 신파, 가족 클리셰’라는 비판은 영화 <승리호>에도 동일하게 가해졌던 비판이다. 연상호 또한 자신의 천만 관객 영화 <부산행>에서 배우 공유의 부성애를 강조했고, <반도>에서는 엄마 이정현의 가족애를 부각했다. 극중 이정현의 딸은 “우리 가족이 같이 있었는데 왜 지옥이에요?”라고 묻는다. 생각해보면 엄청난 찬사와 호평을 받은 우주 SF <인터스텔라>도 아버지와 딸의 서사로 귀결되었다. 물론 아직도 <인터스텔라>의 SF 세계는 이해가 어렵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한국형 SF <정이>는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다. 심지어 정이 로봇의 감정 상태를 뇌 지도의 빨강, ‘노랑’으로, ‘미확인영역’(아마도 모성애)이라는 선명한 폰트의 텍스트로까지 표시해 보여준다.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친절한 SF 감성 멜로 <정이>의 강점이다.

영화 ‘정이’ 촬영 현장의 연상호 감독.  넷플릭스 제공

영화 ‘정이’ 촬영 현장의 연상호 감독. 넷플릭스 제공

가족 이야기라는 맥락에서 연상호 감독은 말한다. <정이>는 “실존하는 지옥에 갇혀버린 엄마와 나이 먹은 딸이 여전히 그 순간에 머문 관계가 ‘멜로’라 통칭되는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 저한테도 한국인이 나오는 SF 영화가 낯선데, 시청자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보편적이면서도 곱씹을 수 있는 주제가 필요했다”고.

보편성에 몰두한 결과 <정이>는 SF가 흔히 다루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나 AI와 인간의 대립보다 엄마와 딸의 긴밀한 관계에 집중하는 신파가 되었다. 이런 <정이>가 글로벌 1위다. SF적 클리셰들을 주로 배경으로만 활용해 그동안 봐온 SF와는 거리가 있고, 이야기도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한국적 모성애 서사인데 이런 작품에 왜 세계인이 반응할까.

<정이>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인간 시절 마지막 전투에서 기억이 멈춘 엄마 정이는 자신이 AI 로봇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수술대에 오른 어린 딸 서현을 걱정하며 전투를 반복한다. <정이>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정이 뇌의 모성애 활성화 영역을 딸 서현이 삭제시켜 버리는 장면이다. 모성애는 정이의 마지막 전투에서 정이를 실패하게 한 결정적 요소였다. 그것이 결국 정이를 전쟁 영웅화하여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존재로 만든 근본 요인이었음을 인식한 딸이 엄마의 모성애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로봇의 얼굴을 한 정이를 향해 서현은 빨리 도망치라며,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요. 자유롭게 살아요”라고 말한다. AI 정이는 서현에게 마치 과거의 엄마였던 때처럼 부비부비를 한 후 떠난다. 그러나 AI가 반응하는 것은 이제 엄마의 사랑이 아닌 인간애다. 이쯤 오면 <정이>는 엄마와 딸의 서사를 넘어 존재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연상호 감독은 “엄마의 모성을 제거하려고 하는 자식의 입장은 모성이라는 것이 엄마를 실존하는 지옥에 갇히게 하는 거라고 여긴 것이다. 그걸 효심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한 존재를 익히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슬프다는 감정 외에 여러 결을 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했다.

[김공숙의 드라마티즘]“자신만 생각하며, 자유롭게 살아요” 온 세상 엄마들에게 하고픈 말이다

넷플릭스는 글로벌 시청자에 대한 엄청난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정이>는 넷플릭스가 기획과 제작을 지원한 첫 번째 SF 한국 영화라는 점에서 넷플릭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정이>가 서현의 시한부 설정 등의 과도한 신파, 결말이 예측되는 전개 등 이야기의 허술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럼에도 글로벌 지향의 한국 SF 영화가 <승리호>에 이어 <정이>까지 이런 서사를 풀어내는 이유, 감독들의 선택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해외 시청자에게 한국적 멜로와 SF의 결합은, 어쩌면 진부함보다 새로움이 아니었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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