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인 세밑을 지나며 지난 한 해를 가만히 돌아본다. 유독 버겁고 힘겨웠던 한 해였음을 신춘문예 시 응모작들을 읽으면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와 포스트휴먼의 감각을 드러내는 시는 작년에 이어 여전히 강세를 보였지만 눈에 띄는 새로운 경향으로는 삶의 고단함을 드러내는 시들이 많아졌음을 언급해야겠다. 전세사기나 택배 노동, 청년 문제 등을 다룬 시의 출현은 현실의 고단함이 여전히 시의 동력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이 출구 없는 막막한 일상을 견디는 데 작은 버팀목이나마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모작들을 읽었다.
응모작들 중 눈에 띄는 네 명의 작품을 두고 오랜 토론이 이어졌다. 논의의 장에 올라온 시들은 ‘해파리와 사랑’ 외 4편, ‘수목’ 외 4편, ‘서빈백사’ 외 4편, ‘여기 있다’ 외 4편이었다. 각자의 시적 개성이 뚜렷하고 장점이 분명한 시들이었다. 머지않아 이분들의 시를 지면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해파리와 사랑’ 외 4편은 목소리의 색깔과 태도가 분명한 점이 매력적이었다. 개성적인 목소리라는 점에서 매혹적인 면이 있었으나 응모작들의 결이 유사한 점은 다소 아쉬웠다. ‘수목’ 외 4편은 마지막까지 거론된 응모작들 중 젊은 감각으로 현실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띄었다. 상실의 경험과 애도의 감각을 그린 ‘수목’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보여준 ‘도시의 두 블록을 태연히 돌아 나왔다’ 두 편 모두 인상 깊었다. ‘서빈백사’는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시였다. 마지막 선택의 순간까지 고심을 거듭했다. 긴장을 느슨하게 만드는 마지막 두 연이 없었다면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응모작들 간에 편차가 있는 점도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세 분의 시는 당장 지면에 발표되어도 손색이 없는 좋은 시들이었다. 실망하지 말고 정진해서 조만간 지면에서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선작으로 최종 선택된 ‘여기 있다’는 투명인간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생활의 감각으로 어떻게 변용해 시적인 순간을 발명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사라짐을 노래한 시는 많았지만, 당선작은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던 “나는 투명인간”이라는 선언을 통해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고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음을 담담히 보여주었다. 이 시의 고요한 단단함을 심사위원들은 믿어보기로 했다.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처럼 시도 그렇게 “여기에 있”음을 믿어보고 싶게 하는 시였다.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 중 ‘물사람’과 ‘일요일’도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응모작들이 고른 완성도를 지니고 있어서 오래 시를 써온 사람의 내공이 느껴졌다. 새로운 시인의 출발을 함께 기뻐하며, 시를 읽고 쓰는 고통의 시간에 차오르는 즐거움을 전해준 응모자들에게도 지지와 응원의 마음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