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자리로부터-천선란론

정우주
그림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그림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1. 멸종과 박탈 사이

“인간이 망친 세상에서 살면서 인간을 믿는다는 게”(<랑과 나의 사막>, 70쪽) 가능할까.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1)라는 어느 철학자의 물음을 떠올려본다. 지구의 한쪽에서는 이상 기후와 플라스틱 쓰레기들로 인해 생명들이 죽어가고, 또 그 반대편 도심의 거리에서는 구멍 난 안전망으로 단시간에 수백에 달하는 죽음들이 발생한다. 이 사건들은 얼핏 각기 다른 차원의 문제로 구분되는 듯 보이지만,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이 엉망으로 만든 세계의 끝에 다다랐다는 지점에서 서로 겹쳐진다. 일상적이다 못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를 빠르게 종결하고 복귀하라는 명령이 짝패처럼 엉겨 있는 이 세계에서, 과연 상실 이후의 삶은 어떻게 모색될 수 있을까.

2022년 10월 29일 벌어진 참사는 또 하나의 사건을 연상케 했다. 물론 이태원과 세월호 사이에는 손쉽게 등치될 수 없는 맥락들이 존재하지만, 참사 1주기를 막 지나온 시점에서 이를 되짚어보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국문학장에서 세월호 서사는 “살아남은 자의 ‘말할 수 없는’ 언어”2)로써 침묵의 잠재성을 발굴하는 방식으로 다뤄져온 한편, 재현 불가능성의 건너에서 사건에 대해 “충분히 의식하고 재현할 수 있는”3) 정교한 언어의 필요성이 요청되기도 했다. 이태원 참사에 이르러 아직 담론의 양상을 뚜렷이 명명할 수는 없다고 해도, 신자유주의 비판과 함께 “그 체제 속에서 숨 쉬고 살았던 개인 주체들”4)에 천착하는 상실 이후의 서사가 다시금 읽혀야 한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그리고 여기, 유독 상실의 장면들에서 떠나지 못하고 오래 머무르려는 작가가 있다. 천선란의 소설은 분명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과 우정을 그려내지만, 그 관계맺음이란 무해하고 낭만적인 공존보다는 오히려 선명한 슬픔과 고통을 향해 있다. 특히 사랑했던 대상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자들이 결코 상실 이전과 똑같아질 수 없음을 뼈아프게 자각하는 순간들은 곧 엉망이 되어버린 세계를 인간의 힘으로 재건하려는 목표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목소리와 포개어지며,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상상하도록 한다.

다만 최근의 한국문학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논의되는 방식은 이미 한 차례 변화를 겪은 듯하다. 탈인간중심적 전회가 인간의 위치성을 “지상으로 끌어내림으로써” 비인간과의 “긍정적인 연결”5)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 본 관점이 비교적 초기의 흐름이었다면, 이를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견해 또한 제출된 바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공생적 관계라는 당위”는 성급히 윤리성만을 확보하고자 하는 비평적 오독을 낳았으며, 현실에 그어진 “견고한 분할선”6)으로 인해 낙관적 연대가 어렵게 된다는 요지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오히려 그 ‘지난한’ 지점으로부터 공존이 모색될 수 있음을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많은 생물종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도, 정복하지도 않으면서 함께 살아가는, 교란에 기반한 생태”7)가 바로 천선란 소설 속 세계이다.

원자 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 지역에 처음 등장한 생물이 송이버섯이었으며, 산업화 시기 대규모 산림 벌채가 이루어진 민둥산에 소나무가 스스로 싹을 틔웠다. 이토록 불안정한 세계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할 때, ‘그릇된 삶에서 올바른 삶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8)에 대한 아도르노의 망설임은 이제 그 불확정성의 마주침에 기대어 대답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까 “0.01퍼센트는 불가능의 수치와 맞먹는 것일지라도 (…) 그 숫자는 ‘존재한다’”(<랑과 나의 사막>, 113쪽). 이로써 천선란은 인간이 망친 세상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그곳에 남은 자들이 삶을 어떻게 일으키는지를 그려낸다.

2. 죽음을 붙잡아두는 힘

천선란 소설 속 인물들은 곁의 누군가를 자꾸만 떠나보낸다. 근작 <이끼숲>9)에서 지상으로부터 쫓겨나 땅 밑에 지하도시를 건설해 살아가는 인간들은 대부분 죽음의 그림자에 노출되어 있다. 용역업체에 소속되어 경비 일을 하는 마르코와 은희는 매번 약속되지 않은 추가 업무를 하고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고, 연구원들과 달리 ‘막일’을 한다는 이유로 카트를 탈 수 없어 휴게시간을 쪼개 걸어서 먼 근무지를 오가야 한다. 차별적인 회사의 태도에 마르코의 선배 커커스는 동료들과 파업을 선언하는데, 이에 마르코와 같이 선택을 유보한 이들이 대타 출근과 초과 근무에 동원된다. 늘어난 업무량에 혹사당하면서도 이전보다 훨씬 늘어난 벌이와 여유로워진 삶에 만족을 느끼던 마르코는 어느 순간 커커스를 마주치고, “자신이 커커스의 숨을 빼앗아 쉬고 있다”(74쪽)는 사실을 목도한다.

이때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기 삶이 유지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마르코조차도, 계약한 월급보다는 많지만 근무 시간에는 훨씬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꼬박꼬박 일을 나가는 마르코도, 반년 넘게 파업을 이어가던 커커스도, 돈이 필요해 아바타에게 목소리를 팔아버린 은희도 전부 ‘살 만한 삶(livable life)’을 위해 노동하지만, 오히려 일을 계속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진다.10)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삶을 위해 삶을 버리는”(230쪽) 모순에 처해 있다.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커커스는 끝내 복귀하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은희는 언젠가 스스로 예견했던 것처럼 “죽음의 잔해”(50쪽)인 ‘바다눈’이 되어 흩어져 내린다. 결국 떠난 이들을 앞으로 영영 보지 못하리라 직감하는 마르코는 “닫힌 세계”(87쪽)에 홀로 남아 끝없는 상실을 겪는다.

이렇듯 <이끼숲>의 세계는 누군가를 살게 만들고 ‘죽도록 내버려두는’ 상태에서 한발 더 나아가, 특정 인구의 목숨을 담보 삼아 적극적으로 생명을 빼앗는 죽음정치적 방식으로 작동된다. 노동의 “쳇바퀴를 멈출 수 있는 수단은 죽음뿐”(230쪽)이라는 지하도시 위원장의 말은 “우린 산 채로 묻힌 거”(83쪽)라는 은희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상기시킨다. 즉 언제든 자신의 삶이 폐기되어버릴 수 있음을 일상적으로 감각하는 지하도시의 인물들은 살아 있지만 마치 죽은 시체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한편 마르코가 지키는 연구소 문 너머에서는 인간을 복제한 클론들이 제작된다. 지하도시에서 클론은 일종의 보험 개념으로, 일을 하다 사고가 발생하면 잘려 나간 신체를 클론에서 가져다 이식한다는 점에서 생명 그 자체를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죽음정치의 대표적 상징인 셈이다. 이때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유오의 손가락과 다리는 마치 쓰고 버릴 수 있는 일회용품과 같이 언제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클론이 죽음 앞에서는 무용하다”(160쪽)는 사실은 존재의 대체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지반이 붕괴되어 흙더미에 깔려버린 유오의 죽음 이후, 소마는 유오와의 기억에 머무르며 방 안으로 틀어박힌다. 다만 끊임없이 맞물리는 노동력의 톱니바퀴로 지탱되는 지하도시에서, 게으름이나 무기력함은 허락되지 않는다. 고작 며칠간 일을 나가지 않은 소마 앞에 당도한 것은 즉시 돌아오지 않으면 정신재활원으로 끌려가야 한다는 소식이다.

“다 유별나게 억울하고 슬프면 도대체 일은 누가 해? 언제 일을 하느냐고!”(231쪽)

오래 슬퍼하는 일은 나태함의 상징이 되어버리고, 그만 슬픔에서 빠져나와 신속히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분위기가 당연시된다. 이 지점에서 ‘VAX2’를 섭취하지 않은 디에고에게 나타난 증상이 바로 ‘울분’과 ‘분노’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지하도시의 모든 이들은 우울증이나 정신분열 등의 질환을 막기 위해 매일 한 알씩 ‘VAX2’를 먹도록 요구된다. 하지만 질환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정확히 목격한 바 없이 그저 괴담으로만 퍼져 있으며, 특히 복용을 중단한 사실이 알려지면 정신재활원에 보내진다는 서술들은 이것이 어떤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통치 수단이라는 점을 가늠케 한다. 이제 ‘언제까지 슬퍼하고만 있을 거냐’는 물음이 ‘그것에 대해 오래 생각하지 말라’는 명령이 되어 돌아온다. 그 사이,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세계의 질서는 매끄럽게 은폐된다.

이처럼 죽음의 작업을 수행하는 권력은 삶을 관리하는 영역 아래 어둠의 공간에서 은밀하게 움직인다. 그렇다면 먼저 간 이의 죽음을 끝맺지 않고 여전히 “분하고 억울”(232쪽)한 것으로 놓아두려는 안간힘은 곧 죽음을 만들어낸 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려는 천선란식의 애도로 읽어 마땅하다.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저 멀리서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제발 나 좀 잊고 살았으면 좋겠어. 아무렇지 않게.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생각을, 그 애가 말한다.

나를 잊고 마냥 행복할 수는 없어?

그럴 방법은 없다. 드문드문 행복은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잊을 수 없고. 잊을 수 없다면 마냥 행복할 수 없다. 내가 행복할 방법은 딱 하나다. 애초에 그 애가 죽지 않는 것.(238쪽)

프로이트는 사랑했던 대상에 대한 리비도를 철회하고 새로운 대상을 향해 바꾸어내는 것이 성공적인 애도라고 설명했다. 대상의 완전한 대체 가능성을 전제하는 이러한 관점이 잘 ‘잊는’ 행위를 가리킨다면, 유오를 잊고 행복할 방법은 애초에 ‘없다’는 소마의 말은 상실로 인해 세계의 균열을 알아버린 주체가 다시 “닫힌 세계”(87쪽)로 돌아갈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편안한 상태에서 지냈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니?”(235쪽)라는 물음에 되레 “슬픔이 유별나도 되는 곳으로 가고 싶다”(233쪽)고 대답하는 천선란의 소설은 존재를 무엇과도 대체하지 않은 채 상실의 자리에 남아 있기를 자처하며, 오래 슬퍼하고 오래 기억하려 애쓴다. 이로써 남겨졌던 소마는 “평생 떼어놓을 수 없”을 “끈적끈적한 덩어리”(201쪽)로서의 유오를 감각하며, 지하도시의 ‘바깥’으로 나가기를 선택한다.

지하도시를 벗어나면 바로 죽게 될 것이라던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유오의 클론을 등에 업은 채 지상으로 발을 내디딘 소마는 “세상의 끝”(242쪽)이라 여겨지는 거대한 벽까지 죽지 않고 살아서 걸어간다. 그 앞에 이르러 벽이 사실은 아주 높은 나무였음을 알게 되고, 숲속으로 들어간 소마의 손등에 문득 푸릇푸릇한 이끼가 돋아나는 결말은 상실로 인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던 바로 그 순간에 폐허로부터 무언가 쑥 자라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한다. 설령 유별난 슬픔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223쪽)을지라도, “바위틈에도 살고, 보도블록 사이에도 살고 멸망한 도시에서도 살 수 있”(247쪽)는 이끼는 피어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엉망으로 만든 이 세계에 아직 무언가 살아 있다”.11)

3. 교란의 리듬과 우연적 파랑(波浪)

“세상에 모든 것들에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

“틀렸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세상에는 원래 이유가 없었어. 인간들이 이유를 가져다 붙인 거지. 그러니까 순서를 따지자면 이유 없이 생겨난 게 먼저야.”

“하지만 저는 틀릴 수가 없는데….”

“누구라도 틀려. 원래 살아가는 건 틀림의 연속이야.”(312~313쪽)

인간에 의해 황폐화된 산업비림에서 불현듯 올라오는 송이버섯은 그간 우리의 것이라 굳게 믿어왔던 통제된 세계가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세계는 규정하기 힘든 불확정성과 불안정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때때로 삶을 “오류의 우연성”12)에 빠뜨린다. 아니 오히려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시대에서, 예측 불가능한 유동성은 예외적이라기보다 ‘언제나 그러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로써 무참히 파괴된 풍경을 들여다보는 일은 곧 통제할 수 없이 뒤얽히는 교란적 공존을 마주치는 일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다면, <천 개의 파랑>13)은 몸이 산산이 부서지게 될 최후의 순간, 상실의 한복판에서 시작되는 소설이다. “폐기를 앞둔 기수” 콜리와 “안락사가 확정된 경주마”(10쪽) 투데이는 처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의 만남은 “치명적인 실수와 기회”(9쪽)로 맺어진다.

콜리는 기수 휴머노이드로 계획되었지만, 학습 휴머노이드용 칩이 잘못 삽입되는 “말도 안 되는 사고”(11쪽)가 일어나 인지 능력을 갖춘 존재로 만들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 있지 않은데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230쪽)하는 콜리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다름 아닌 ‘이상하다’이다. 다 망가진 휴머노이드를 왜 사왔느냐는 질문에 “…그냥 이상해서요”(242쪽)라고 답하는 연재의 말은 정해진 목적과는 무관하게 얽혀 들어가는 우연적 관계의 사슬들을 내재한다. 한편 관절이 망가져버린 투데이의 사형일이 이틀 후로 결정되자, 연재와 은혜, 콜리는 2주 후에 있을 경기 출전권을 따내 남은 삶을 늘리고자 한다.

“당연하지. 살아간다는 건 늘 그런 기회를 맞닥뜨리는 거잖아. 살아 있어야 무언가를 바꿀 수 있기라도 하지.”(261쪽)

“연재는 실수가 기회와 같은 말이래요.”(286쪽)

투데이로 하여금 한 번 더 경주를 하도록 만들어 그 짧은 삶을 연장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죽는다는 건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사실상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산림 관리에 실패해 방치된 땅에서 뜻밖에 송이버섯이 나타나듯, ‘실수’는 무언가 생겨날 ‘기회’가 되기도 한다. 연재 ‘일당’은 관리자에게 출전 승인을 받아내고, 끝내 투데이를 주로에 세우는 데 성공한다. 이 여정은 콜리를 신고하지 않고 연재에게 넘겨준 마사 관리인 민주와 아이들의 경마장 출입을 눈감아준 보안관 다영, 그리고 투데이를 성의껏 돌봐준 수의사 복희 등 여러 인물들의 합작이라 할 만하다. 이렇듯 천선란이 그려내는 연대는 실로 찬란하고 아름답지만, 마냥 “예쁜 광경은 아니다.”14)

속도에 대한 인간의 선망은 몇천 년 동안이나 경마를 유지시켰고, 우수한 말끼리 교배해 점점 더 빠른 말을 탄생시켰다.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말은 인간이 필요로 하지 않기에 더 어리고 빠른 말에게 마방을 비워줘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민주는 그 최후를 목격할 때마다 씁쓸한 기분을 느끼지만, 돈이 되지 않는 말들을 불쌍하다는 이유로 계속 데리고 있으면 경마장 운영에 손해가 가고, 그렇게 되면 민주의 일자리부터 위협받는다. 즉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서로의 목을 감”(218쪽)은 채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여야 하는’ 시스템 위에 촘촘히 얽혀 있다.

더욱이 투데이를 출전시키는 데 있어 베팅금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은 유의미하다. 최소 한 명 이상의 베팅자가 있어야만 경주마가 주로에 설 수 있다는 규칙 때문에, 연재는 자신이 일하던 편의점 점장을 찾아가 투데이에게 돈을 걸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이는 교란적인 송이버섯 상품사슬을 연상케 한다. 송이버섯의 생산에서부터 무역, 판매, 소비에 이르기까지 걸쳐진 모든 참여자들은 ‘자유로운’ 선물의 관계로 함께 묶여 있지만15) 수입되기 직전, 송이버섯은 대규모 구매업자의 창고로 보내져 성숙도와 크기에 따라 분류되는 시간을 거친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송이버섯을 둘러싼 ‘자유’의 흔적은 지워지고 오직 재고품의 일부로써 온전히 자본주의적인 상품만이 남는다.

그러나 바로 그 ‘소외’된 시간이 이윤 산출을 가능하게 하기에, 전체 사슬 또한 가치 있게 유지되고 접합될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체제는 비자본주의적 방식과 공존하며 마치 퍼즐 조각들처럼 연결되어 있다. 선물에서 상품으로, 또 그 반대로 반전을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상품에서 선물이 만들어지는가”16)를 탐구하는 칭의 사유는 이제 천선란 소설을 읽어내는 새로운 렌즈가 된다. 연재와 은혜, 콜리의 목적은 오로지 투데이의 삶을 조금이나마 계속하는 것 자체에 있었지만, 결국 먼 훗날 투데이는 초원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얽힘을 풀어버리는 교란적 리듬이 선명하게 어른거리고 있다.

이렇듯 천선란 소설의 미학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생(共生)을 이야기하면서도 인간의 행위성을 소거시키지 않은 채, 오히려 자본주의의 절정에서 그것을 바로 봄으로써 살아감의 방법을 모색한다는 데 있다. 이는 모든 것을 객체로 일원화해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평평한 물질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관점17)과는 구별된다. 더 이상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자연이란 없다고 했을 때, 인간의 행위력을 축소시키는 것은 도리어 비인간에 대한 방임에 가깝기 때문이다.18) “이미 이 행성은 인간 중심의 행성이 됐”기에 평생을 마방에만 갇혀 산 말들의 “안락사를 무턱대고 반대하는 건 결국 그 아이들에게 알아서 죽으라는 말밖에 되지 않”(156쪽)으며, “그것 역시도 착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심”(157쪽)이라는 천선란의 목소리는 그래서 귀하다. 경마장의 말들을 모두 세상 밖으로 풀어주자는 결말이 아니라, 연재와 은혜, 콜리와 투데이가 함께 엮여 다시 한번 경마를 해내는 장면을 그려낸 이유이기도 하다. ‘너를 살리는 방식으로 내가 사는’ 윤리의 출현이 빛난다.

4. 애도라는 존재 방식

사랑했던 대상의 상실 이후 남겨진 자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까. 앞서 폭탄 맞은 지상 원점(ground zero)에서도 기꺼이 나타나는 송이버섯을 통해 불확실한 교란도 어떤 삶을 가능케 한다는 생존의 방식을 펼쳐냈다면, 거꾸로 누군가를 잃은 뒤 서로가 얼마나 긴밀히 엮여 복수(複數)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는가를 알아차리게 하는 소설이 <랑과 나의 사막>19)이다. 죽은 랑의 시체를 땅에 묻어주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인간인 랑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로봇 고고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태껏 세상의 전부라 여겼던 랑이 사라지자, 고고는 무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다. 그러나 망가질 때까지 분명한 목적을 다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로봇이기에, 고고는 랑이 보고 싶어 했던 ‘과거로 가는 땅’을 찾아 떠난다. 다만 “랑을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목적”(44쪽)을 가지고 오른 길이 거센 모래폭풍이 몰아쳐 지형이 변하고, 언제든 방향을 잃을 수 있는 ‘사막’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사막을 걸어가는 고고는 인간 버진과 카일, 로봇 알아이아이를 차례대로 마주친다. 폭풍으로 모래에 갇힌 버진을 붙잡아 끌어 올려주고, 그 짧은 만남의 끝에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74쪽)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객사해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카일의 시체를 발견하고 잘 묻어준 뒤 그를 위해 선인장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사고로 양쪽 팔을 잃은 알아이아이에게는 자신의 한쪽 팔을 옮겨 붙여준다. 합리적 목적과는 완전히 반대되어 보이는 고고의 이 모든 “오지랖”(74쪽)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이는 사막 한가운데 버려져 있던 고고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깨우고 살렸던 랑의 모습을 닮아 있다. 언젠가부터 고고는 기억장치가 멋대로 과거를 재생하는 오류를 겪는다. 다른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느닷없이 재생되는 랑의 영상은 고고를 바라보는 얼굴로, 또 고고를 부르는 목소리로 고고의 앞에 나타난다. 랑과의 기억은 끊임없이 고고의 여정에 개입하며, 그 삶을 예기치 못하게 만든다.

이때 “어찌할 수 없는 오류”(16쪽)가 가리키는 것은 다름 아닌 고고라는 존재 그 자체이다. 상실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20)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너’를 잃는 경험은 ‘나’로 하여금 ‘너’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발견하게 하며, 나아가서는 그로 인해 ‘나’ 역시도 잃게 되었음을 이해하도록 한다. 랑과 고고는 각각 여기와 저기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으므로, 랑의 부재는 고고의 삶을 뒤흔든다. 자신이 겪는 오류를 고쳐줄 인간이 있음에도 여전히 “오류를 유지하고 싶다”(16쪽)고 말하는 고고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러니까 ‘랑의 심장이 멈췄다’가 아니라 “랑의 엔진이 꺼졌다”(9쪽)는 문장으로 인간의 죽음을 알리는 이 소설은 “인간과 별로 다르지 않”(134쪽)은 비인간을 등장시켜 그 경계를 흩뜨릴 때조차, 비인간‘도’ 비로소 인간의 특성을 갖게 되었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천선란의 세계에서 인간과 비인간은 모두 고유한 무게를 가진 채 서로를 형성하고 조건 짓는, 근본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들일 뿐이다. 이로써 랑에게서 길어 올린 고고의 ‘오지랖’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관계의 징표가 된다.

“자네가 왜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게 많은 줄 아나?”

(…)

“인간도 아는 게 없어서야.”(64쪽)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건 결국 알 수 없다는 말과 같은 거 아니야? 알 수 없는 건 안다는 것과 달라, 그렇게 단정 지어서 말할 수 없는 거야. (…)”(130쪽)

결국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21) 이루어지는 것이 애도라면, 사막을 통과하고 있는 고고의 시간에도 ‘애도’라는 이름을 붙여봐도 좋을까. 오랫동안 사막에 매장되어 있다가 우연히 랑에게 발견되어 다시 전원이 켜진 고고는 옛 메모리를 재생할 수 없는 탓에 자신이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전쟁 시대에 제작되었다는 유일한 단서는 인간을 공격하는 살인 기계였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으로 다가오며, 고고를 두렵게 한다. 그러나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 “중요한 건 결과보다 행위”(103, 106쪽)라는 알아이아이의 말은 만들어진 목적보다 오히려 삶이 그것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함의를 갖는다. 관계는 온전한 주체를 와해시키고, ‘너’뿐만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무지(無知)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하여 고고의 삶은 랑의 죽음으로 인해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내맡겨진다.

‘그림에는 감정이 들어가고 사진에는 의도가 들어가지. 감정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고 의도는 해석하게 만들어. 마음을 움직인다는 건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는 것. (…) 그럼 역시 그림이 맞아. 사막은 아무 의도가 없어. 사막을 판단하는 건 사람의 감정이니까.’(19~20쪽)

바람이 불지 않는 사막은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던 랑의 말을 떠올려본다면, 랑의 죽은 몸을 “바람이 불지 않는 사막 같다”(19쪽)고 느끼는 고고의 마음은 자신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리라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애도의 실천이라 할 만하다. 비록 “헛된 희망”(144쪽)일지라도 끈적하게 달라붙은 “울음덩어리”(112쪽)를 감각하며 다시 랑을 만나러 가는 고고의 선택은 분명 실패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나 상실이 초래하는 변화는 결과를 계획할 수 없고, 애도는 바로 그 ‘알지 못함’에 기대어 유지되기에, 이 선택은 반대로 “최악의 결말에 도달하지 않”(107쪽)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로 가는 땅’에 이르기 직전, 고고는 외계인 살리에게 자신의 오류 원인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죽은 랑의 영상이 재생되는 오류가 마침내 살리의 입을 통해 “그리움”(136쪽)이라는 명명을 입고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 고고의 여정에 얽혀 있던 수많은 우연성들은 그 자체로 선택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끝없는’ 애도의 과정으로 자리한다. 이렇듯 인간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인간 로봇을 등장시킨 천선란은 세계의 무언가가 꼭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도 있음을 말하는 데까지 그 힘을 밀어붙인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인간이 망친 세상에서 살면서 인간을 믿는다는”(70쪽)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는 “여러 의미로 대단하지 않나?”라는 버진의 자조적인 물음처럼 그저 오만에 불과해 보이기도 한다. 다만 천선란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주체가 “굳이 인간일 필요는 없”(135쪽)다고 대답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물론, 꼭 인간이 ‘아닐’ 필요도 없다. 이로써 천선란식의 다종(多種)적 세계는 바로 그 ‘인간’의 자리에 랑을, 고고를, 알아이아이를, 살리를 채워 넣으며, 사막으로 뒤덮여버린 땅에서도 어떤 삶이 여전히 자라날 수 있음을 펼쳐 보인다.

각주>>

1) 주디스 버틀러의 최근작 <what world is this?>(2022)의 한국어판 제목이다.

2) 이광호, 남은 자의 침묵 : 세월호 이후에도 문학은 가능한가?, ‘문학과사회’ 2014년 겨울호, 334쪽.

3) 오혜진, ‘세월호’ 이후의 언어와 표상들,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오월의봄, 2019, 531쪽.

4) 이광호, 앞의 글, 324쪽.

5) 김보경, 인간의 가장자리로 걷기-여성, 동물, 기계, ‘문학과사회’ 2020년 여름호, 423쪽.

6) 송현지, ‘어느 순례자로부터 온 편지-안태운론’, <2023 신춘문예 당선평론집>, 정은출판, 2023, 102쪽.

7) 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 노고운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28쪽.

8)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김유동 옮김, 도서출판 길, 2005.

9) 천선란, <이끼숲>, 자이언트북스, 2023. 이하 본문 인용은 쪽수만 밝힌다.

10)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김응산 옮김, 창비, 2023, 85쪽.

11) 애나 칭, 앞의 책, 8쪽.

12) 위의 책, 341쪽.

13) 천선란, <천 개의 파랑>, 허블, 2020. 이하 본문 인용은 쪽수만 밝힌다.

14) 애나 칭, 앞의 책, 354쪽.

15) 채집인들은 임금을 받고 노동하기보다 숲에서 버섯을 발견하는 기쁨과 위험을 즐기며, ‘자유의 트로피’로써 야생의 송이버섯을 딴다. 이후 수입된 버섯은 중개인을 통해 거래되는데, 이때 버섯의 품질과 특성에 따라 그에 알맞은 구매인과 이어줌으로써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그렇게 판매된 버섯은 거의 항상 선물용으로 쓰이며 개인들 사이에 감사의 표시가 된다.(위의 책, 225~239쪽.)

16) 위의 책, 229쪽.

17) 대표적으로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Object Oriented Ontology)이 있다.

18) 관련된 논의로 황정아의 글 ‘물질과 문학, 그리고 인간-되기’(문학동네 2022년 봄호)가 있다. 비인간 물질의 강력한 행위자성을 강조하며 객체들 사이로 물러나려는 선택을 인간중심적인 외면으로 보는 것이 해당 글의 요지이다. 다만 “지금은 (…) 온갖 폐해를 바로잡는 우점종으로서의 마지막 책무를 이행할 때”(218쪽)라는 표현은 지구의 재생이 전적으로 ‘관리자’로서의 인간에 달려 있음을 함의한다는 점에서, 우연적 교란들에 주목하며 ‘인간이 지구를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 있다’는 주장 역시 환상에 불과하다고 보는 본고의 논지와는 갈라진다.

19)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2022. 이하 본문 인용은 쪽수만 밝힌다.

20)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50쪽.

21) 위의 책,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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