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비평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사유, 정동, 대화술이라 생각한다. 비평이 동시대의 문제를 사유할 수 있는 개념을 제공할 수 있는가? 시대-작가-텍스트를 순환하는 정동을 되살려낼 수 있는가? 그리고 때로는 작품과, 때로는 작가와, 때로는 독자와 대화적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을 옆에 두고 16편의 응모작을 읽었다.
“폐기되는 젊음과 인간-물질의 사유법―서이제론”이 주목하는 청년 세대의 정동, “점, 선, 그리고 면으로 그려낸 ‘1947년 9월 16일의 부산’―김숨의 잃어버린 사람을 중심으로”가 보여준 시공간적 건축술, “공거하는 세계와 유동하는 ‘우리’―이소연론”이 소개하는 정치적 기호학, “되도록이면 나무 곁에 내려앉자―최진영론”에서 포착한 공유지의 감각, “차라리 세계는 기억―이소호의 캣콜링과 김혜순의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를 중심으로”가 제시하는 모계 시론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다만 소화되지 않은 개념들, 열려 있지 않은 해석들, 텍스트의 결을 거스르는 흐름이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다음 두 편을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양수 속의 여행자들―2023년 한국 시에서 죽음을 복원하는 방식”은 ‘죽음’을 키워드로 2023년 현대시의 지형을 그려보인다. 대상이 된 시편들을 친절하게 요리하면서도 자신의 식탁에 정연하게, 순서대로 올린다. 독자 입장에서는 재료(텍스트)와 조리법(구성)과 플레이팅(문체)을 동시에 음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성찬을 차려낸 레시피(방법론)는 장점이면서 단점이기도 하다. 개별 시의 특성, 나아가 그 시를 쓴 시인의 개성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상실의 자리로부터―천선란론”은 천선란 SF가 품은 다종적(多種的) 가능성을 유려하게 짚어낸다. 글쓴이는 인간과 비인간, 자본주의(의 안과 밖), 재난, 애도 등 핵심 주제들을, ‘상실’에서 (‘너를 살리는 방식으로 내가 사는’) ‘윤리’로의 이행을 통해 설명한다. 최근 이론을 참조하면서도 그 이론의 완력에 휘둘리지 않고, 선행 논의를 존중하면서도 그 논의들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이 글의 큰 미덕이다. 기후위기의 시대, 천선란 SF를 경유하여, 인간이 만든 폐허 위에서 다종적 존재들의 얽힘을 발견하는 이 비평의 사유에는 숙고할 대목이 있었다. 좋은 동료를 만난 것 같아 반갑다. 당선을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