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엥겔스 한글판 중단 위기···“독일, 일본은 보수 정부 때 전집 사업 다시 시작”

김종목 기자

“1991년 구소련의 MEGA 작업이 중단됐을 때 국제마르크스엥겔스재단을 설립해 사업을 속개한 건 독일과 일본의 보수 정부였어요. 독일은 기민련, 일본은 자민당입니다.” 강신준 동아대 명예교수가 이 말을 꺼낸 건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arx Engels Gesamtausgabe, 이하 MEGA) 한글판 사업이 중단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9일 “올해 한국연구재단 토대사업 종료 뒤에 후속 사업을 신청했으나 탈락했다. 새로운 후원을 확보하지 못하면 사업 전체가 좌초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신준 동아대 명예교수와 롤프 헤커 베를린MEGA진흥협회 회장이 2019년 11월 2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협회 연차총회 중 학술교류 MOU를 체결하고 있다. 이 협회는 전세계 MEGA 학자들이 참여하는 유일한 학술단체다. 강신준 교수 제공

강신준 동아대 명예교수와 롤프 헤커 베를린MEGA진흥협회 회장이 2019년 11월 2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협회 연차총회 중 학술교류 MOU를 체결하고 있다. 이 협회는 전세계 MEGA 학자들이 참여하는 유일한 학술단체다. 강신준 교수 제공

강 교수는 중국과 일본은 번역본을 계속 펴내고 있다고 전했다. 강 교수는 “두 나라 모두 정부가 사업을 직접 주관하거나 지원한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세계 10대 강국이라는 주장과 완전히 대비되는 초라한 학술적 기반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마르크스 사상이 이미 유네스코 ‘인류의 기록유산’에 등재돼 고전 반열에 올랐는데도, 구석기시대 같은 고루한 편견이 그대로 남은 듯합니다. 순수 학술연구의 사회적 지원에 대한 무관심이나 인색함도 드러난 듯합니다.”

이 사업은 2016년 한국연구재단 토대연구에서 탈락했다. 2018년에는 심사평가 1위로 선정됐다. 이후 8월 기준 79권 중 12권의 원고를 마무리했다. 지난해 5월 ‘마르크스 엥겔스의 유일한 정본 전집’ 한글판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2>(도서출판 길) 2권을 냈다. 10권의 완성 원고 출판이나 67권의 번역 작업이 막힌 것이다.

강 교수는 “MEGA 한글판이 중단되면, 지난 세기 가장 논란이 많았던 사상에 관한 학술 정본의 85%가 미완으로 남는다. 유네스코 ‘인류 기록유산’인 마르크스-엥겔스 사상의 지적 유산이 공백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강 교수는 한글판 사업의 주역이다. 2008년 독일 베를린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중 MEGA 작업 본부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학술아카데미를 우연히 방문해 MEGA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2010년 중앙대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MEGA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2012년 동아대에 한글판 발간을 위한 ‘맑스엥겔스연구소’를 설립했다.

강 교수는 MEGA 작업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은 1987년 이론과 실천사의 <자본> 발간 이전까지 금서였어요. 1987년 재판을 통해 출판이 합법화됐죠. 이후 주로 문헌적으로는 검증되지 않은 상태로 단행본들이 나왔습니다. 검증을 거쳐 온전한 전집을 발간하려는 것이 한글판 사업입니다.” 강 교수는 “마르크스-엥겔스 사상의 학술 연구 토대를 마련하는 의미”라고도 했다. “이 사업이 좌절되면 지난 6월 경향포럼에 왔던 사이토 코헤이 같은 청년 마르크스 학자를 한국에서 길러낼 토양 자체가 소멸된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의 국제적 기반과 그간 쌓은 신뢰 관계가 무너질까 또 걱정한다. MEGA 연구자들의 국제조직인 베를린 MEGA 진흥협회와 교류협력 MOU를 체결했다. 2012년, 2018년 두 차례에 걸쳐 국제마르크스엥겔스재단에서 MEGA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독점 계약했다.

강 교수가 걱정하는 건 또 비정규 교수다. “사업의 중추 인력은 대부분 비정규 교수입니다. 생계를 위해 MEGA 연구영역에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강신준 동아대 명예교수가 2021년 5월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한글판 발간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강신준 동아대 명예교수가 2021년 5월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한글판 발간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강 교수는 한글판 중단과 좌초 위기에서 MEGA의 ‘기구한 운명’을 떠올렸다. 1913년 독일 사민당이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을 온전한 전집의 형태로 내려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실행되지 못했다. 1922년 러시아 문헌학자 리야자노프가 레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MEGA 작업(구 MEGA)을 시작했다. 1931년 스탈린이 리야자노프를 숙청하면서 MEGA는 중단됐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MEGA 작업(신 MEGA)이 재조직됐다. 1975년 신 MEGA 발간을 시작해 43권을 출간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독 정부 해체로 MEGA 작업이 또 중단됐다.

1990년 세계 주요 학자들이 모여 MEGA 작업 속개를 결의한다. 이 학자들이 국제마르크스엥겔스재단을 설립했다. 연명으로 독일 정부에 MEGA 사업 속개를 요구했다. 1998년부터 다시 책을 냈다. 2022년 12월 기준 총 114권 가운데 70권이 나왔다.

강 교수는 “국경을 뛰어넘은 국제적 연대의 힘으로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MEGA 한글판을 내고, 연구진을 유지하려면 연대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맑스엥겔스연구소 홈페이지(marxengels.donga.ac.kr) ‘재정후원’을 통해 후원할 수 있다. 후원금은 전액 국세청 연말정산 자료에 ‘기부금’으로 자동 처리된다. 강 교수는 “후원자들에게 한글판을 보내드릴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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