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락호락 길들일 수 없는 산토끼…집토끼와는 ‘속’부터 다르다

김응빈 교수

(40) 산토끼와 집토끼 그리고 옥토끼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 만한 동요 ‘산토끼’의 1절 노랫말이다. 2절에서 ‘산고개 고개를 나 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서 올 테야’라고 산토끼가 답한다. 이 노래를 지은이는 일제강점기에 초등생을 가르치던 이일래 선생(1903~1979)이다. 학교 뒷산에서 산토끼가 뛰노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떠오른 악상에 가사를 붙여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는 산토끼의 생물학적 특성도 제대로 파악했다.

산토끼는 우리 속담에도 등장한다.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비유는 욕심을 과하게 부리다 이미 가진 것까지 잃을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런데 생물학 관점에서 보면, 애당초 산토끼를 잡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수라는 뜻으로 다가온다. 산토끼는 절대 집토끼로 길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양대 토끼 가문

모든 집토끼 조상은 유럽토끼
무리짓는 습성 덕에 쉽게 가축화
생명과학 연구 귀중한 모델로

탁월한 뜀박질 자랑하는 산토끼
암컷 잡는 수컷만 짝짓기 성공
단독생활형이라 품기 힘들어

현재 우리에게 친숙한 토끼는 크게 두 종류, 가축화된 집토끼와 흔히 산토끼라고 부르는 야생토끼로 나눌 수 있다. 둘은 우선 생김새부터 다르다. 산토끼는 집토끼보다 몸집이 크고 귀도 길다. 갓 난 토끼에서는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하다. 집토끼는 털이 없고 눈도 뜨지 못한 상태로 태어나지만, 산토끼 새끼는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 바로 눈을 뜨고 당장이라도 달릴 준비가 되어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집토끼와 산토끼는 ‘종(species)’을 넘어 ‘속(genus)’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염색체 수가 집토끼는 22쌍, 산토끼는 24쌍이다. 이 정도면 둘은 양과 염소만큼이나 다른 셈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 사는 집토끼는 모두 한 조상, ‘유럽토끼(학명 Oryctolagus cuniculus)’의 후예다. 토끼 사냥은 적어도 12만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고기와 모피를 더 많이 안정적으로 얻기 위해 인류는 마침내 토끼 가축화에 성공했다. 이베리아반도 들판에서 굴을 파고 살던 야생토끼가 인간 손에 길들여져 집토끼가 된 데에는 생물학적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된다.

집토끼는 산토끼보다 달리기가 느린 데다, 멀리 도망가기보다는 가까운 굴에 숨으려고 달음박질치다 보니 상대적으로 쉽게 잡힌다. 게다가 무리를 지어 사는 집토끼는 사회성이 좋아서 가축화가 그만큼 쉬웠을 것 같다. 오늘날 집토끼는 다양한 품종으로 개량되어 가축을 넘어 반려동물로 사랑받기도 하고, 의생명과학 연구의 귀중한 모델 생물로서 인류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집토끼와는 대조적으로 가축화된 산토끼는 아직도 없다. 일단 산토끼는 위협을 감지하면 탁월한 뜀박질 실력을 뽐내며 순식간에 멀리 달아나 버린다. 산토끼는 시속 70㎞까지 달릴 수 있다. 집토끼보다 거의 두 배쯤 빠른 속도인데, 1초에 자기 몸길이의 37배를 주파하는 셈이다. 가장 빠른 육상동물로 알려진 치타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27배에 그친다. 이런 날쌘돌이를 힘들여 잡아도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힌다. ‘나 혼자 넘어서’라는 ‘산토끼’ 노랫말대로 단독 생활형인 산토끼는 사회성이 없어서 사람에게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에 갇힌 산토끼는 매우 불안해하며 작은 자극에도 겁을 먹고 날뛰는데, 심하면 우리에 부딪쳐 죽을 정도라고 한다. 여기서 ‘경솔한’ 또는 ‘무모한’을 뜻하는 영어 형용사 ‘헤어브레인드(harebrained)’가 유래한 듯하다. 참고로 집토끼와 산토끼를 가리키는 영어는 각각 ‘래빗(rabbit)’과 ‘헤어(hare)’이다. 말이 나온 김에 산토끼와 관련된 영어 표현을 하나 더 소개한다.

‘완전히 미친’ 또는 ‘몹시 화난’을 뜻하는 ‘mad as a March hare’라는 숙어는 아무래도 산토끼의 짝짓기 행동을 보고 만든 것 같다. 짝짓기에 앞서 암컷 산토끼는 냅다 내달린다. 수컷의 달리기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다. 한동안 펼쳐지는 추격전에서 자기를 잡는 수컷만 배우자로 받아들인다. 따지고 보면, 포식자가 득실거리는 야생 환경에서 달리기는 산토끼 생존을 담보하는 최고의 기술이다. 이런 맥락에서 수컷 산토끼의 질주 본능을 자극하는 암컷의 속내는 오랜 진화의 산물이라 하겠다.

생물학적으로 말해서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먹고, 번식을 위해 생존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암컷을 따라잡지 못하면 수컷 산토끼는 존재 가치를 송두리째 잃고 마는 처지가 된다. 토끼는 일 년 내내 번식이 가능하지만, 봄이 시작하는 3월에는 더욱 발정할 터이다. 시쳇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뛸 수밖에 없다. 비장하다 못해 처절한 속내를 모르는 무심한 사람 눈에는 괜한 발광으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전문가의 세계 - 김응빈의 미생물 ‘수다’]호락호락 길들일 수 없는 산토끼…집토끼와는 ‘속’부터 다르다

토끼 맹장이 큰 이유

토끼의 맹장은 위의 10배 크기
발효통처럼 수많은 섬유질 분해
기막힌 배변 기술이 생존 비법

토끼는 초식동물이다. 자연에서 풀을 주식으로 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토끼가 풀의 주성분인 섬유소를 소화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모든 초식동물이 다 그렇다. 풀을 아무리 먹어 봤자 소화를 못 시킨다면,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산단 말인가? 비결은 바로 소화관에 사는 다양한 미생물이다.

초식동물은 소화기관 구조에 따라 ‘반추동물’과 ‘후장 발효동물’로 나뉜다. 소 같은 반추동물은 보통 위가 네 개인데, 순서대로 혹위, 벌집위, 겹주름위, 주름위라고 부른다. 처음 두 개가 되새김에 관여하는 진정한 반추위다. 세 번째 겹주름위는 이름 그대로 주름이 많다. 일상에서는 이를 천 겹으로 과장하여 천엽(千葉)이라는 안줏거리로 부르기도 한다. 이 주름은 통과하는 내용물을 더 잘게 만드는 데에 요긴하다. 반추동물에서 사람 위와 같은 기능은 마지막 네 번째가 담당한다(‘흰 소의 뒷모습에서’, 경향신문 2021년 12월24일자 14면 참조).

후장 발효동물에 속하는 토끼는 우리처럼 위가 하나이다. 토끼가 먹은 풀은 위를 지나 작은창자(소장)를 통과한 다음 맹장으로 간다. 위 크기의 무려 10배 정도에 달하는 토끼 맹장은 일종의 발효통이다. 맹장에 서식하는 수많은 미생물이 섬유질을 분해하여 토끼에게 필요한 양분을 제공한다. 산토끼와 집토끼의 맹장 미생물 조성은 전반적으로 비슷하지만, 각각 고유 미생물을 몇몇 지니고 있다. 이들이 즐기는 먹이가 다르다는 사실이 주된 이유라고 추측된다. 산토끼는 나무 잔가지 같은 딱딱한 부분을, 집토끼는 풀잎이나 과실처럼 비교적 연한 부분을 먹는다. 어쨌든 토끼를 비롯한 후장 발효동물에서는 맹장을 위시한 큰창자(대장)가 반추위 기능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반추동물의 경우 되새김한 내용물에 다량의 미생물이 섞여 주름위로 들어온다. 미생물을 이루는 단백질 성분은 주름위에서 아미노산으로 분해된 다음 소장을 거치며 흡수된다. 그러나 후장 발효동물은 이렇게 할 수가 없다. 위와 소장 뒤에 있는 대장에서 미생물 발효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토끼는 상당히 역겹게 보이는 ‘자기분식’이라는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쉽게 말해서 제 똥 일부를 먹는 것인데, 기본 원리만 놓고 보면 소의 되새김질과 같다.

토끼는 효율적 자기분식을 위해 기막힌 배변 기술을 발휘한다. 토끼는 영양 가치가 있는 물질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여 서로 다른 두 가지 똥을 만든다. 끈적한 묽은 똥에는 아미노산과 비타민, 그리고 많은 발효 미생물이 들어있는 반면, 환약 같은 굳은 똥은 거친 섬유질이 대부분이다. 집토끼는 배변 재주가 더 신묘해서 심지어 무른 똥을 점액질 막으로 감싸서 내보낸다. 어찌 되었든 두 토끼 모두 무른 똥만 골라 먹는다.

옥토끼는 산토끼일까, 집토끼일까?

조상들이 달에서 찾은 옥토끼는
생김새를 보면 산토끼와 닮아
계수나무는 먹이로 딱이다

달은 우리에게 늘 같은 얼굴을 보여준다. 달이 한 바퀴 자전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달이 지구를 한 바퀴 공전하는 시간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와 달 둘 다 계속 돌고 있지만, 달이 지구를 향해 있는 면은 언제나 똑같다. 또한 달은 지구에서 맨눈으로 표면을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천체이다.

보름달을 바라보면 누구나 밝은 부분과 어두운 곳을 구분할 수 있다. 밝은 곳이 고지대이고 어두운 곳은 저지대이다. 우리 옛 조상은 휘영청 밝은 보름달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달에 커다란 토끼, ‘옥토끼’가 산다고 상상했다. 이제 달에 그런 토끼가 없다는 건 어린이도 다 안다. 그런데도 2022년 8월5일 발사한 대한민국 최초의 달 궤도 탐사선 관련 뉴스에 여전히 옥토끼 얘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를 통해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의 힘을 알리고 기르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보름달 표면 명암의 경계를 따라 선을 그어보면, 언뜻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 모습이 보인다. 앞서 소개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 토끼의 생김새를 보니 긴 귀와 뒷다리가 집토끼보다는 산토끼를 닮았다. 여기에 더해 옥토끼가 계수나무 아래에 있단다. 계수나무는 10m 정도로 곧게 자라고 굵은 가지가 갈라지면서 잔가지가 많아진다. 산토끼 먹이로 딱 맞다.

2023년 토끼해 새해를 맞아, 공부를 놀이 삼아 펼쳐본 상상이다. 역사를 보면, 그 당시에는 엉뚱하게 여겨지던 ‘남다른 생각’이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이런 생각은 과학의 씨앗이다. 여기서 돋아난 싹이 울창한 나무로 자라면서 현대 문명의 이기를 낳은 많은 과학 분야를 탄생시켰다. ‘생각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말이다. 최근 40여년간 인류가 새롭게 접한 정보의 양이 인류 문명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1980년대까지 알고 있었던 정보량보다 더 많다고 한다. 우리는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넘치는 정보를 꿰어 새로운 지식을 만들 수 있는 능력, 즉 창의력 또는 상상력이 아닐까? 이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에서 맺어지는 열매일 것이다.

▶김응빈 교수

[전문가의 세계 - 김응빈의 미생물 ‘수다’]호락호락 길들일 수 없는 산토끼…집토끼와는 ‘속’부터 다르다

1998년부터 연세대학교에서 미생물을 연구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연세대 입학처장과 생명시스템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지은 책으로 <미생물과의 마이크로 인터뷰> <술, 질병, 전쟁: 미생물이 만든 역사> <온통 미생물 세상입니다> <생명과학, 바이오테크로 날개 달다> <미생물에게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운다> <나는 미생물과 산다> 등이 있다. 또한 유튜브 채널 ‘김응빈의 응생물학’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파트너 채널 ‘김응빈의 생물 수다’를 운영 중이다. 유튜브 채널 링크: https://www.youtube.com/@kimyesbio/featured. 네이버 채널 링크: https://contents.premium.naver.com/biotalkkim/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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