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시조시인 이호우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우남찬가’ 부르는 미친 세상에 외치다…“미쳐보지 못함이 설구나”

이승만 정권에서 시조 ‘바람벌’과 귀환한 KNA납북 사건 당시 탑승객들의 반공강연 동원을 비하하는 사설로 고초를 겪었던 언론인이자 시조시인 이호우. 당시 절필했던 이 시인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월남파병을 비판하는 시조로 다시 필화를 입었다. 민병도 시조시인 제공

이승만 정권에서 시조 ‘바람벌’과 귀환한 KNA납북 사건 당시 탑승객들의 반공강연 동원을 비하하는 사설로 고초를 겪었던 언론인이자 시조시인 이호우. 당시 절필했던 이 시인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월남파병을 비판하는 시조로 다시 필화를 입었다. 민병도 시조시인 제공

(1)“세기의 태양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봄은 꽃보다도 일찍 오고/ 바람은 향기 앞에 부드럽다.// (…)/ 조국을 지키라는 신성한 명령에/ 넘어져도 봉우리처럼 적 앞에 서나니/ 땅을 움직이고 하늘은 뜻을 내려/ 용사들 시간을 다투어 진격을 기다린다.”

(2)“독립운동의 혜성, (…) 민족의 태양이라고 일컬으며, 위대한 애국자, (…) 세계적 위인, 민주주의의 거인, 정의의 투사, ….”

(3)“태양처럼 나타나신다 그이는…/ 모여선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람들은 모두 다 경건히 우러른다.”

(1)은 시인 김광섭의 ‘우남 선생의 탄신을 맞이하여’(서울신문, 1955년 3월26일)라는 이승만 80회 생일 헌시이고, (2)는 외무장관 조정환의 이승만 82세 생일 ‘송축사’(외무부, <조 외무부 장관 연설 및 성명집>)이며, (3)은 북한 시인 강립석의 ‘행복한 이 아침에도’(1954년)이다.

■ 서울 새 이름을 ‘우남’으로

동족이 서로 살육한 불과 몇 년 뒤 한반도에는 이렇게 세 개의 태양이 내리쬐었다. 그런데도 나라는 동토에서 추위에 떨며 허기졌다. 현란한 언어의 우상화로 이루어진 인조 태양 때문에 백성들이 더 고달팠던 1950년대의 아스라한 추억.

이호우 시조시인의 고향인 경북 청도군 화양읍에 세워진 시비.

이호우 시조시인의 고향인 경북 청도군 화양읍에 세워진 시비.

독재 추종자들은 장건의 <민족의 해와 달>(여론사, 1959년)을 세금으로 구입해 전국 학교에 배포했다. 해는 이승만이고 달은 이기붕이었다.

이 ‘태양’이 1955년 9월16일 느닷없이 서울의 이름을 바꾸라는 담화를 냈다.

8·15 직후 각계 70여명으로 구성된 경성부 고문회의가 한성시(漢城市)라 쓰고 ‘서울시’로 읽자는 말도 안되는 결의를 하자 미군정은 서울로 작명(1946년 9월 군정법률 제106호로 확정)해버렸다. 민족적 자존심이 상해서 개칭을 제안했다면 체면은 섰겠는데, 도리어 민족 주체성을 외면한 채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렵다는 구실이었다.

급기야 9월30일 ‘수도명칭제정연구위원회’가 구성돼 서울시 주관으로 현상공모에 들어갔는데, 우남·한양·한경·한성 중 우남이 압도적이었다. 당연히 동아일보를 비롯한 반대 여론이 거셌다(김제정, <해방 직후 수도 명칭의 결정과 1950년대 개정 논의>).

충북 진천 출신 민주당 이충환(李忠煥, 1917~2005) 의원이 “시골 사람들은 서울 사람 욕할 때 서울 놈, 서울 놈 하거든. 그런데 서울이 우남시 되면 우남 놈 우남 놈 하지 않겠나? 그렇게 되면 우리 국부님”(경향신문 1956년 3월11일)에게 욕이 되니 반대라는 게 주효했다. 여기에다 서울시의회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8월13일)하자 이승만은 자기 이름이나 아호로 명칭을 바꾸는 걸 원치 않는다(1957년 1월19일)고 후퇴했다. 그러나 바로 이튿날 이 옹고집은 우남 대신 한도(漢都)로 하자고 수정 제안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그러나 추종자들은 기어이 남한산성길을 우남로로, 남산공원을 우남공원으로 하고, 우남회관(시민회관), 우남정(팔각정) 등등의 명칭에다 파고다공원(1956년 3월)과 남산(1956년 8월)에 동상까지 세웠다. 김영삼 당시 의원은 그 건립비는 2만여명 굶주린 국민의 한 달 식비라며 비판했다.

양유찬 주미대사는 1956년 1월24일 기자회견에서 “이 박사를 제쳐놓고 누가 이 난국을 극복해 나갈 수 있겠는가. 만일 이 대통령이 하야하시는 경우 미국은 대한 원조를 중지하게 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 시인들의 저항

이런 시대에 시인들은 무엇을 노래했을까. 나라에 도(道)가 사라져 버렸는데도 필화가 없으면 문사로서의 도리가 아닐 터였다. 체면을 살려준 건 시인 유치환(柳致環, 1908~1967)과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1912~1970)였다.

이승만 정권하인 1956년 제1회 경북문학상 수상을 위해 연단에 앉아 있는 유치환 시인과 이호우 시조시인(왼쪽부터). 민병도 시조시인 제공

이승만 정권하인 1956년 제1회 경북문학상 수상을 위해 연단에 앉아 있는 유치환 시인과 이호우 시조시인(왼쪽부터). 민병도 시조시인 제공

유치환은 이 날강도 세상을 향해 ‘칼을 갈라!’고 절규했다. “- 칼 가시오!/ - 칼 가시오!/ 한 사나이 있어 칼을 갈라 외치며 간다.// 그렇다/ 너희 정녕 칼들을 갈라./ 시퍼렇게 칼을 갈아 들고들 나서라.// (…)// 그 환도를 찾아 갈라/ 비수를 찾아 갈라 /식칼마저 모조리 시퍼렇게 내다 갈라.// 그리하여 너희들 마침내 이같이/ 기갈 들여 미치게 한 자를 찾아/ 가위 눌려 뒤집이게 한 자를 찾아/ 손에 손에 그 시퍼런 날들을 들고 게사니같이 덤벼/ 남나의 어느 모가지든 닥치는 대로 컥컥 찔러/ 황홀히 뿜어 나는 그 새빨간 선지피를/ 희광이 같이 희희대고 들이켜라는데/ 그리하여 그 목마른 기갈들을 추기라”(동아일보, 1955년 7월28일)고 포효했다.

이런 기백 때문에 시인은 1959년 경주고교 교장직을 사임당한 뒤 2년간 대구에서 시와 산문으로 독재를 질타했다.

유치환의 영혼의 애인으로 청초한 이영도(李永道, 1916~1976)의 오빠인 이호우의 외로운 투쟁은 그간 너무 묻혀 있었다.

두 남매의 증조부(이규현)는 영남학파 거두로 일제의 병탄 후 삭발, 대운암(大雲庵)에 들어간 지조의 유학자였고, 조부는 농사를 지으며 의명(義明)학당을 건립하는 등 계몽에 투신했다. 그런데 아버지(이종수, <친일인명사전> 수록)는 상투 잘라 집으로 우송한 뒤 신학문을 익혀 친일의 길로 들어서 선산·영양·영천 등지 군수를 거쳐 경북도청 총무과장 발령을 받았으나 신병으로 8·15 전에 죽었다. 집안에서는 가족묘지 매장을 거절하여 가묘를 썼다가 나중에야 이장했으나 반골 아들 이호우는 한동안 비석도 안 세웠다.

아버지는 출향 후 다른 여인까지 얻었기에 호우·영도 남매는 조부의 보살핌으로 성장하며 생부의 친일행위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호우가 경성제일고보와 도쿄예술대학을 중퇴한 원인인 신경쇠약도 아버지 때문이었다.

8·15해방 후 이호우는 대구로 이사, 대구고법 재무과장 등을 거쳐 대구일보와 매일신문 편집국장·논설위원을 지내며 아버지에 대한 속죄로 반골 기질을 꺾지 않았다.

집 전화번호가 815에다 전용차에 금고도 갖췄던 윤택한 이 시인은 1949년 남로당 도당 간부라는 모략에 걸려 군사재판에 회부되면서 모든 재산이 파탄난 뒤 1950년 봄 시인 김광섭의 노력으로 석방됐으나 육신은 폐인이었다.

‘죽순(竹筍)’ 동인들 집합소였던 시인 이윤수(李潤守, 1914~1997)의 시계점(名金堂)에서 알게 된 한 여인이 화근이었다. 그녀를 좋아하던 헌병 대위가 모함, 남로계로 몰아 여순사건의 16연대 반란에 연계시켰으니 한국판 <25시>였다. 나중 대구시내에서 빨치산에게 노획한 물품전시회가 열렸는데, 맨 앞에 이호우 시인의 금고가 있었다(시인의 차남 李相麟, 80세, 증언).

■ 이호우의 세 번의 필화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 (16) 시조시인 이호우

이호우의 첫 필화는 ‘바람벌’(현대문학 1955년 3월)이었다. 미칠 것 같은 세상에서 “더불어 미쳐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설구나”라며 “일찍이 믿음 아래 가신 이는 복되기도 했어라”라는 이 작품은 1950년대의 절명사(絶命詞)다. 이 작품으로 호된 고통을 당한 시인은 무척도 자제를 했으나 KNA 납북 사건(1958년 2월16일) 이후 매일신문 사설로 두 번째 필화를 당했다. 귀환한 탑승객들을 반공강연에 동원하는 세태를 비하했으니 대단한 용기였다. 그러나 그 용기는 필화의 고통 앞에 꺾였다. 이후 그는 어용 언론계와 문단을 등지고 절필로 외롭게 지냈다.

그러다가 월남 파병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 ‘삼불야(三弗也)’로 세 번째 필화를 입었다.

“무슨 업연이기/ 먼 남의 골육전을// 생때같은 목숨값에/ 아아 던져진 삼불(三弗) 군표(軍票)여// 그래도 조국의 하늘 고와/ 그 못 감고 갔을 눈”(현대문학, 1966년 10월).

시조 ‘삼불야’는 “베트콩과 최전방에서 싸우는 사병들은 하루에 1불. 청룡부대 K하사가 캄란에 상륙한 지 사흘 만에 죽었다. 부대 재무관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K하사 유해 위에 삼불을 올려놓고 눈물을 뿌렸다. 사흘 복무했으니 삼불이 나왔던 것이다”라는 1966년 1월12일 중앙일보 월남 현지보도가 실마리였다.

▶바람벌

그 눈물 고인 눈으로 순아 보질 말라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살아보자고 아아 살아보자고.


욕(辱)이 조상에 이르러도 깨달을 줄 모르는 무리

차라리 남이었다면, 피를 이은 겨레여

오히려 돌아앉지 않은 강산(江山)이 눈물겹다.


벗아 너마자 미치고 외로 선 바람벌에

찢어진 꿈의 기폭(旗幅)인 양 날리는 옷자락

더불어 미쳐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설구나.


단 하나인 목숨과 목숨 바쳤음도 남았음도

오직 조국(祖國)의 밝음을 기약함이 아니던가.

일찍이 믿음 아래 가신 이는 복(福)되기도 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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