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고추냉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알싸함에 침이 ‘꼴깍’

철원 | 박경은 기자

일본산 와사비만 알았다고?…다채로운 맛, 이젠 국산으로 즐긴다

강원 철원군 내포리의 한 농장에서 농부가 수경재배로 수확한 고추냉이 뿌리를 보여주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강원 철원군 내포리의 한 농장에서 농부가 수경재배로 수확한 고추냉이 뿌리를 보여주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요리 만화 <미스터 초밥왕>에는 주인공 쇼타가 최고의 고추냉이를 찾아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맑은 물에서 자란 푸릇한 고추냉이 뿌리를 강판에 갈아 초밥에 얹어 입안에 넣을 때 착 감기는 상큼한 맛은 상상만으로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여행길에 올라 직접 맛을 보는 경우가 아니라면 튜브에 든 시판 ‘와사비’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제 국내에서도 싱싱한 고추냉이를 구할 수 있다. 강원 철원군에는 고추냉이를 재배하는 농가가 여럿 있다. 20여년 전 개별 농가에 의해 실험적으로 재배가 시작됐고, 4년 전 철원군은 특화작물로 선정했다. 이 지역 13개 농가로 구성된 농업법인도 설립돼 본격적인 생산이 이뤄지고 있다.

지난 5일 철원 민통선 안 내포리 샘통 지역 고추냉이 농장을 찾았다. 재두루미가 곳곳에 무리 지어 있는 들판을 지나 고추냉이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자리 잡은 곳에 닿았다. ‘땅에미소’라는 간판이 붙은 농장 안으로 들어가니 푸르고 윤기 나는 잎사귀를 무성하게 낸 작물이 주르륵 심겨 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아래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청정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국산 고추냉이다. 이석통 대표가 줄기를 잡고 뽑아내자 흙 속에 감춰져 있던 고추냉이 뿌리가 올라왔다. 뿌리를 감싸고 있던 넝쿨을 걷어내니 어른 손만 한 길이의 두툼한 고추냉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뿌리를 잘 씻어서 돌기만 대충 떼어내면 먹을 수 있습니다. 껍질을 벗기지 않고 강판에 잘 갈면 달큼하고 알싸한 향이 나요. 회를 먹을 때도 좋고 고기 구워 먹을 때도 함께하면 잘 어울리지요. 그런데 갈고 나서 15분 정도 지나면 향이 사그라들기 때문에 먹기 직전에 가는 게 좋아요.”

샘통 고추냉이는 맑은 물에서 수경재배 방식으로 키운다. 현무암 지대인 이곳은 연간 수온이 13~15도로 일정하고 용존산소량이 풍부한 용천수가 흐른다. 수온이 조금만 맞지 않아도, 물속 산소량이 떨어져도 생육이 중단되는 까다로운 작물이다. 공기의 습도와 온도도 따져야 한다. 다행히 철원은 자연환경과 입지조건 덕분에 국내에서 고추냉이를 키울 수 있는 드문 지역이다. 일본에선 후지산 기슭의 시즈오카가 오랜 명산지다.

일반적으로 고추냉이는 뿌리만 먹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잎, 줄기, 꽃까지 모두 먹을 수 있다. 민통선 밖의 동송읍 등 다른 지역에서는 토경재배나 베드(bed)재배 방식을 통해 쌈채 생산에 주력한다. 잎을 뜯어 먹어보니 은은한 알싸함과 상큼함이 느껴졌다. 고기를 구워 쌈을 싸 먹으면 느끼함을 잡아줄 뿐 아니라 입맛을 돋우는 데도 뛰어나다. 정영일 대표가 동송읍에서 운영하는 300평 규모의 노스탤지어농장은 온도와 습도, 토양 상태가 자동 조절되는 스마트팜이다. 이곳에서는 주로 쌈채를 생산한다. 그는 “모종을 옮겨심은 뒤 6개월 정도 지나면 본격적으로 수확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먹는 깻잎보다 좀 더 큰 크기가 되면 적당하게 자란 것”이라고 말했다. 고추냉이 쌈은 근래에 캠핑 마니아들 사이에 입소문이 많이 나면서 찾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 특히 고급 고깃집 중에서는 고추냉이 잎을 찾는 곳이 많아졌다. 쌈채로 내거나 명이나물 대신 고추냉이 잎으로 장아찌를 만들기 위해서다.

‘철원와사비영농조합법인’ 정호원 대표는 “철원에서 생산되는 고추냉이는 알싸하면서도 단맛이 나기 때문에 일본에서 나는 것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서 “생육 상태를 파악하고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농가가 오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현재 뿌리는 연간 2t, 쌈과 줄기는 25t 정도 생산되는 수준이라 대량 가공·판매는 어렵지만 점점 농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철원 고추냉이는 온라인을 통해서도 판매되나 매진되기 일쑤다. 물량이 많지 않아서다. 고추냉이 뿌리는 평균적으로 100g에 2만5000원 안팎이다. 쌈은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연중 공급된다. 고석정 앞에 있는 철원 농산물 직판장 ‘오늘의 농부’에서는 고추냉이 쌈과 장아찌류를 판매한다. 장아찌로 만들어 먹기 좋은 꽃대는 2~3월에만 난다.

철원 주상절리 입구에 있는 드르니국수에선 고추냉이 잎 비빔국수, 카페 바잘트38.1에선 고추냉이 파우더를 활용한 아이스크림도 맛볼 수 있다. 철원 지역 농산물을 바탕으로 메뉴를 개발해온 철원식문화연구원 염혜숙 대표는 “철원을 대표하는 오대쌀, 쿨포크(돼지고기)와 고추냉이를 활용한 ‘철원삼합’도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여기서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고추냉이를 재배하는 이 지역에서는 고추냉이, 와사비를 혼용해 사용한다. 둘은 같은 말일까 다른 말일까. 철원군 농업기술센터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철원에서 고추냉이라 불리는 작물은 와사비 품종입니다. 와사비의 한글 순화어로 고추냉이를 쓰고 있어서 둘이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식물학적 분류로 봤을 때 와사비(Wasabia Japonica Matsum)와 고추냉이(Wasabia Koreana Nakai)는 서로 학명이 다른 작물입니다.”

원래 와사비는 1920년대 일본인에 의해 국내에 들어왔다. 한동안 재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가 1997년 철원군 민통선 내 지역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철원에서 계속 자라고 있다. 1920년대 일본에서 들여왔던 와사비 품종이 이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왜 와사비를 고추냉이라고 부를까.

와사비와 고추냉이는 1930년대에 각각 학명이 부여됐다. 그 뒤 외래어를 한글 순화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같은 ‘속’에 속하는, 특징이 비슷한 식물의 이름을 따다 보니 와사비를 대체할 말로 고추냉이를 선택했다. 와사비가 고추냉이라는 이름을 차지하면서 원래의 고추냉이는 ‘참고추냉이’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이 참고추냉이는 1930년대 이후 국내에서 개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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