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에 따라 균등하게’…이 문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서영 기자
오찬호 사회학자·작가, 이소영 마이크로소프트 이사,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 김서영 경향신문 기자(왼쪽부터)가 지난 12일 경기 파주시 스튜디오 놀다에서 ‘헌법 제31조를 다시 말하다’를 주제로 좌담을 하고 있다. 헌법 제3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돼 있다. 참석자들은 ‘능력에 따라’라는 문구와 교육 불평등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EBS 제공

오찬호 사회학자·작가, 이소영 마이크로소프트 이사,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 김서영 경향신문 기자(왼쪽부터)가 지난 12일 경기 파주시 스튜디오 놀다에서 ‘헌법 제31조를 다시 말하다’를 주제로 좌담을 하고 있다. 헌법 제3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돼 있다. 참석자들은 ‘능력에 따라’라는 문구와 교육 불평등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EBS 제공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신이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 감독 배리 스위처가 했다는 이 말은 능력주의와 공정을 둘러싼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를 꿰뚫어본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사회에는 3루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고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투 스트라이크를 먹은 사람도 있다. 타석에서 관중의 응원을 받아볼 기회도 없이 야구장 밖에서 야구장의 함성 소리만 들어야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우리 헌법 제3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돼 있다. 열쇳말은 ‘능력’과 ‘균등’이다. 이 두 단어는 ‘불평등’ ‘격차’라는 단어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우리 교육 현실에 고민거리를 던진다.

경향신문과 한국교육방송공사(EBS)는 공동으로 기획한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시리즈 마지막 회에서 헌법 제31조의 의미를 다시 물었다.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 이소영 마이크로소프트 이사, 오찬호 사회학자·작가가 머리를 맞댔다.

■ 학생들이 본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박정희 정권 때 개헌하며 문구 추가돼
‘교육의 기회 고르게 보장’이 취지지만
학생들은 불평등하게 드러나는 결과에
‘능력’을 불평등 정당화하는 단어로 오해

헌법 제31조 1항을 접한 중학생들도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란 표현에 주목했다.

김시훈군(14)은 “균등이라고 하면 모두가 다 똑같이 교육을 받아야 되는 것인데, 요즘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학원에 많이 가는 친구는 다른 친구들보다 더 교육을 많이 받는 것”이라고 했다. 김한준군(14)도 “집안 형편에 따라 학원 수강이나 과외 같은 걸 받지 못하게 되면 교육 격차가 더 생기기 때문에 ‘균등하게’라는 단어가 주목된다”고 했다.

중학생들은 ‘능력’을 재력을 비롯한 ‘부모의 능력’으로 인식했다. 박제이양(14)은 “능력이란 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량’도 포함하고 있겠지만 재력 같은 것도 포함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지현양(14)은 “그냥 ‘균등하게’가 아니고 능력에 따라서 하는 거면 ‘부잣집 애들 능력’ ‘가난한 애들 능력’ 그런 게 생각난다. 왜 ‘능력에 따라’가 들어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위서현양(15)은 “능력은 자기가 만들어 낸 능력이 아니고 공평한 방법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능력이다. 사교육을 못 받는 아이들도 있고, 부모님의 권위를 가지고 수월하게 교육받는 아이들도 있다”고 봤다. 또 “균등도 법에 명시되어 있긴 한데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내용이다. 모든 아이들에게 기회와 경제적 지원을 주거나, 권위가 있으신 분들에게는 다른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하는데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본뜻은 다른데…왜 이렇게 해석되나

‘능력에 따라’란 문구가 한국 헌법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에선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만 했다. 이후 1962년 박정희 정권 때 개헌하며 ‘능력에 따라’가 추가됐다. 학생들은 여기서 말하는 ‘능력’을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단어로 이해한다. 하지만 당초 취지는 교육의 기회를 고르게 보장하자는 것에 가깝다. 헌법재판소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란 법률이 정하는 일정한 교육을 받을 전제조건으로서의 능력을 갖추었을 경우 차별 없이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기회가 보장된다는 것이지, 일정한 능력, 예컨대 지능이나 수학능력 등이 있다고 하여 제한 없이 다른 사람과 차별해 어떠한 내용과 종류와 기간의 교육을 받을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은 아니다”(93헌마192)라고 판시했다.

‘능력’이라는 단어는 왜 오해를 받는 걸까? 법은 원론적인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학생들은 불평등하게 드러난 ‘결과’를 보기 때문이다. 법의 이념과 현실 간 괴리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이소영 마이크로소프트 이사는 “산업화 시대의 학교라는 획일화된 교육시스템에서 모든 아이들이 같은 능력을 가지기를 강요했기 때문”이라며 “다양성에 대해 많이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능력이라는 것을 학교 시스템에 잘 적응하는 것으로 인지한 것 같다. 사회적인 담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오찬호 작가는 학생들의 반응에서 긍정적인 점과 우려되는 점을 동시에 봤다. 오 작가는 “긍정적인 면은 학생들이 능력의 층위를 나눠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능력이 부족하면 차별받는다’는 말을 했을 때 ‘능력이 도대체 뭔데’라고 따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려해야 할 점은, ‘우리가 능력만 있으면 못할 것 없다’는 희망이 필요한데 지금은 능력이라는 것이 (오히려) 학생들을 짓누르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 우리는 왜 ‘시험’에 집착하나

능력에 따른 구분을 정당화하는 굳건한 신화는 시험에 대한 믿음이다. 2018년 유네스코 방콕사무소는 ‘시험 문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배움의 사회문화적 영향에 관하여’란 보고서에서 이를 ‘시험 문화’로 정의했다. 시험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특히 아시아 나라들에서 시험이 갖는 의미는 ‘사회적 계층 이동’과 ‘더 많은 경제적 기회’로 압축된다는 것이다. 이때 시험은 성취도를 평가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한정된 사회적 자원을 ‘분배’하는 강력한 도구로도 기능한다. 보고서는 특히 한국의 교육열을 두고 “한국에서 시험은 개인의 삶의 질과 성공을 결정짓는 전통적이고 강력한 메커니즘으로 기능해 왔다”며 “교육열의 근원은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 엘리트 계층에 진입하려는 욕망”이라고 짚었다.

시험이 이토록 강력한 사회적 기능을 하는 것은 ‘시험은 공정하다’는 인식에서 온다. 김희삼 교수는 “능력이 시험이라고 하는 얼핏 객관적인 도구를 통해서 나타난 결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며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주어졌다. 대학 입시에서 배제된 사람은 없었고, 그 결과가 이렇다’는 식”이라고 말했다.

오찬호 작가는 “시험이 하나의 사회철학 자체가 돼 버렸다”고 진단했다. “시험을 의심하지 않고, 늘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시험으로 우리 사회가 굉장히 잘 돌아가고 있으며 공정하다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오 작가는 “결국 시험을 치르는 것이 사회에서 가장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리게 된다”며 “다들 노력을 너무나 많이 하기 때문에 제도를 바꿀 수가 없다”고 했다.

한국 사회는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각종 고시, 공채, 자격 시험을 비롯해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일찌감치 모든 것이 결정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이소영 이사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치열한 내부 경쟁에서 벗어나 모두의 발전을 추구하면서 혁신에 성공한 사례를 예로 들었다. 그는 “자기 혼자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평생의 기회를 주는, 공정하게 경쟁했다 하더라도 잘된 사람한테 모든 권한과 모든 기회를 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장동선 박사도 “시험이 가지는 가치는 분명히 있지만 시험이라는 도구가 1등과 2등의 능력 차이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거나, 0.1% 안에 들지 못하는 사람이 0.1% 안에 드는 사람보다 능력이 떨어진다는 판단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봤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③헌법 제31조를 다시 말하다]‘능력에 따라 균등하게’…이 문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능력주의의 함정

‘시험=공정’이란 불멸의 명제에 갇혀
출발점이 다르다는 사실은 고려 안 돼
‘용 안 나는’ 개천 바꿀 고민 시작할 때
인간의 존엄성 존중 받을 토대 만들어야

능력주의를 굴리는 두 바퀴는 시험과 공정이다. ‘공정’하게 ‘시험’을 치렀다고 믿는 이상 능력주의는 의심할 여지 없는 불멸의 명제가 된다. 개인은 그저 달릴 수밖에 없다. 배리 스위처의 말처럼 애초에 서로가 선 출발점이 다르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장동선 박사는 “학생들이 힘들어 하는 건 결국 교육을 넘어선 사회 불평등의 문제다. 사회가 기회를 열어주지 못하고 불평등이 개인의 문제가 되는 순간 스트레스가 커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 박사는 “저출생이나 새로운 기술 등으로 사회가 바뀌는데, 기존의 시스템 안에서 개인에게 주는 부담과 사회가 새롭게 져야 되는 부담은 바뀌지 않고, 그 모든 것을 개인의 몫으로 넘기고 있는 부분에서 능력주의 문제가 나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불평등으로 인해 능력에 차이가 생긴다는 점을 도외시하고, 능력의 차이에 근거해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 오찬호 작가는 이를 ‘능력주의의 함정’으로 규정했다. 오 작가는 “불평등이 좋은 교육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 본질인데, 우리는 ‘교육이 불평등한 세상에서 나를 살려줄 것이다, 구원해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불평등을 내버려두면 교육 현장은 엉망진창이 되는데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불평등에서 벗어날 방법은 교육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라고 했다.

또 “본래 능력주의는 귀족주의에 맞서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개념인데, 어느 순간 귀족주의가 능력주의로 대체되며 기득권이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시스템으로 사용되고 있다”면서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를 제대로 실천하는 나라가 없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 불평등에 항의하는 건 ‘투덜이’나 ‘자격지심’이 되고, 문제제기는 ‘능력주의야, 어쩔 수 없어’라는 냉소에 부닥친다.

■ 옆으로 놓인 다양한 사다리

“능력주의로 포장되어 있는 현대 경쟁사회를 살아갈 때는, 경쟁에서 처지는 걸 자기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자괴감이 들기 때문에 끊임없는 경쟁 강박과 불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이 달라지고 다양해질수록 경쟁은 더 복잡해지고, ‘나는 저런 정보나 기회를 갖고 있지 못하네’ ‘나에게는 그냥 또 다른 신천지인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김희삼 교수의 진단이다.

또 김 교수는 청년들이 끊임없이 스펙 경쟁을 하면서 비교하고 좌절하는 것을 능력주의의 한 단면으로 봤다. 김 교수는 “상향비교 성향이 강한 동아시아 특성상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내가 어떤 자리를 점하고 있는지를 보는 문화의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교육을 통한 기회·과정·결과의 평등을 상징하는 ‘사다리’ 역시 수직적 이미지다. 개천에서 벗어나 하늘로 날아가는 용도 마찬가지다. 이와 대비되는 심상은 ‘무너진 사다리’다. 불평등과 격차가 너무 커져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이 어려워진 현실을 의미한다.

오찬호 작가는 ‘어떻게 하면 개천에서 용 나느냐’란 질문을 이제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질문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개천을 바꾸기 위한 고민을 시작할 때라는 것이다. 오 작가는 “사회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에 개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개천을 바꾸는 작업과 (개천에 사는)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당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토대까지 함께 만들려는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장동선 박사는 우리 사회에 좀 더 다양한 사다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장 박사는 “교육의 힘은 사다리 한 칸이라도 올라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인데, 그동안은 한 방향으로만 가다 보니까 너무 힘들어서 답도 없었던 것이다. 여러 개의 사다리를 만들거나 혹은 사다리를 눕혀서 다리로 만들어 (학생들이) 고비를 건널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소영 이사는 “우리 교육이 능동적·적극적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기르는 교육이 아니라 줄세우기로 경쟁을 너무 치열하게 해서 에너지가 빨리 소진되는 점이 문제”라며 “개인화된 교육을 위해서는 반드시 (기본소득 같은)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이사는 최근 기업의 인재상과 채용 경향도 변화하고 있다고 했다. 이 이사는 그러면서 “과거에는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릴 수 있다. 학부모들과 교육의 실제 주체들도 변화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3부작은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창사특집으로 진행한 경향신문과 EBS의 공동 기획입니다.기사는 경향신문 홈페이지와 인터랙티브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으며, 특집 21~23일 오후 9시50분~10시45분 EBS1 채널에서 방영됩니다.

■공동취재팀
경향신문 : 정제혁 정책사회부장, 이성희·김서영 기자
EBS : 오정호 방송제작기획부장, 이상익·김현수·윤미영·정보영·김나연·박송희 PD, 김유미·윤선영·황도현·조희정 작가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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