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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학교④ 강원 화천

화천 간동고 김건우 학생이 지난달 14일 화천학습관 자습실에서 모의고사 문제를 풀고 있다. 학습관은 화천군에서 만든 일종의 ‘기숙 학원’으로 학생들은 이곳에서 숙식하며 입시를 준비한다. 학교가 아닌 학습관이라는 기형적인 교육 시설이 만들어졌지만 주민들의 호응은 뜨겁다. 채용민 PD

화천 간동고 김건우 학생이 지난달 14일 화천학습관 자습실에서 모의고사 문제를 풀고 있다. 학습관은 화천군에서 만든 일종의 ‘기숙 학원’으로 학생들은 이곳에서 숙식하며 입시를 준비한다. 학교가 아닌 학습관이라는 기형적인 교육 시설이 만들어졌지만 주민들의 호응은 뜨겁다. 채용민 PD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2020학번 박해인씨(21·가명)는 강원 화천 출신이다. 이달 초 기숙사 월 관리비 25만원을 냈고, 보름 뒤에는 새학기 등록금도 납부해야 한다. 박씨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화천군에서 지역출신 대학생들에게 대학 4년 등록금 전액과 최대 50만원까지 월세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그는 화천에서도 면 단위 농촌 마을인 간동면 유촌리에서 초·중·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에 진학하자 친구들이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인근 도시 춘천으로 빠져나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남은 친구들끼리 그런 얘기를 했어요. ‘다 떠나네. 다들 좋은 데로 가는구나.’ 유치원 때부터 함께 지냈던 친구들이 떠나니까 쓸쓸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화천군에 따르면, 학창 시절 화천을 떠나는 아이들의 비율은 2015년 기준 49.3%나 됐다. 10명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5명만 남아있다는 뜻이다. ‘대학 등록금 전액 지원 사업’은 청소년 자녀를 둔 세대의 유출을 막기 위해 화천군이 2019년부터 시작한 정책이다. 박씨는 “부모님도 걱정을 덜고, 저도 아르바이트를 무리하게 하지 않고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다. 화천에서 학교를 다닌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화천 간동면 유촌리는 면사무소와 초·중·고가 모두 모여있는 간동면의 중심지다. 가운데 보이는 운동장과 건물은 유촌초, 오른쪽 아래 운동장과 건물은 간동중·고. 채용민 PD

화천 간동면 유촌리는 면사무소와 초·중·고가 모두 모여있는 간동면의 중심지다. 가운데 보이는 운동장과 건물은 유촌초, 오른쪽 아래 운동장과 건물은 간동중·고. 채용민 PD

지난달 14일 찾아간 화천 간동면 유촌리는 면사무소와 초·중·고(유촌초, 간동중, 간동고)가 모두 모여있는 간동면의 중심지다. 인근 오음리, 도송리, 용호리, 간척리 아이들이 이곳으로 통학한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젊은 귀농인들이 끊이지 않던 마을이었다. “여기가 애호박 주산지거든요. 기온이 낮다보니 애호박이 무르지 않고 수확을 해도 다른 지역 애호박보다 2~3일은 더 유통할 수 있어요. 서울 가락시장의 도매법인은 간동면 애호박 하역 장소까지 따로 마련해두고, 내려놓자마자 제일 먼저 경매에 부치곤 했죠. 그 정도로 인기 있었어요.” 농부 오세건씨(56)의 말이다.

유촌리와 인근 마을 주민들은 영농조합을 만들어 마을의 농산물을 생산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애호박 매출만 연 10억원을 오르내렸다. 박해인씨의 부친 박기윤씨(54)도 2004년 이 마을로 귀농했다. “당시만 해도 귀농 인구가 많았어요. 해인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전교생이 100명 넘을 정도였으니까요. 마을에 학원이 없다보니 공부방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고요. 마을 캠프도 열어서 아이들과 2박3일 서울 여행도 다녀왔죠. 외국 학생들을 초청해서 함께 생활하는 국제 캠프를 열기도 했어요.” 젊은 부부들이 모였고 아이 교육을 고민했다. 마을 공동체가 활성화됐다. 유촌리의 전성기였다.

■‘호박탑’ 사라진 마을

하지만 이제 애호박 농사는 애물단지가 됐다. 화천읍은 물론 홍천·양구 등 인근 지역에서도 돈 되는 애호박 농사에 뛰어들면서 값이 폭락했다. 유촌리에서는 더 이상 애호박으로 대학 보내는 ‘호박탑’ 꿈을 꾸지 않는다. 중·고등학생 자녀 셋을 둔 함은영씨(53)는 담배 농사로 전향했다. 담뱃잎은 따는 시기를 놓치면 모두 폐기 처분해야 하는데, 간동면에만 담배 농가가 10곳이 넘다보니 담배 따는 시기가 겹쳐 매번 일손 부족 문제를 겪는다. 함씨는 “농사를 포기하고 타지로 나가야 하나 고민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고민하는 그를 붙든 건 화천의 정책들이다. “도시에서 대기업 다니는 사람들은 학자금이 다 나오잖아요. 자식 등록금은 걱정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농사를 지으니까 진짜 힘들어요. 아이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군청에서 대학 등록금을 지원한다고 하니까 그나마 마음 놓고 지역에 남을 수 있는 거예요.” 화천 출신 아이들을 위한 대학 등록금과 월세 지원금에만 한 해 32억원이 쓰인다. 화천군청 교육복지과 김상림 과장은 “주민들이 일을 계속하면서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기존의 일회성 소모 예산을 줄여서 감당하고 있다. 화천군 주민들이 군청으로 직접 장학금을 기탁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2004년 화천 간동면 유촌리로 귀농한 박기윤씨. 그가 유촌리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마을에는 젊은 귀농인들이 많았다. 박씨는 현재 화천현장귀농학교에서 귀농인들을 대상으로 농사 기술, 농기계 다루는 법 등을 가르친다. 채용민 PD

2004년 화천 간동면 유촌리로 귀농한 박기윤씨. 그가 유촌리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마을에는 젊은 귀농인들이 많았다. 박씨는 현재 화천현장귀농학교에서 귀농인들을 대상으로 농사 기술, 농기계 다루는 법 등을 가르친다. 채용민 PD

화천에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의 학교들은 여전히 폐교위기를 겪고 있다. 박기윤씨는 “농사로 돈을 벌기가 힘들어지면서 어린 자녀를 둔 30, 40대 귀농인들의 유입이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은퇴한 이들의 귀농 비율은 높아졌다”고 했다. 자연히 학교도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딸 박해인씨가 고3이었던 2019년 간동고 3학년 전체 인원은 14명이었다. 박해인씨는 “공부도 걱정이었지만, 애들이 한 명이라도 더 전학 가면 어쩌나 그 고민이 더 컸다”고 말했다. 한 학년이 14명인 고등학교에서는 1등을 하면 내신 1등급을 받지만, 13명인 학교에서는 1등을 해도 2등급을 받게 된다.

간동고 학생 수는 더 줄었다. 고3 전교생이 9명뿐이다. 1등을 해도 내신 2등급, 2등을 하면 3등급이 된다. 이 때문에 집 근처 간동고를 포기하고, 읍내와 가까운 화천고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생겼다. 간동면에서 읍내까지 가는 버스는 아침에 한 시간에 1대뿐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30분을 타고 간 뒤 10여분은 더 걸어야 학교에 도착한다. 화천에서 같은 면 단위 학교인 사내면의 사내중(학생 수 123명)이나 사내고(99명)는 사정이 낫다. 군 부대 근처이다보니 군인과 군인 가족, 상인 주민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 마을의 각종 기능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천군은 간동고 학생들의 학습을 돕기 위해 학교에 자기주도학습 강사 2명(수학, 영어)을 지원하고 있다. 춘천에 사는 수학 강사 출신 이지웅씨(47)는 매일 오후 6시부터 10시 반까지 간동고 상담실에 상주하며 학생들의 자기주도학습을 돕는다. “다들 공부하려는 의지도 있고 목표도 있는 아이들이에요. 애들이 다들 착해서 학교 선생님께 10개 물어볼 거 바쁘실까봐 다 묻지도 못하고 고민하다가 저한테 와서 물어보기도 하고요. 다만 기초가 부족한 아이들이 많아서 자기주도학습 4시간 반 동안 시간을 정해서 개인별로 맞춤수업을 진행하기도 해요.” 화천군은 고등학교가 없는 상서면 봉오리·산양리, 산골인 화천읍 풍산리에서는 청소년 공부방을 따로 운영한다.

화천학습관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 화천군 제공

화천학습관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 화천군 제공

■학원 대신 ‘학습관’

함은영씨의 아들인 간동고 1학년 건우(16)는 지난해 12월 화천학습관 입소 시험에 합격했다. 화천학습관은 화천군이 읍내 인근에 세운 일종의 ‘기숙 학원’으로 중3부터 고3까지 입소할 수 있다. 통상 학년당 25명 정도가 입소 시험을 보고 이 중 16명만 선발한다. 서울에서 온 언어, 수학, 영어, 진로 교사가 학습관에 상주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서울에 있는 탐구 영역 강사는 학습관 학생들을 상대로 실시간 온라인 수업을 진행한다.

학습관 1층 로비에는 이곳에서 공부하고 유명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의 합격증이 내걸려 있었다. 입시 학원이 거의 없는 화천에서 학습관 출신들은 화천 학부모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다.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읍내의 영어·수학 학원조차 ‘학습관에 몇 명을 합격시켰는지’를 홍보할 정도다.

화천학습관에서 학생들이 영어 수업을 듣고 있다. 화천군 제공

화천학습관에서 학생들이 영어 수업을 듣고 있다. 화천군 제공

화천학습관. 채용민 PD

화천학습관. 채용민 PD

건우는 일주일 중 6일은 학습관에서, 일요일은 집에서 지낸다. 학습관에서는 오전 9시부터 자율학습을 시작하고 오후 4시부터 수업을 듣는다. 수업은 오후 10시가 돼야 끝나지만 이후에도 자정까지 자율학습을 한다. 학교가 개학하는 3월부터는 학습관에 사는 간동중·간동고 학생들과 함께 화천군에서 제공하는 택시를 타고 등교한다. 하교할 때도 학습관까지 택시가 제공된다.

학교가 아닌 학습관이라는 기형적인 교육 시설이 만들어졌지만 주민들의 호응은 뜨겁다. 한 학부모는 “학교 성적이 나쁘지 않아서 아이가 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학습관에서 시험을 한번 치르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시골 아이들에게 맞춘 시험이 아니라 전국 모의고사 수준이거든요. 우리 애가 한참 모자라는구나, 도시 아이들 수준은 한참 높구나….”

자녀 둘을 학습관에 입소시킨 유촌리 주민 주은정씨(47)는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학습관을 첫 번째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 “중·고등학교부터는 대학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학교 수업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근처에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여기는 다들 농사를 짓기 때문에 도시 부모들처럼 대학 입시에 신경을 쓸 수도 없어요. 사교육비가 따로 들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이죠. 숙식 비용만 내면 되거든요.”

화천군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학생들이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서 해외 배낭연수를 다녀오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화천군 제공

화천군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학생들이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서 해외 배낭연수를 다녀오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화천군 제공

화천군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학생들이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서 해외 배낭연수를 다녀오는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친구들 5~6명이 모여 팀을 짜서 계획서를 만들고 선발되면 세계 어느 나라든 갈 수 있도록 비용을 지원한다. 보호자 1명이 동행하고, 해당 국가의 대학 캠퍼스에서 하루를 보내도록 했다. 김상림 교육복지과 과장은 “화천만 알고 있던 아이들이 자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깨닫고 돌아온다”고 설명했다.

화천군은 2017년부터 2026년까지 총 2427억원을 교육에 투자하는 중장기 계획을 세웠다. 화천 주민들의 교육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2020년 8월 한림대 산학협력단이 ‘화천군의 교육정책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68.8%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불만족’이라고 답한 주민은 전체의 5%에 불과했다.

농사짓기 좋아지면 다시 젊은 귀농인들이 늘고 학교도 살아날 테지만, 유촌리 주민들은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한때 잘나갔던 ‘간동 애호박’은 지난여름에도 판로가 없어 산지에서 폐기됐다. 유촌리에서 만난 한 토박이 마을 주민이 말했다. “농촌에서 먹고살 수 있어야 사람들이 들어오거든요. 기본이 뭐겠어요? 농사예요, 농사!” 근간인 농사가 살아나지 않으면 농촌의 작은학교도 끊임없이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주민등록인구 2만4105명. 전국 시·군·구 지자체 226곳 중 인구 순위로 221번째인 화천의 분투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시리즈 끝>


글 이재덕 기자, 사진 채용민 PD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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