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굴뚝농성 100일

“쌍용차 문제, 노동자도 자본·경영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 있어”

평택 | 김지환 기자

101일째 굴뚝서 내려오는 이창근씨, ‘글 스승’ 홍세화 대표와 영상 대화

21일 오후 4시 경기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내 70m 높이 굴뚝 위에서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경기도 전역에 미세먼지 주의보가 발령됐지만 이 실장 움직임은 또렷하게 보였다. 그의 손짓은 22일로 100일째를 맞는 굴뚝농성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평택공장에 막 도착한 홍세화 장발장은행 공동대표를 향하고 있었다.

홍 대표가 화답으로 보내는 손짓에는 반가움과 걱정스러움이 포개져 있었다. 홍 대표는 이 실장의 ‘글 스승’이다. 현장 활동가였던 이 실장이 몇해 전부터 외부에 발표하는 글을 보며 간결한 문체가 되게 조언해준 사람이 홍 대표였다. 이 실장은 고공에서 하루하루 하고 있는 고민부터 회사를 보는 심경 변화까지 홍 대표에게 담담하게 풀어냈다. 두 사람 간 대화는 아이패드 영상통화를 통해 1시간 넘게 이어졌다.

홍세화 장발장은행 공동대표가 21일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99일째 굴뚝농성 중인 이창근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과 태블릿PC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김지환 기자

홍세화 장발장은행 공동대표가 21일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99일째 굴뚝농성 중인 이창근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과 태블릿PC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김지환 기자

▲ “처음엔 내가 약하구나 생각… 모순투성이 세상에 화도 나
80일 지나자 차분해졌다
수출·환경 고민 경영진에겐 우리 문제가 작을 수 있어”

▲ “원활한 교섭 진행 위해서 사측·옛 동료 믿고 내려가”
SNS에 23일 농성해제 밝혀

홍세화 대표(이하 홍) = 얼굴이 많이 그을린 것 같다.

이창근 실장(이하 이) = (선생님에게) 더 어울리는 모자가 있을 텐데…. 늘 아쉽다(웃음).

홍 = 머리도 빠지고 해서 모자를 쓰는데 (다른 걸) 찾아볼게. 가발을 쓰든지(웃음). 나는 높은 데를 올라가보지 못해 그런데 어때? 올라가면 겸손해진다잖아. 그런 게 있나.

이 = 처음엔 ‘내가 너무 약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올라오니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여길 못 올라와서 동료들이 많이 죽었나 싶기도 했다. 낮은 자세로 임했다. 그래야 공장 안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이해해줄 수 있으니 말이다. 공장 동료, 회사 사무·관리직의 마음이 바뀌어야 하니까. 법과 제도가 아니라 동료들 마음을 어떻게 얻을 것인지 생각을 많이 했다. 60일부터 80일 사이엔 세상이 만만하게 보였다. 다 허점투성이 같고 모순덩어리 같고 화도 많이 났다. 80일을 넘기니 다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좀 차분해졌다. 그 이유가 그들 탓이 아니라 내 탓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홍 = 앞으로 전망은 어때?

이 = 우선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에서 자본과 경영을 보는 시각이 바뀌었으면 한다. 노동의 시각에서 벗어나 이분들(자본과 경영) 입장에서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보고 싶다. 7년간 회계조작 문제, 26명 죽음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왜 상대 쪽에선 안 들었지? 경영진은 뭘 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경영진은 수출국가의 환율, 연비, 이산화탄소 배출 절감 등 많은 것을 보더라. 이 많은 것들 중 우리 문제가 작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홍 = 올라가서 보니 공장 전체가 보이고 그런 것 같네.

이 = 아까 말씀드린 차원에서 전망하면 쌍용차가 이번 계기를 통해 충분히 되살아날 수 있다고 본다. 티볼리 한 대가 잘 팔린다, 아니다라는 차원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우리도 새로운 가치를 내걸고 주장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고민을 하고 있다. 해고자 복직과 26명 희생자 대책뿐 아니라 자동차산업이 안고 있는 부품협력사 문제, 단가 후려치기 문제 등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도 싸운다고 깊이 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런 부분도 봐야 할 것 같다. 또 노동자 목소리를 낼 때 ‘당신은 계급을 몰라서 그래’라고 가르치듯이 이야기하는 방식을 성찰해야 한다. 이야기 듣는 사람도 바보 아니고 다 안다.

영상대화가 30분쯤 이어진 뒤 두 사람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이 실장은 땅에 있을 때도 ‘맞담배’를 피웠다며 이해를 구했다.

홍 = 책도 읽는가.

이 = 밑에서 책을 많이 올려주는데 책 제목만 보고 많이 읽진 못한다. 올라올 때 책 두 권을 가지고 왔다. 하나는 선생님이 예전에 추천하신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아내가 준 <헤르베르트 시선>이다. 그나마 헝가리 민중시인 아틸라 요제프의 시집은 계속 보는 편이다. 사유가 깊더라.

홍 = 잠은 얼마나 자나.

이 = 밤 12시쯤 눈 붙이는데 많이 자면 4시간이다. 잠이 잘 안 온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잠을 잘 못 잤단 얘길 듣고 이해를 못했는데 위에 있다보니 불안감이 있다. 동료들이 공장 밖 멀리 있어 혹시 일이 생기면 바로 와줄 수가 없다.

홍 = 제일 힘든 게 뭔지….

이 = 나를 힘들다고 보는 시선 자체가 힘들다. 힘들지 않냐, 이런 말이 힘들다.

홍 = 글을 어떻게 쓰고 있나.

이 =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보여주며) 올라올 땐 이 두 개는 꼭 챙겼다. 글을 써야 하니까.

홍 = 책도 많이 못 보는데 글은 잘 써지나.

이 = 힘들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우리를 잘 돌아보게 됐다. 노동자들이 쓰는 말과 글이 말도 안 되게 꺾여있다. 누군가 이야기를 하면 내용으로 비판해야 하는데 어떤 의도를 가졌을 거라고 보고 비판한다. 말과 글을 저렇게 하면 사고 자체가 비문이 된다.

홍 = 노동자 일반은 정치성이 너무 비어 있고 반면 노조엔 정치성이 강하게 걸려 있다. 비대칭성이 심하다. 전체 노동자의 정치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한 과제다.

이 = 큰 기어와 작은 기어가 맞물려 있다고 비유해보자. 작은 기어는 쫓아가야 하니 빨리 돌아야 한다. 노조는 큰 기어라서 천천히 돌아야 하는데 너무 빠르게 돌고 있다. 구석구석 보면서 가질 못하고 있다.

홍 = 글을 많이 써둬야겠네. 글은 이미 갖고 있는 걸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정리하는 과정이니까.

이 = 홍세화 선생은 (프랑스에서) 이 나라 들어온 뒤부터 의무가 있다. 장수의 의무다. 중의법인데 오래 사셔야 할 장수(長壽)의 의무다. 다른 하나는 장수(將帥)의 의무다.

홍 = (웃고 손을 흔들며) 고맙다. 화면으로라도 얼굴 보니 좋네. 글 잘 쓰고.

홍 대표와의 대화 다음날인 22일 밤 이 실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101일째 되는 23일 오전 10시30분 땅을 밟겠다. 굴뚝에 올랐던 마음처럼 최종식 사장님과 중역 그리고 사무관리직, 현장직 옛 동료만 믿고 내려간다. 제가 굴뚝에 올라 있는 것이 자칫 원활한 교섭 진행에 걸림돌이 되지 않나 싶었다”고 밝혔다. “3월24일은 쌍용차 주주총회다. 굴뚝에 올라 있는 저로 인해 그분들이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해고자들에게 피해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다”고도 했다.

그는 “최종식 사장님과 공장 안 사무관리직, 생산직 여러분을 깊이 이해한 100일이었다. 굴뚝사용료 땅 밟는 즉시 체크아웃하고 죄 있다면 받겠다”며 굴뚝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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