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
밭

로컬라이프

메일쓰기

서울 말고 로컬

“옛날에 비해서 지금은 변화가 너무 빠르잖아요. 누군가 지금 지역의 모습을 기록하지 않으면 몇 년 뒤에는 그것에 대한 흔적조차 남아있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지역의 모습을 아카이빙한다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로컬 매거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요.”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고선영 대표(45)는 제주에서 계간지 ‘인(iiin)’을 발행한다. ‘나는 지금 섬에 산다(I’m In Island Now)’는 뜻이란다. 그 이름대로 ‘인(iiin)’은 지금의 제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다. 서울에서 여행잡지 기자로 일했던 고 대표는 2011년 제주 산방산 아래 사계리 마을로 이주한 뒤, 2014년 4월 남편과 함께 ‘인(iiin)’을 창간했다. 부부가 지인들과 함께 시작한 매거진은 지난 여름 ‘30호’를 냈다. 지금은 직원 20여명에, 만여 부 정도 찍어내는 제주 대표 잡지가 됐다. ‘인(iiin)’ 에는 광고가 없다. 구독과 서점 판매 수익 등으로 8년을 생존했다.

제주에서 로컬 매거진 ‘인(iiin)’을 발행하는 고선영 대표 |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제공

제주에서 로컬 매거진 ‘인(iiin)’을 발행하는 고선영 대표 |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제공

‘인(iiin)’을 알린 8년 전 창간호의 주제는 ‘제주 고사리’였다. 제주에서는 3월 말 비가 내린다. 제주에선 ‘고사리 장마’라고 부른다. “봄만 되면 마을 사람들이 다 사라지는 거예요. 처음엔 꽃 구경을 가셨나? 했는데 몇 주 동안 사람들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마을에 있는 ‘삼거리 슈퍼’ 이모한테 ‘다들 어디 가셨냐’고 물었죠. 고사리를 따러 가셨대요. 제가 ‘나도 따러 가야겠다’고 하니까 그 이모가 ‘고사리 많이 나는 데는 며느리한테도 안 가르쳐 준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가 외지에서 온 저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신기하고 재밌게 보이더라고요. 제주의 고사리 이야기를 첫 호에 실었죠. 카페와 게스트 하우스 이런 곳들을 통해서 잡지를 소개하고 팔았는데 다 팔렸어요. 그게 잘 돼서 지금까지 잡지가 이어지게 된 것 같아요.”

고 대표는 “그렇게 지역을 파고(파헤치고), 판다(판매한다)”고 말했다.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문헌에 나온 제주 이야기 한 줄, 제주의 길거리에서 마주친 것들이 잡지의 시작이 된다. 그는 “저희에겐 ‘할망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웃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은 글감이 된다는 얘기다. 한국전쟁 직후 제주에 온 아일랜드의 카톨릭 사제와 수녀들이 제주 주민들과 함께 만든 스웨터 회사 ‘한림수직’ 이야기와, 스물 다섯 살에 한림수직에 입사해 예순 한 살에 퇴직한 이봉선 할머니의 인터뷰가 지난해 ‘인(iiin)’ 봄호에 커버스토리로 실렸다.

제주 ‘한림수직’에 대해 다룬 ‘인(iiin)’ 2020년 봄호(왼쪽)와 재주상회의 ‘사계생활’에서 진행된 ‘한림수직’ 전시회 |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제공

제주 ‘한림수직’에 대해 다룬 ‘인(iiin)’ 2020년 봄호(왼쪽)와 재주상회의 ‘사계생활’에서 진행된 ‘한림수직’ 전시회 |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제공

제주 할머니들이 독자들의 고민거리를 상담해주는 ‘할망에게 고나봅서(할머니에게 말해보세요)’는 ‘인(iiin)’에서 가장 인기있는 코너 중 하나다. “제가 성숙한 연애를 할 수 있을까요?”라는 20대의 질문에 할머니는 “성숙한 연애가 어디서(어디있어)? 남자든 여자든 계산 안하고 연애하는 사람이 어디 시니(있니)? 이제 할망이주만, 계산 어신(없는) 홀아방 이시민(있으면) 호나(하나) 소개허라. 성숙한 사랑이 있을 수도 있고, 계산 없는 사랑이 있을 수도 있지만, 사랑에 정의가 어디 시니게?”라고 말한다. “경제적으로 노년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30대 직장인 고민에는 “놈(남) 못 살게 하지 않으면 노후에 욕먹을 일 없고, 돈 많이 있으면 걱정도 많다. 다 살기 마련이야. 내일 생각 말고 오늘을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내일이 나타나. 그게 희망.”이라고 말해준다. 할망들의 이야기가 ‘인(iiin)’ 독자인 MZ 세대의 공감을 사는 것에 대해 고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윗세대의 이야기 자체가 고리타분한 게 아니거든요. 그동안 이분들의 이야기를 고리타분한 방식으로만 보여주다보니 고리타분하다고 느껴지는 거죠. 할머니들이 가진 다양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예요. 지금 시대의 언어로 잘 가공해서 보여주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도 충분히 흥미를 느낄 수 있죠.”

재주상회 사무실과 여행자들을 위한 ‘코워킹 스페이스’가 있는 제주 안덕면 사계리 ‘사계생활’ 모습, 마을 소유의 옛 농협 건물을 빌려 운영한다. |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제공

재주상회 사무실과 여행자들을 위한 ‘코워킹 스페이스’가 있는 제주 안덕면 사계리 ‘사계생활’ 모습, 마을 소유의 옛 농협 건물을 빌려 운영한다. |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제공

재주상회는 사계리 마을 소유의 옛 농협 건물을 빌려 ‘사계생활’이라는 마을 여행자를 위한 ‘코워킹 스페이스’를 운영한다. 제주를 주제로 여러 작가들이 디자인해 만든 ‘굿즈’와, 재주상회가 제주 농부·어부들과 협업해 만든 로컬식품 가공품 등을 판매하기도 한다. 잡지를 정기구독하는 독자에게는 ‘가파도 청보리와 뿔소라로 만든 리소토’ ‘감귤 국수’ ‘제주 구엄닭 백숙 밀키트’ 등 제주에서만 나오는 제철 음식들을 보내주는 ‘계절제주’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다. “매거진 자체로는 수익이 나지 않거든요. 그래서 ‘외주’를 받아 일도 하지만, 우리 콘텐츠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매거진의 콘텐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가공해서 보여주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할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제주의 택시투어를 다룬 2021년 여름호 내용 |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제공

제주의 택시투어를 다룬 2021년 여름호 내용 |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제공

그는 “지역에 내려가서 정착을 잘 하려면 지역의 정체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재주상회가 2019년 봄과 2020년 가을에 사계리에서 ‘산방산 아트앤북페어’라는 행사를 연 것도 같은 취지다. 당시 재주상회는 제주 주민과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계리와 제주의 자원들을 전시하고, 사계리의 길을 걷는 여행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사계리의 전·현직 이장님들이 ‘마을 도슨트’가 돼서 사계리를 알리는 프로그램이에요. 이장님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에 전시된 작가들의 작품과 제주의 책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누구네 집 뒷마당에 들러 제주 빙떡 같은 것도 먹어보도록 하고요. 길을 따라 바닷가에 도착하면 바닷가에선 마을의 요가 스튜디오 선생님과 함께 명상하고 스트레칭 해보는 프로그램이었죠. 마을 분들이 꽤 많이 참여하셨어요.”

고 대표는 “더 많은 지역에 로컬 매거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의 지역을 기록하고 아카이빙 한다는 의미에서 로컬 매거진은 거의 모든 지역마다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약간 의무감 같은 것도 있는데, 재미있기도 해요. 지역에서 로컬 매거진을 시도하는 분들이 너무 힘들지 않게 이 일을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글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이런 기사 어떠세요?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