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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을 너무 깊이 심었어요. 흙에 꽂아만 놓는다는 느낌으로 심어야 해요. 다시 심어주세요.” 충남 홍성에서 단호박 농사를 짓는 농부가 김만이씨(35)와 동료들에게 단호박 모종 심는 법을 가르친다. 김씨는 밭에 심은 단호박 모종 한 줄을 들어내고 다시 얕게 심었다. 양배추 농가에선 김씨가 일을 돕다가 모종 뿌리가 다치는 일도 벌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아침 농사를 마치면 농부들과 함께 참을 먹는다. 하루 반나절을 농민과 보내면서 이들의 하소연도 듣는다. “작년 봄엔 양배추가 전부 요만해서 한 20% 버렸나? 잘 될 때도 있는데 안되면 출하할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될 때도 있어요”(노원호 농부), “예전에 단무지용 무를 13만평의 땅에 심었는데 10㎝ 정도 자랐을 때 태풍이 왔어요. 그때 까먹은 돈이 어마어마하죠. 억대였으니까…”(강승식 농부)

홍성의 유기농 밀키트 스타트업 ‘초록코끼리’ 김만이 대표(왼쪽)가 홍성유기농영농조합 조대성 대표와 유튜브 영상을 촬영하고 있다. | 초록코끼리 제공

홍성의 유기농 밀키트 스타트업 ‘초록코끼리’ 김만이 대표(왼쪽)가 홍성유기농영농조합 조대성 대표와 유튜브 영상을 촬영하고 있다. | 초록코끼리 제공

김만이씨는 홍성 장곡면의 밀키트 스타트업 ‘초록코끼리’의 대표다. 장곡면과 인근 지역의 유기농 농산물을 이용해 ‘버섯두부전골’ ‘목살스테이크’ ‘감바스’ 등의 밀키트를 만든다. 김씨는 오전에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 밀키트 농산물을 제공하는 농가의 일을 돕는다. 농민들과 유튜브 영상을 함께 만들기도 한다. 김씨가 직접 ‘홍유맨(홍성의 유기농을 알리는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농사일을 잘 하지 못해 실수를 연발하는 장면이 영상의 포인트다.

‘초록코끼리’ 김만이 대표가 홍성유기농영농조합 양파밭에서 일하고 있다. | 초록코끼리 제공

‘초록코끼리’ 김만이 대표가 홍성유기농영농조합 양파밭에서 일하고 있다. | 초록코끼리 제공

그는 몇 년 전만해도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연구원이었다. 연구원에서는 자유무역협정(FTA) 분야를 맡아 FTA 이후 농·축산물 교역 데이터 등을 분석하는 일을 맡았다. 김씨는 “농촌 현장에 가고 싶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 것에 괴리감을 느꼈다”고 했다. 연구원을 그만두고, 농촌 컨설팅을 하는 민간 연구기관에서 충남 청양 지역의 빈 공간을 활성화하는 사업을 맡았다. 청양 청년들과 함께 청양고추를 이용한 ‘청양버거’를 만들어 야시장에서 팔고, 마을의 빈 공간을 활용해 청년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었다. “도시 사람들은 농촌을 희망없고 무기력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지역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느꼈던 농촌은 오히려 ‘힘’이 굉장히 센 곳이었어요. 자기만의 철학을 가진 농민도 많았고 마을 주민들의 자생력도 강했고요. 도시보다는 인프라가 적을 수는 있지만, 농촌에는 활용할 수 있는 자원들이 많아요. ‘뭔가를 해보기에는 농촌이 더 좋은 공간일 수 있겠구나’ 확신이 들었어요.”

마을 할머니와 함께 모종을 심고 있는 모습 | 초록코끼리 제공

마을 할머니와 함께 모종을 심고 있는 모습 | 초록코끼리 제공

그는 지난해 지인들과 함께 청양 인근의 홍성 장곡면에서 밀키트 사업을 시작했다. ‘초록코끼리’에는 김 대표를 포함해 5명의 임직원이 있다. 그는 “순박하지만 생태계의 강자인 밀림의 코끼리처럼, 우리 농업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홍성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농부들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매일 농장에 와서 일하고 배우는 모습이 좋아 보이셨나 봐요. 한 농가가 다른 농가를 소개해주고, 그 분이 또 소개를 해주시고…. 이제는 지역 분들은 저희를 웬만큼 아시고요. 일이 있을 때는 저희에게 미리 연락을 주시기도 해요. 조금씩 네트워크를 쌓아가고 있어요.”

초록코끼리는 이들 농장에서 나온 채소와 축산물들을 이용해 제품을 만든다. 목살스테이크 밀키트에는 ‘젊은협업농장’의 유기농 샐러드 채소, ‘다농농장’의 자연방사 유정란, ‘정다운농장’의 로즈마리 등이 담기고, 버섯두부전골 밀키트에는 ‘홍성유기농영농조합’의 우리콩 두부, 양현모 농부의 표고 버섯, 홍성 이경자 명인의 조선간장 등이 들어가는 식이다.

초록코끼리의 밀키트. | 초록코끼리 제공

초록코끼리의 밀키트. | 초록코끼리 제공

친분이 생긴 농가들이 밀키트에 들어가는 소량의 채소들을 “그냥 따가라”며 내어주는 경우도 있다. “제가 가진 연구원 커리어가 이곳에선 전혀 소용이 없더라고요. 힘이 세서 현장의 무거운 일들을 도맡아 하는 그런 인력도 아니고요. 농민들을 만나며 지역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저희는 농부님과 논의할 일이 있으면 농부님의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쌈채소를 같이 따면서 대화를 해요.”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그는 어떤 목표를 갖고 있을까. 그는 “평가절하된 농촌의 가치를 제대로 비추고 보여주는 회사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첫 사업으로 ‘밀키트’를 시작한 것도, 도시 사람들이 농촌을 만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아이템이라고 생각해 시작한 일이에요. 수익적인 측면도 고려하면서 저희의 비전도 지켜갈 수 있는 다른 사업 아이템들을 계속 찾아나가고 있어요. 지금은 밀키트 뿐 아니라, 농부님들의 농산물을 판매하는 일도 시작했어요. 홍성에는 저와 생각이 비슷한 다른 청년 창업가들이 많이 있어요. 이들과 협업하는 프로젝트도 구상하고 있어요.”


글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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