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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일기⑤

텃밭에 흰 알갱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마치 굵은 소금을 뿌린 듯 하다. 9월 30일 촬영

텃밭에 흰 알갱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마치 굵은 소금을 뿌린 듯 하다. 9월 30일 촬영

“뭐야? 어떤 놈이 텃밭에 소금을 뿌렸어?”

텃밭에 심은 배추 주변으로 흰 알갱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밭에 소금과 락스를 뿌리면 고추 탄저병을 막을 수 있다’는 엉터리 유튜버들의 ‘가짜 뉴스’ 영상이 돌고 있던 터라 덜컥 겁이 났다. 우리 애들 다 말라 죽겠네. 사색이 돼 하얀 알갱이들을 걷어내려는데, 어라, 소금이 아니다. 옆 텃밭 들깨에서 떨어진 들깨꽃이다.

옆 텃밭에 핀 들깨꽃. 9월 30일 촬영.

옆 텃밭에 핀 들깨꽃. 9월 30일 촬영.

옆 텃밭은 들깨를 늦게 심었는지 이제서야 꽃이 피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텃밭들은 이미 지난달부터 들깨 씨가 영글고, 잎들이 누렇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며칠만 더 지나면 성인 키만큼 큰 들깨들을 잘라내 말리는 텃밭러들도 볼 수 있을터다. 그때 쯤이면 우리 배추들도, 옆 텃밭 들깨의 긴 그림자에서 해방될 수 있겠지···. 탕수육에 ‘부먹파’와 ‘찍먹파’가 있다면, 깨에는 ‘참기름파’와 ‘들기름파’가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향 진한 참기름이 더 좋다고 말할지 몰라도, 내겐 값싼 들기름이 최고다. 어릴 땐 어머니가 들기름을 바른 김에 소금을 뿌리면, 뿌리는 족족 김을 찢어 먹는 게 낙이었다. 물론 요즘은 우리 어머니도 구운 김을 사서 드시긴 하지만···. 두부를 부칠 때나 미역을 볶을 때도 들기름으로 하면 맛이 배가 된다. 참깨와 들깨는 같은 ‘깨’로 불리지만, 전혀 다른 과(科, Family)이다. 기름도 짜고 깻잎도 먹을 수 있는 들깨에 왜 ‘참-’이라는 접두사가 안 붙고, ‘들-’이 붙었는지 이상할 정도다.

수확을 앞둔 들깨. 잎이 누렇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9월 30일 촬영

수확을 앞둔 들깨. 잎이 누렇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9월 30일 촬영

30~40년 전에는 농가마다 토종 들깨를 심었지만, 이제는 농가마다 깻잎을 생산하는 들깨 종자와, 기름을 짜는 들깨 종자를 따로 구해 심는단다. “나도 아는 사람이 좋다고 해서 신품종으로 바꿔다 1년을 해봤슈. 근데 (기름을 짜면) 맛이 없어.”(책 <우리동네 씨앗도서관> 중에서, 충남 홍성의 서용숙 할머니 말씀).

깜깜한 밤에 남대전에서 충남 금산으로 이어지는 37번 국도를 타고 가면 불 밝힌 비닐 하우스 수십 동을 만날 수 있는데, 바로 들깨를 전문으로 키우는 금산 추부면 깻잎 농가들이다. 인공적으로 불을 밝혀 꽃피는 것을 막고 깻잎만 생산한다. 수십 년 새 농가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내년에는 토종 들깨를 구해 텃밭에 심어보고 싶다.

이웃 텃밭에 심어진 메리골드. 메리골드는 자연농법을 하는 농부들이 ‘경계 작물’로 많이 심는 꽃이다. 9월 30일 촬영

이웃 텃밭에 심어진 메리골드. 메리골드는 자연농법을 하는 농부들이 ‘경계 작물’로 많이 심는 꽃이다. 9월 30일 촬영

도시 텃밭 농장 안에 있는 이웃 텃밭들을 돌아다니다보니, ‘메리골드’와 ‘코스모스’ 같은 꽃을 채소와 함께 심은 텃밭도 있었다. 발 디딜 틈도 없게끔 촘촘하게 작물들을 심은 나로선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저런 여유는 도대체 어디서 나올까. 꽃을 심은 텃밭들은 어김없이 채소 농사도 잘 짓는다. 특히 메리골드는 자연농법을 하는 농부님들의 텃밭에 가면 ‘경계 작물’로 많이 심는 꽃이다. 메리골드의 향기가 벌레들을 쫓는다. 차로 만들어 마시면 눈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1.5~2m 높이로 텐트 모양의 ‘삼각 지주’를 세워서 덩굴 식물 호박을 키우는 신공을 보여주는 텃밭러들이 있다. 9월 30일 촬영

1.5~2m 높이로 텐트 모양의 ‘삼각 지주’를 세워서 덩굴 식물 호박을 키우는 신공을 보여주는 텃밭러들이 있다. 9월 30일 촬영

지자체가 운영하는 도시 텃밭 농장에서 금지된 작물도 있다. 대표적인 게 호박 같은 덩굴 식물이다. 덩굴이 자라면서 이웃 텃밭에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고수는 있다. 1.5~2m 높이로 텐트 모양의 ‘삼각 지주’를 세워서 호박을 키우는 신공을 보여주는 텃밭러들이 있다. 다만 그림자가 생겨 옆 텃밭 작물들의 생장을 방해한다. 호박 키우는 텃밭러를 이웃으로 두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경기 양평의 농부님이 가꾼 200평 텃밭. 내 텃밭의 67배쯤 된다. 8월 7일 촬영.

경기 양평의 농부님이 가꾼 200평 텃밭. 내 텃밭의 67배쯤 된다. 8월 7일 촬영.

경기 양평 농부님 텃밭에 있는 이동식 닭장 ‘치킨 트랙터’. 8월 7일 촬영

경기 양평 농부님 텃밭에 있는 이동식 닭장 ‘치킨 트랙터’. 8월 7일 촬영

전문가가 가꾸는 텃밭은 얼마나 다를까. 8월 초 경기 양평에 사는 한 농부의 집에 갔는데 텃밭만 무려 200평. 내 텃밭의 67배쯤 된다. 옥수수, 깨, 오크라, 루콜라, 파, 허브 등 갖가지 작물을 유기농으로 키운다. 밭이랑 경계마다 나무판을 덧대어 그 안에 흙을 채워 넣었다. 쪼그리지 않아도 허리만 굽혀 밭을 가꿀 수 있다. 고랑도 넓어서 지나다니기도 편했다. 이동식 닭장인 ‘치킨 트랙터’도 있었다. 닭 두 세마리를 넣고 풀이 많이 자라는 곳에 두면, 닭들이 풀을 쪼고 발로 땅을 헤집으며 풀을 없애는 ‘트랙터’ 역할을 한다. 알면 알수록 어렵고 심오한 게 텃밭농사다.

앞 텃밭은 배추를, 뒷 텃밭은 들깨를 심었다. 이웃 배추는 무릎 높이만큼 자랐는데 우리 텃밭 배추는 여전히 내 발 복숭아뼈 높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0월 5일 촬영.

앞 텃밭은 배추를, 뒷 텃밭은 들깨를 심었다. 이웃 배추는 무릎 높이만큼 자랐는데 우리 텃밭 배추는 여전히 내 발 복숭아뼈 높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0월 5일 촬영.

그런 텃밭들을 구경하고 우리 텃밭을 보니 처참하기 그지없다. 고추와 파프리카 열매마다 벌레가 먹어 구멍이 뚫렸다. 고추와 파프리카는 서리가 내릴 때까지 두려고 했는데, 결국 지난 주말에 다 뽑아 버렸다. 이웃 텃밭 배추는 무릎 높이만큼 자랐는데, 우리 텃밭 배추는 여전히 내 발 복숭아뼈 높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무가 제법 자랐다. 올해 김장은 배추 아닌, 무로 할 듯 싶다.

지난 월요일 저녁 장모님이 어른 허벅지만한 무를 시장에서 사오셨다. 500원이란다. 아니, 종묘상에서 구한 무 모종이 하나에 300원인데, 어떻게 저 굵은 무가 500원이란 말인가!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농부를 했다면 아마 일찌감치 망했을 거야.”

텃밭 무가 제법 자랐다. 10월 5일 촬영.

텃밭 무가 제법 자랐다. 10월 5일 촬영.


글·사진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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