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의 세계에 뛰어들려거든 “몸부터 만들어라” 선배의 찐 조언

성우제

성우제의 ‘경계인’

캐나다 공영방송 CBC에서 방영한 드라마 <킴스 컨비니언스>(한국 제목: 김씨네 편의점)의 한 장면. 20년 전까지만 해도 토론토에서 ‘가게’는 ‘편의점’을 의미할 만큼 많은 한국인들이 편의점업에 종사했다. 지금은 그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캐나다 공영방송 CBC에서 방영한 드라마 <킴스 컨비니언스>(한국 제목: 김씨네 편의점)의 한 장면. 20년 전까지만 해도 토론토에서 ‘가게’는 ‘편의점’을 의미할 만큼 많은 한국인들이 편의점업에 종사했다. 지금은 그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한국에서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이 대거 자영업에 뛰어든다는 소식이 요즘에도 계속 들려온다. 비록 다른 나라에 살고 있지만 자영업 종사자인 나에게는 남 얘기 같지가 않다. 특히 얼마 전 한국 정치권에서 불거진 이른바 ‘식당 총량제’ 관련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특별한 무기(기술이나 연줄)도 없고 저축한 목돈도 없다면 어떻게든 밥벌이를 해야 하는데 여러모로 만만해 보이는 것이 자영업이다. 이는 캐나다나 한국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한국에는 자영업으로 내몰리다시피하는 명예퇴직자들이 많다 하고, 캐나다에는 한 해 30만명 가까이 들어오는 이민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영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별다른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오랫동안 언론사에서만 일했던 나로서는 자영업 종사 외에는 달리 살아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진 특기와 경력으로는 캐나다에서 직장다운 직장을 찾기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가게를 열고 운영해온 지 올해로 16년째이다. 그동안 생활을 하는 데 별지장이 없을 만큼 벌었다면 자영업자로서 실패는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는데, 내 경우에는 행운이 많이 따랐던 것 같다. 고비 때마다 ‘선생’들이 있었다. 넓게 보자면 도처에 선생들이 있었다. 나보다 앞서서 자영업으로 자리 잡은 모든 이들이 내게는 선생이었다. 나는 기자 출신답게 기회만 생기면 질문을 했다.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토론토 16년차 자영업자 되기까지
실패 막아준 금과옥조를 전한다

“몇년은 그냥 놀면서 사정을 봐라”
“육체노동 할 근육부터 만들어라”
무성의한 조언 같지만 뜻이 있다

최저 시급 알바 ‘헬퍼’부터 시작해
살 만한 가게 보는 눈 키우기까지
2년간 가져온 돈을 까먹고나서야
비로소 내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캐나다행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 서울에서 회사 선배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젊은 시절 미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변호사로 일을 하는 선배였다. “캐나다 사회에 적응할 때까지 몇 년간 교포신문 기자로 일하는 것도 괜찮겠지요?”라고 말했다가 뜻밖에도 야단을 맞았다. 나로서는 동의를 구하는 질문이었으나 선배는 정색하며 말했다. “그럴 생각이면 지금이라도 가는 거 포기해라.” 그렇게 안이하게 시작했다가는 언제까지고 연명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자영업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처음부터 정면승부를 해야 빨리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막상 토론토에 도착해 보니, 한마디로 막막했다. 자영업, 그 가운데서도 베이커리카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으나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사는 사람들은 “몇 년 그냥 놀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라”고들 했다. 가진 돈 까먹으며 놀라고 하는 것이 무성의한 조언처럼 들렸으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뜻밖에도 모두 진지했다. 대기업 출신으로 나보다 10년 먼저 뉴욕에 가서 살던 가까운 친지도 같은 말을 했다. 그이는 친지답게 한두 마디 덧붙였다. “육체노동을 할 수 있는 몸부터 만들어라.” 방법이 뭐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을 내놓았다. “일단 네가 하려는 업종에 들어가서 최저임금 받으며 일을 해라. 그곳은 너한테 학교나 다름없다. 임금은 장학금이라 생각해라. 돈 받아가며 몸 만들고 일을 배우니 얼마나 좋은 곳이냐.”

당시에는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면 이런 말들은 금과옥조였다. 월급쟁이만 하던 사람에게 자영업의 세계는 정글 혹은 지뢰밭이나 다름없다. 한국이나 캐나다나 그 환경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들었던 그런 조언들 덕분에 나는 큰 위험을 피해갈 수 있었다.

내가 들고 온 자금이라고는 서울에서 아파트를 처분한 돈과 퇴직금이 전부였다. 그 돈을 ‘털어먹으면’ 가족이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처지였다. 한국에서의 학력이나 경력, 인맥, 친지 같은 것들이 기득권이었다는 사실은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대학 동창 모임에 나갔더니, 그곳에서 처음 만난 선배들 또한 선생이 되어주었다. “여기서 뭘 해서 먹고살 거냐?”며 궁금해들 했다. ‘한글로 글쓰는 기술’밖에 없는 후배이고 보니 궁금증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한테 들은 말밖에 내놓을 것이 없었다. “커피점이나 빵집 헬퍼로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헬퍼란 요즘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최저 시급 알바’이다. 그 말을 들은 선배들은 말했다. “너는 곧 자리 잡겠다.” “너는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당시에는 그분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나로서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었다.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는 말에 한껏 고무되기는 했다. 두어 달쯤 놀다가 한인신문 구인광고란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헬퍼를 구한다는 광고가 업종별로 나와 있었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빵과 커피 관련 업종은 보이지 않았다. 가장 비슷한 것이 샌드위치숍이었다. 남성을 찾는다는 곳이 없어서 ‘여성’을 구한다는 가게들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한 곳에서 “여자 일은 맡길 수 없고 마침 배달하는 남학생이 그만두려는 참인데, 그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곳에서 내가 주로 한 일은 도심에 있는 큰 은행 등에 샌드위치를 배달하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100명이 넘는 사람이 모인 회의장에도 배달했고, 대여섯 명이 점심을 먹어가며 회의를 하는 곳에도 샌드위치와 음료를 갖다주었다. 캐나다의 가장 큰 신문사에도 배달을 나갔다. 시간을 아끼려고 점심시간에 샌드위치를 먹으며 편집회의를 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한국 같으면 짜장면 먹어가며 회의를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실제로 몸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육체노동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되고 힘들었다. “너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는 말을 믿고 시작했는데, 당장 내 몸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허리 통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느 날 아침에는 침대에서 내려올 수도 없을 정도로 아팠다.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가게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아서, 벽에 손을 짚고 일어나 기다시피하며 나가야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주인은 허리에 차는 ‘복대’를 내주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처음에는 다 겪는 일이에요” 하면서. 그이 역시 선생이었다.

한국에서는 늘어나기만 하던 몸무게가 헬퍼 생활 몇 달 만에 6㎏이 빠졌다. 몸으로 하는 일에 요령이 생겼고 무엇보다 ‘장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어깨 너머로나마 조금 배웠다. 설거지에도 익숙해졌고 양파, 당근, 감자를 깎는 일도 손에 익었다. 무엇보다 이런 일에 대한 거부감을 없앤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헬퍼를 하면서 버는 돈은 정말로 장학금 같았다. 그것으로 아파트 렌트비 정도는 낼 수 있었다.

6개월 후 샌드위치숍의 경력을 인정받으며 베이커리카페 헬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을 때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좋았다. 내가 하기를 원하던 업종인 데다 빵과 커피로 유명한 가게였기 때문이다. 오전 5시에 출근해 오후 1시에 퇴근하면서 빵 굽는 일을 주로 했다. 샌드위치숍보다 힘이 들었으나, 시스템이 잘 갖춰진 곳이어서 배울 것이 많았다. 내가 가장 분명하게 배운 사실은 ‘내가 베이커리카페를 창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한두 해 빵 굽는 경험을 한다고 해서 곧바로 창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되는 가게를 권리금 주고 사서 운영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를 고용한 베이커리카페 주인도 그랬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일을 하면서 권리금을 주고 살 가게를 찾아다녔다. 눈에 들어오는 곳이 별로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내가 찾는 업종의 가게가 나타나지 않아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하는 편의점과 과일채소 가게에까지 범위를 넓혀서 보기 시작했다.

가게를 판다는 광고를 보면, 직접 가거나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방문해서 주인이 하는 말을 들었다. 권리금이 수만달러(몇천만원)에서 수십만달러(수억원)까지 하는 여러 가게를 구경했다. 이런 식으로 몇 년 동안이나 ‘비즈니스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들 했다. 애초에 “몇년간은 그냥 놀아라”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시간을 두고 매물(가게)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보는 눈을 만들어야 실수를 덜 한다고 했다. 그 세계를 잘 모르고 덥석 뛰어들었다가 모든 것을 날리는 것보다는, 돈을 조금씩 까먹어가며 좋은 가게를 찾는 것이 훨씬 안전한 길이었다.

관심이 가는 가게가 눈에 띄면, 일차로 방문을 한 다음 가게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주인 모르게 며칠 지켜보기도 했다. 손님이 몇 명이나 드나드는지, 어느 시간에 많이 오는지를 파악하고, 팔려는 사람이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가 비교했다. 가게를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른바 ‘좋은 가게’는 광고로 나오지도 않고 ‘알음알음’으로 거래된다는 것도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주인이 곧 은퇴를 하는 가게들을 눈여겨보라”고 한 사람도 있었고, “가게는 덜 속고 사면 된다”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즈음 대학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어느 선배를 만났다. 토론토에서 가게를 여러 개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선배였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었다. “저처럼 가게를 처음 하려는 사람한테는 권리금이 비싼 가게가 좋을까요, 싼 가게가 좋을까요?” 권리금이 작은 가게를 사서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예상 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초보자일수록 비싼 권리금을 주고 좋은 가게를 사는 게 훨씬 수월하고 안전하지. 비싼 가게는 그만한 돈값을 한다는 얘기야. 권리금 싼 가게 사서 키운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아. 그건 우리 같은 선수들도 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이 말 또한 큰 보탬이 되었다. 초보자라고 권리금 싼 가게를 사서 들어갔다가는, 권리금을 날리는 것은 물론이고 몸 고생에 마음고생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이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밥벌이를 하지 못해 눈에 보이는 어떤 가게도 부러워하던 시절이었다. 급한 마음에 앞뒤 안 가리고 덥석 인수할 수도 있었다. 내 가게를 시작한 직후 하루라도 매출이 크게 떨어지면 마치 피가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선배의 말을 듣지 못했더라면 매일 그랬을지도 모른다.

내가 내 가게를 찾은 것은 이민을 온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은행에 비즈니스 계좌를 만들려고 갔더니 직원이 말했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네요.” (2편에 계속)

▲성우제
[다른 삶]자영업의 세계에 뛰어들려거든 “몸부터 만들어라” 선배의 찐 조언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원(原)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16년째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의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다. 재외동포문학상을 두 차례(소설 및 산문 부문) 수상했고 <느리게 가는 버스> <딸깍 열어주다> 등 단행본 5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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