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경을 뒤로 한 채…내 아이를 뛰게 만든 마법 같은 공간

이대한

이대한의 연구실 가는 길

멘리헨 케이블카 승강장 앞에 자리 잡은 멋진 놀이터. 상상력을 자극하는 거대한 소 미끄럼틀과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 뒷편으로 융프라우 3대 봉우리가 빚어내는 장관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멘리헨 케이블카 승강장 앞에 자리 잡은 멋진 놀이터. 상상력을 자극하는 거대한 소 미끄럼틀과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 뒷편으로 융프라우 3대 봉우리가 빚어내는 장관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1. 주말을 맞아 가족과 함께 알프스로 하이킹을 떠났다. 기차를 타고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스위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인 그린델발트에서 융프라우 지역의 배꼽이라 불리는 멘리헨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발아래 펼쳐지는 초록빛 그린델발트, 그 오른편으로 펼쳐진 장엄한 잿빛 아이거 북벽을 감상하며 20분을 날아 마침내 목적지인 멘리헨에 도착했다. 케이블카 승강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나와 아내, 그리고 딸 레이의 입에서 모두 ‘우와’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와 아내의 탄성은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등 융프라우 지역 3대 봉우리를 비롯한 수천m의 고봉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절경 때문이었지만, 레이의 탄성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놀이터’였다.

멘리헨의 놀이터에는 우선 높이가 1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철제 소가 시선을 강탈했다. 풀을 뜯고 있는 형상의 소 조형물이 미끄럼틀임을 금세 파악한 레이는 신나게 소의 엉덩이 속으로 들어가 혀를 타고 내려왔다. 이어서 레이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그네와 시소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무리에 합류했고, 나와 아내는 그런 아이들을 자포자기한 듯 지켜보는 유모차 부대로 편입됐다. 자연스럽게 하이킹은 무기한 연기됐다. 하이킹 중간에 먹으려고 싸왔던 도시락도 결국 꺼내 먹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대로 신나게 새로운 놀이터를 탐험하고, 우리도 우리대로 경치를 즐기며 ‘힐링 타임’을 보냈기 때문이다.

오후에 구름이 몰려온다는 예보에 레이를 겨우 설득해 뒤늦게 하이킹을 시작했다. 3대 봉우리를 바라보며 융프라우의 관문 클라이네샤이덱까지 걷는 코스였다. 아이가 2시간 가까이 걸어야 하는 거리를 완주하지 못할까봐 유모차를 가져왔는데, 대견하게도 거의 모든 코스를 두 발로 걸어냈다. 덕분에 나는 배낭을 유모차에 싣고 가벼운 몸으로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산길이 유모차가 다닐 만할까 다소 걱정했는데, 비포장길이긴 해도 경사가 완만하고 길이 넓게 잘 닦여 있어서 큰 어려움 없이 유모차를 운행할 수 있었다.

아이거·묀히 등 3대 봉우리 보이는
융프라우지역의 배꼽 ‘멘리헨’ 여행
케이블카 내리자마자 흘러나온 탄성
아내와 난 그림같은 풍광에 놀라고
딸 레이는 승강장 앞 놀이터에 신나

‘노-키즈존’처럼 보이는 알프스 산
공동체 합의로 ‘포-키즈존’ 탈바꿈

보물 같은 곳에서 뛰노는 아이들
이 행복 느끼며 어떻게 성장할까

어마어마한 풍광을 감상하며 무사히 클라이네샤이덱에 다다랐을 때, 또 다른 놀이터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 레이는 놀이터로 달려가 그네에 올라탔다. 나는 맞은편에 위치한 산장의 야외 식당에 자리를 잡고, 감자전과 비슷한 ‘뢰스티’와 맥주를 주문했다. (신기하게도 이곳에서도 감자전처럼 뢰스티는 등산 후에 즐기는 ‘산 음식’으로 통한다.) 음식이 나올 때쯤 돌아온 레이는 피곤했는지 유모차에 스스로 들어가 눕더니 금세 곯아떨어졌다. 나와 아내는 여유롭게 ‘뢰맥’을 즐긴 후, 유모차에서 잠든 레이와 함께 산악열차를 타고 다시 그린델발트로 돌아왔다.

스위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린델발트의 동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레이의 모습. 뻔하지 않은 놀이터의 구성이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한다.

스위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린델발트의 동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레이의 모습. 뻔하지 않은 놀이터의 구성이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한다.

#2. 알프스의 명당 곳곳에 자리 잡은 놀이터는 나에게 스위스라는 국가의 수준을 짐작게 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상징이다. 사실 높고 험준한 산은 아이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노-키즈존’이나 다름없다. 그런 곳에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은 공동체의 합의와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 노-키즈존을 예스-키즈존을 넘어 포-키즈(for kids)존으로 만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이 나라가 얼마나 아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 생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는지가 ‘놀이터’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알프스의 놀이터는 스위스가 알프스를 건장한 성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모두의 알프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증표이다. 놀이터가 있다는 것은 그곳에 어린이들이 쉽게 접근 가능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수시간씩 등산을 할 수 있는 성인뿐만 아니라, 아직 걸음마를 떼지 못한 어린아이도, 보조기구의 도움 없이 보행이 힘든 노인도,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도 알프스의 웬만한 명소들은 일반열차, 산악열차, 케이블카 등 대중교통만으로도 충분히 접근 가능하다. 유모차나 휠체어로 다닐 수 있는 아름다운 트레일들도 적지 않다. 말하자면 스위스에서는 노-키즈존을 찾아보기 힘들며, 노-키즈존일 법한 곳조차도 포-키즈존으로 탈바꿈했다.

영·유아를 동반한 부모에게 유모차가 다닐 수 없는 곳은 ‘그림의 떡’ 혹은 ‘고행길’이 된다. 그렇기에 유모차를 끌고 여행을 다니면 자연스럽게 각 나라가 얼마나 약자를 배려하는지 판별할 수 있게 되며, 나에겐 그것이 그 나라의 ‘선진성’을 판단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컨대 스위스에선 여행을 다니다 계단을 만나면 어딘가에 있을 승강기나 우회로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 믿음에 배반당한 적은 지금까지 딱 한 번뿐이다.) 반면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를 여행할 때는 끊임없이 아내와 유모차 양쪽을 잡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스위스를 그리워했다.

서울에 살던 시절, 광화문역을 들를 때면 장애인단체들의 천막 농성장을 지나치곤 했다. 처절한 절규가 담긴 현수막과 포스터를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지만, 돌이켜보면 철저히 ‘타자’의 시선에서 응원의 마음을 보냈던 것 같다. 동정심을 느끼고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에겐 어디까지나 ‘남 일’ 같았다. 그때까지는 휠체어를 막아서는 계단과 좁고 거친 길들이 몇 년 뒤 나 또한 멈춰 세울 것임을 짐작하지 못했다. 휠체어가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길과 승강기가 만들어지면, 나를 포함한 무수히 많은 유모차 운전자들 또한 그 혜택을 함께 누린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놀이터 또한 마찬가지다. 놀이터는 아이를 위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알프스의 멋진 놀이터들은 그 단적인 예이다. 아이들은 신체 조건이 다를 뿐만 아니라 취향도 다르다.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거닐며 ‘힐링’하는 것은 어른의 취향이다. 아이들은 대체로 그런 정적인 ‘힐링’을 선호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건 너무 ‘심심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프스의 놀이터는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 같은 아이들에게 산을 힘들고 지루한 곳이 아니라 멋지고 재미있는 곳으로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공간이다. 그런 놀이터들 덕분에 나처럼 산을 좋아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산으로 쉽게 유혹하고 보상을 선사해줄 수 있다.

#3. 3년 동안 미국에서 닦아 놓은 삶의 터전을 두고 스위스로 이주하게 되었을 때, 아내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닥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독박 육아를 해야 하는 상황에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겹쳤다. 영어가 공용어로 쓰이는 연구소와 달리 아내의 생활반경에서는 불어를 못하면 불편함이 크기도 했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느라 힘들 법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는 지치기보다는 스위스 생활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한국이나 미국보다 사는 것이 힘들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기 때문이란다.

“자기는 스위스의 어떤 점이 좋아?”

“아이를 아이답게 키울 수 있는 것 같아.”

“‘아이다움’이 뭔데?”

“예를 들면 옷차림부터 다른 것 같아.”

“어떻게?”

“여기 아이들은 무조건 놀기 편하게 옷을 입는 것 같아.”

아내의 대답은 그야말로 ‘띵언’이었다. 한국에서 사 온 옷으로 레이를 ‘어른처럼’ 예쁘게 입히고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내심 뿌듯해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첫 하이킹을 가던 날, 레이를 너무 후줄근하게 입혀서 사진이 예쁘게 안 나온다며 아내에게 핀잔을 준 일도 떠올라 낯뜨거워졌다.

“여기선 비 오는 날에도 아이들이 다 전신 우비에 장화를 신고 밖에 놀러 나와.”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본분은 ‘즐겁게 노는 것’이지 ‘예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아내도 나와 마찬가지로 ‘비 오는 날=실내생활하는 날”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비가 내리든 말든 한결같이 밖으로 놀러 나오는 아이들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비 오는 날 흙탕물로 몸과 옷이 젖고 더러워지더라도 아이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용납되고 장려되는 이곳에서, 비는 불쾌한 조건이 아니라 자연이 선물하는 또 하나의 즐거운 놀잇감이 된다. (물론 대기오염이 없어서 비를 맞아도 괜찮다는 전제조건이 성립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여기에 있는 놀이터들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뻔한 놀이터가 아니라, 어른인 나조차도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단번에 파악하기 힘든 놀이터들이 많아. 주로 나무나 로프로 놀이기구들이 만들어져 있고, 모래나 톱밥이 깔려 있어 놀이가 더 풍성해지고 근육과 두뇌가 함께 발달할 수 있는 것 같아. 자연 친화적인 건 기본이고.”

지금까지 스위스에서 다녀본 수많은 놀이터를 떠올려보니 정말 그랬다.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나무와 로프로 만들어진 놀이기구들. 멘리헨의 소 미끄럼틀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형태. 그 작은 마법 같은 세계를 자유롭게 탐험하는 아이들. 놀이터는 아이들에게 재밌는 문제를 내고, 아이들은 그걸 머리로 몸으로 풀어내며 성장한다. 실내에서 책과 영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놀이터에서 이런 배움이 더 ‘아이다운’ 배움이 아닐까.

부모가 되어보니 행복의 기준이 ‘나’의 행복에서 ‘아내’와 ‘아이’의 행복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가족들이 행복하지 않은데 내가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보물처럼 심겨 있는 놀이터들은 내가 이곳에서 누리는 최고의 복지이다. 스위스에서의 남은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또 얼마나 멋진 놀이터들을 발견하게 될까. 그 놀이터들을 거치며 레이는 어떤 아이로 성장하게 될까. 한국에서 어린 조카를 키우고 있는 동생에게 바로 옆 아파트 단지에 멋진 놀이터가 들어서 있지만, 그곳에 ‘입주민 외 출입금지’라는 경고판과 비밀번호가 걸린 울타리가 쳐져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알프스의 놀이터들이 더 소중해진다.



[다른 삶]이 절경을 뒤로 한 채…내 아이를 뛰게 만든 마법 같은 공간

▶이대한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청춘과 박사학위를 맞바꿨다. 연구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었지만, 박사가 되었음에도 생명과 생물학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3년 동안의 연구를 마친 후, 대서양 건너 스위스 로잔대학에서 초파리를 해부하며 뇌의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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