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출근하는 언니들 "나는 내가 명함이에요. 내 자신이"

장은교 소통·젠더데스크

명함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겐 쉽게 주어지는 것, 누군가에겐 동경의 대상, 하루에도 수천장씩 뿌려지고 버려지는 것,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자리를 과시하는 것, 능력을 증명하는 것, 최소한의 안전장치, 이만큼 열심히 살아왔다는 위로. 한 장의 명함엔 여러 정보가 담겨있지만 그 사람의 진짜 이야기는 보여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평생 일한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고 싶었다. 그림자가 아니라 삶의 주체이자 진짜 일꾼으로 살아온 그들의 가치를 뽐내고 싶었다. 젠더기획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마지막 회는 ‘오늘도 출근하는 언니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환갑을 앞둔 50대 여성부터 70대의 시작과 함께 새 인생을 계획하는 여성까지 ‘명함만 없었던 여성들’은 오늘도 기꺼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2021년 12월  이선옥씨가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학교를 찾아 둘러보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2021년 12월 이선옥씨가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학교를 찾아 둘러보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학습코치 이선옥

이선옥씨(55)는 2019년 3월의 어느 날을 기억한다. 찬 바람이 불던 봄이었다. ‘맘시터’ 출근 첫날. 대형 고층 아파트 1층 현관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선옥씨는 벽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이게 나의 새로운 인생이구나. 앞으로 계속 남의 집 문을 두드리며 가야할 텐데… 얼마나 많은 문을 두드려야 할까.” 복잡했던 마음은 막상 아이를 만나자 사라졌다. 침착하게 여섯 살 아이, 아이의 엄마와 대화하며 상담을 시작했다. ‘학습코치 이선옥’의 인생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후 약 2년 동안 선옥씨는 맘시터로서 11명을 돌봤다. 논술학원의 프리랜서 강사가 됐고, 서울 영등포구 교육복지센터에서 이주민 가정 아이들과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다.

선옥씨는 2018년 말 남편과 헤어졌다. 남편은 도박 등으로 큰 빚을 진 뒤 잠적했다. 위자료 소송을 했지만 이미 모든 재산이 시아버지 명의로 넘어간 뒤라 소용없었다. 법적으로 결별하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선옥씨는 결혼 이후 늘 경제적으로 무능력했던 남편을 대신해 독서실과 보습학원 등을 운영했다. 선옥씨가 명함 한 장 없이 ‘내조’라는 이름으로 일하는 사이 남편은 독서실연합회, 학원연합회 등 여러 단체에서 직함을 맡아 명함이 두둑한 사람이 됐다. 그러나 이혼과 함께 선옥씨가 일궈 온 많은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선옥씨는 빈손이 됐지만, 딸은 “엄마가 ‘탈혼(결혼제도에서 벗어나는 것)’했다”고 표현했다. 울산에 살던 선옥씨는 딸과 아들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딸이 말했다. “엄마, 언제까지 나 퇴근하는 것만 기다리면서 살 거야. 나만 보고 살지 마.” 엄마의 능력을 잘 아는 딸의 따끔한 한마디였다. 선옥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구직사이트에 신청서를 올렸다.

50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자리는 제한적이었다. 맘시터 업무도 처음에는 등·하원(교)을 시켜주거나 간식챙겨주기 등 돌봄에 초점이 맞춰진 일이었다. 선옥씨는 독서치료사, 진로적성상담사, 한국어지도사 등 20여개 자격증과 대학 평생교육원 강사 등 꾸준히 쌓아 온 여러 경력을 활용해 ‘초등학생 학습코치’로 자신을 소개한 글을 쓰고, 필요한 이들에게 연락을 달라고 홍보했다. 역제안으로 선옥씨는 자신의 일을 만들었다. 선옥씨는 오전과 오후, 평일과 주말을 나눠 바쁘게 일한다.

선옥씨는 여전히 명함이 없다.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갖지 않았다. “만약에 ‘엄마’라는 명함이 존재한다면 저는 아주 크게 찍어서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명함은 원치 않더라고요. ‘엄마 누구나 하는 거 아니야?’ 그러죠. 엄마들마다 다 각기 다른 개성이 있는데…….” 선옥씨는 일을 하며 내내 명함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 학부모 상담을 하며 명함이 없다는 이유로 실망하는 것을 느끼기도 했고, 명함을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선옥씨의 고민은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다. “명함을 갖는다는 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그 일에 책임을 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여기(명함)에만 머무를까봐 고민하고 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과연 이것만일까. 저는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스스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게 해주고 싶거든요.”

선옥씨는 말했다. “딸이 저한테 인생 시즌 2를 시작한 것 같다고 하는데. 저는 시즌 2라기보다 제 인생이 이제야 온전해진 것 같아요. 나를 위한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명함이)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게 사실 저는 제가 명함이에요. 제 자신이.”

손녀딸의 돌상을 엎어버릴 정도로 남존여비가 심한 분위기에서 자랐지만, 반듯하게 자란 선옥씨의 딸과 아들은 선옥씨를 이렇게 부른다. 이죽자 여사. ‘이 죽일 놈의 자신감’의 줄임말이다. 이죽자 역사는 설레는 마음으로 60대를 준비하고 있다.(이선옥은 가명이다. 그는 본명 대신 어머니의 이름을 이 글에 남기고 싶다고 했다.)

■이야기 할머니 이안나

이안나씨(64)는 봄을 기다리고 있다.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확산으로 당장 내일 일정을 알 수 없지만, 어린이집이 무사히 개원해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안나씨는 3년차 ‘이야기 할머니’다. 올해는 어린이집 한 곳과 유치원 두 곳에서 활동할 계획이다.

안나씨는 문화체육관광부 사업으로 한국국학진흥원이 뽑는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선발 공고에 응모해 2020년 12기 이야기 할머니로 뽑혔다. 전국에서 1000명을 뽑는 공고에 6900명이 지원할 만큼 경쟁률이 치열했다. 서류전형부터 실기시험(동화구연), 면접전형까지 통과했다. 안나씨는 “딱딱해 보이는 면접위원들이 앉아있던 면접은 망쳤다고 생각했지만, 3분 분량의 동화를 구연한 실기시험은 완벽하게 해냈다”며 활짝 웃었다. 실기시험 때 구연한 동화는 <책을 만 번이나 읽은 아이, 김득신>. 안나씨는 “동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느라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이안나씨가 2021년12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에게 <말하는 남생이> 이야기하는 모습. 안나씨는 2020년부터터 ‘이야기 할머니’로 활동하고 있다. /이안나씨 제공

이안나씨가 2021년12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에게 <말하는 남생이> 이야기하는 모습. 안나씨는 2020년부터터 ‘이야기 할머니’로 활동하고 있다. /이안나씨 제공

이안나씨가   ‘이야기 할머니’  출근 복장을 하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

이안나씨가 ‘이야기 할머니’ 출근 복장을 하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

서울 신촌에서 4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안나씨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또래의 친구들이 딸이라고 차별받을 때, 안나씨의 부모님은 달랐다. 아버지가 퇴근할 때 전병(과자)을 한 봉지 사오면 절반은 안나씨의 것이었고 나머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나눠먹었다. “막내 사랑이 지극하셨다”고 안나씨는 기억했다. 남녀차별은 결혼을 하고서야 경험했다. 시댁은 아들과 딸에 대한 구별이 확실했다. 결혼 후 6년 만에 첫아이를 가진 안나씨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귀한 딸 둘을 낳았다. 둘째 며느리라 딸만 낳았다는 타박은 피해갔다. 성실한 남편과 두 딸을 행복하게 키웠다.

안나씨의 40대는 봉사로 채워졌다. 성당 노인대학 등에서 20여년을 활동했다. “힘들다는 생각은 못하고 그냥 빠져있었던 것 같아요.” 노인들을 보면서 안나씨는 자신의 노후도 생각했다. 노인들은 서운한 것이 많았다. 안나씨는 누구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 애썼다. “내가 즐거워서 하는데 저분들은 고맙다고 하시네. 그런 마음이었어요.”

돈을 버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웃과 함께하는 것은 안나씨 인생의 중요한 ‘일’이었다. 부지런한 안나씨는 요양보호사 자격증과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고, 지난해엔 중랑구에서 운영한 복지대학(사회복지학) 과정도 수료했다. 이 모든 것이 안나씨에겐 소중한 ‘명함’이다.

이안나씨가 집에서 ‘이야기 할머니’ 수업 준비를 하고 있다. 마음이 깊은 안나씨는 늘  이웃들의 춥고 아픈 곳을 구석구석 살핀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이안나씨가 집에서 ‘이야기 할머니’ 수업 준비를 하고 있다. 마음이 깊은 안나씨는 늘 이웃들의 춥고 아픈 곳을 구석구석 살핀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이야기 할머니는 안나씨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수업 준비가 쉽지 않았지만 매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할 곳이 있다는 사실에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아이들을 보니까 다들 특성이 다르더라고요. 한 아이는 조금 경계에 있는 친구였어요. 혼자 딴짓을 하고 조금 불안해 보였어요. 그 아이로 인해서 반 분위기가 흐려지고… 선생님들도 조금 어려워했던 것 같아요. 제 느낌에 그 아이는 스킨십을 많이 해줘야 하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코로나 때문에 접촉에 한계가 있어서 제가 아이컨택트(눈맞춤)을 열심히 했어요.” 아이는 조금씩 안나씨에게 다가왔다. “방학이 끝나고 두 달 만엔가 만났는데, 아이가 경청을 너무 잘하는 거예요. 어떤 한 행동을 보고 ‘너는 싹이 틀렸어’ 그럴 게 아닌 거죠. 아이들은 정말 금방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저도 배웠어요.” 안나씨의 노동은 사랑이 되었다.

■관광해설사 김태순

경기도 수원시 화성의 행궁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태순씨가 행궁을 돌아보며 미소짓고 있다. heon@kyunghyang.com

경기도 수원시 화성의 행궁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태순씨가 행궁을 돌아보며 미소짓고 있다. heon@kyunghyang.com

김태순씨(69)는 수원 화성의 행궁해설사다. 관광객들을 안내하며 화성 행궁의 역사, 문화적 가치 등을 설명한다. 한국인 관광객도 안내하지만, 전문 담당은 일본인 관광객이다. 태순씨는 일본어로 한국 문화를 설명하고 통역한다. 태순씨는 40대 중반이 넘어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해 일본학을 공부하고, 일본어 1급 자격증도 땄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떤 학생들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악착같이 한 공부가 태순씨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태순씨가 태어나기 두 달 전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지뢰 사고로 순직했다. 아버지에게 노래 잘하는 재능을 물려받은 태순씨는 음악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큰오빠가 하던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서 집안 곳곳에 빨간 딱지가 붙었다. 태순씨는 작은 회사의 노무과에서 일했다. 산업재해, 생리휴가라는 말이 낯설었던 그때에도 태순씨는 근로기준법을 꼼꼼하게 익혔다. 열심히 일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종로의 학원에 가서 인테리어와 그래픽디자인을 배웠다. 그러나 법에는 없는 퇴직사유가 생겼다. 결혼과 동시에 회사는 그만둬야 했다.

신혼 초부터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아들과 딸을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았지만 태순씨는 답답했다. 남편은 “여자가 밖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통제가 심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고 살림하는 틈틈이 배우고 도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홈패션을 배우고 경기 이천시 어머니합창단에서 활동했다. 이천문화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도자기비엔날레 등에서 일했다. 수원으로 이사를 온 뒤엔 수원시 자원봉사센터에 찾아갔다. 3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고 문화해설사가 된 뒤, 일본어로 시험을 응시해 월드컵이 열린 2002년부터 행궁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1년에 한 번씩 태순씨는 현장 답사를 한 뒤 보고서를 쓰고 시험을 본다. 태순씨는 “동료들과 호흡을 맞춰서 일하는 것도 재밌고, 내가 가진 지식을 관광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굉장히 보람된다”고 말했다. 태순씨에겐 근사한 해설사 명함이 있다. 환갑이 되면서 남편과는 ‘졸혼’을 선택했다.

김태순씨가 일하는 관광안내소. 40대 이후 일본어와 일본학을 배운 한국인 관광객과 일본인 관광객을 담당하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김태순씨가 일하는 관광안내소. 40대 이후 일본어와 일본학을 배운 한국인 관광객과 일본인 관광객을 담당하고 있다. 이준헌기자heon@kyunghyang.com

태순씨는 “생각해보면 가만히 놀기만 한 때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식들도 “엄마는 늘 뭔가 배우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요즘도 해설사 일을 위해 끊임없이 역사 공부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지만 태순씨는 새로운 70대를 준비하고 있다. 따로 정년이 있는 직업은 아니지만, “현장에 갔을 때 관광객들이 나이 드신 분이 나오면 부담스러워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배 해설사들을 위해 오래 한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태순씨는 요즘 그림을 그린다. 사진을 찍고 마음에 담긴 풍경들을 자유롭게 그리고 있다. 태순씨의 열정과 새로운 꿈이 태순씨를 어떤 문으로 이끌지는 누구도 아직은 모른다.

<시리즈 끝> *지금까지 젠더기획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젠더기획 특별취재팀

장은교(젠더데스크) 이아름·심윤지(플랫) 조형국·이수민(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 이하늬(정책사회부) 이준헌(사진부) 최유진(뉴콘텐츠팀) 김윤숙(교열부)



[젠더기획]오늘도 출근하는 언니들 "나는 내가 명함이에요. 내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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