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태풍에 ‘평소처럼’ 출근···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조해람 기자

“태풍보다 일찍 출근하라는 회사?
우리 회사”

- 직장인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

“같은 동네 다른 회사는 재택 하라고 새벽부터 문자했다던데, 우리 회사는 알아서들 늦지 않게 잘 출근하라고...”

- 직장인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

태풍 ‘힌남노’가 한국을 할퀸 5~6일 직장인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라온 한탄입니다. 정부와 언론은 이번 태풍이 ‘역대급’이라고 여러 차례 주의를 당부했지만, 직원들에게 ‘평소처럼’ 출근하라고 안내한 회사도 적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직장에 몸을 끌고 출근해야 한다는 ‘프리젠티즘’ 때문입니다.

1990년 9월 폭우로 침수된 도로에서 시민들이 뗏목 등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KBS뉴스

1990년 9월 폭우로 침수된 도로에서 시민들이 뗏목 등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KBS뉴스

힌남노는 예상보다 이른 6일 오전 동해안으로 빠져나갔지만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심각한 침수·강풍 피해를 안겼습니다. 이날 오전 경북 포항시 도로 폐쇄회로(CC)TV를 확인해보니 시내 곳곳 도로가 물에 잠겨 차량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주는 강풍에 나무가 뽑히고 보트가 날아갈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6일 오전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경북 포항시 남구 한 주택가가 침수돼 있다. 연합뉴스

6일 오전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경북 포항시 남구 한 주택가가 침수돼 있다. 연합뉴스

도로가 침수된 상황에서도 출근을 강요해 갈등이 생겼습니다. 폭우 피해가 컸던 경북 포항에서는 택배기사들과 대리점주들이 ‘폭우 상황을 지켜보다가 현장 작업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뒤에 출근한다’는 취지로 합의했는데요. 태풍이 빠져나가지도 않은 6일 오전 6~7시쯤부터 일부 대리점에서 기사들에게 출근을 강요해 기사들이 항의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원경욱 택배노조 CJ대한통운 포항지회장은 이날 오전 기자와 통화에서 “포항 시내 중심가 위주로 침수 피해가 컸다. 진입할 수 없는 곳도 많고, 명절 특수까지 몰려 오늘 물량을 전부 소화하기는 어렵다”며 “조금 있으면 또 혹한기가 온다. 재난 상황에서 기사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책을 (실제 결정권을 가진)CJ대한통운이 마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프리젠티즘’

어떤 상황에서도 직장에 직접 출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이라고 합니다. ‘영혼없는 출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학자들은 대체로 “신체적·정신적으로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에도 직장에 출근해 업무를 수행해 성과가 저하되는 현상”으로 정의합니다. 2000년대 초반쯤부터 유럽 등에서 연구되기 시작해 아직 생소한 용어입니다.

연구결과들은 프리젠티즘이 직장의 조직문화를 경직시키고 생산성을 깎으며, 노동자의 건강을 해치는 등 악영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성과 압박이나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있거나, 눈 밖에 났다간 인사 불이익을 받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처지 등 때문에 억지로 나오게 된다고 합니다.

그간 프리젠티즘은 주로 질병·부상과 관련해 중점적으로 연구됐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더 활발히 논의되고 있죠. 그런데 지난 8월 초 기록적인 폭우가 수도권을 강타하면서 ‘재난 상황에서의 프리젠티즘’에 관한 이야기가 한국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차가 침수될 정도의 비가 쏟아졌는데도 ‘평소처럼’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많았거든요.

지난달 9일 오전 강남구 대치역 인근 도로에 지난밤 폭우로 침수된 차들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9일 오전 강남구 대치역 인근 도로에 지난밤 폭우로 침수된 차들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 연합뉴스

당시 잡플래닛이 수도권 직장인들을 상대로 설문한 결과, 폭우로 도로가 마비되다시피 한 지난 9일 직장인 38.3%는 정시출근을 해야 했다고 답했습니다. 출근 시간과 관련해 ‘아무런 안내가 없었다’는 응답도 41.7%에 달했습니다. 직장인들은 설문조사에서 “아무리 정기회의하는 요일이라지만 천재지변이 일어났는데 아무 통보 없는 건 너무했다” “정상출근을 하더라도 확인을 위한 안내를 제때 해주었으면 좋겠다” 등 불만을 토해냈다고 합니다.

재난상황인데도 ‘늦었다’며 갑질을 한 사례도 들려왔습니다. 직장갑질 제보 채널을 운영하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공개한 사례를 보면, 한 계약직 직원은 8월 초 폭우로 2분을 늦었지만 “회사에 놀러 다니냐”는 질책과 함께 시말서 제출을 요구당했다고 합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한병철 『피로사회』(2012, 문학과지성사) 한국어판 서문 中

‘상황이 어떻든 꼭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은 한국에서 특히 심하다고 합니다. 압축성장의 경험은 집단주의·가부장적 조직문화를 뿌리내렸고, 성과주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전병윤 광주대 회계세무학과 교수는 2017년 경영경제연구에 발표한 ‘프리젠티즘의 연구 동향 분석과 실무적 시사점’에서 “우리나라의 근로현실은 집단주의와 가부장적 성향이 강한 문화적 특성을 보유하고 있고, 단기간 경제발전을 이루어 낸 원동력인 근면함을 바탕으로 컨디션이 안 좋아도 출근하여 장시간 노동 관행에 익숙해 있다”며 “앞으로 지속적 관심이 필요한 분야이고, 특히 한국적 맥락을 통한 이 분야(조직문화) 연구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재난안전도 ‘양극화’···함께 안전할 수 없을까

정부도 손을 아주 놓고 있는 건 아닙니다. 고용노동부는 힌남노에 대비해 건설 현장 안전관리에 철저한 주의를 당부했고, 사업장 재택근무·유연근무와 출퇴근 시간 조정 등을 권고했습니다. 힌남노 때문에 유치원·어린이집이나 학교가 쉬어서 급히 자녀 돌봄이 필요한 노동자들에게 가족돌봄휴가를 허용해야 한다고 각 사업장에 안내하기도 했습니다.

제11호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폭우가 쏟아진 6일 경북 경주 톨게이트 앞 도로가 침수돼 차량이 통제되고 있다./문재원 기자

제11호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폭우가 쏟아진 6일 경북 경주 톨게이트 앞 도로가 침수돼 차량이 통제되고 있다./문재원 기자

하지만 재택근무 같은 대책도 회사 규모에 따라 양극화돼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비대면 시대 일하는 방식의 변화와 일·생활균형’ 자료를 보면, 업종 규모가 작을수록 재택근무 시행 비율이 낮았습니다. 재택근무를 하지 않는 비율은 300인 이상 규모는 51.1%, 100~299인 규모는 67.4%, 30~99인 규모는 72.5%로 나타났습니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에 혜택이 집중된 셈이죠.

지역별 재택근무 미시행 비율도 전라권 87.2%, 강원권 78.6%, 경상권 76.8%, 충청권 68.4%, 수도권 58.8%로 수도권이 가장 낮았습니다. 기본급이 적어 특근비와 잔업수당을 받아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제조업 현장직이나, 일한 만큼 돈을 받는 택배·배달 등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쉬고 싶어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처지이기도 합니다.

노동계는 힌남노와 같은 ‘역대급’ 자연재해 상황이 닥칠 때는 작업중지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가전통신노조는 지난 5일 가전제품 설치·수리기사나 방문점검원 등의 안전을 위해 작업중지권을 보장하라고 각 업체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작업중지권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로, 노동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불이익을 받아선 안 됩니다.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향해 북상 중인 지난 5일 부산 민락수변공원 해안에 파도가 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향해 북상 중인 지난 5일 부산 민락수변공원 해안에 파도가 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택배노조도 같은 날 5개 택배사(CJ대한통운, 우정사업본부, 롯데글로벌로지스, 한진, 로젠)와 국토교통부·고용노동부에 공문을 보내 “역대급 규모의 태풍에 택배노동자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며 집하와 하차 업무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배달플랫폼노조도 지난 2일 주요 배달플랫폼 3사(배달의민족·요기요·쿠팡이츠)에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에 상륙해 구체적인 영향을 발휘하면 배송서비스를 중단해달라”는 공문을 보냈고, 3사는 태풍 피해가 심할 경우 서비스 중단을 하겠다는 취지로 답했습니다.

‘일 한 만큼’ 소득을 얻는 특수고용노동자도 재난 상황만큼은 안전하게 작업을 멈출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라이더유니온은 지난 5일 성명을 내 “소득 때문에 무리하게 일을 하는 배달노동자와 이를 요구하는 자영업자와 배달대행사가 존재하기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며 “배달노동자들과 일부 자영업자들이 가입한 고용보험을 이용해 일시적 실업에 따른 실업급여를 제공하는 등, 기후재앙에 따른 배달 중단을 대비하기 위한 사회보험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함께 읽을 만한 경향신문 기사를 소개합니다😊

·폭우에도 출근하면 어류?···2분 늦어도 혼나는 ‘K-직장인’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81412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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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연간 병가 일수가 고작 1.2일···“아픈데도 일 나가야 하는 시대의 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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