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게손 논란’ 뿌리 측 첫 인터뷰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제기된 게임 캐릭터의 이른바 ‘집게손가락 논란’이 음모론에 불과한 정황이 추가로 확인됐다. ‘메이플스토리’의 엔젤릭버스터(엔버) MV 콘티뿐만 아니라 스튜디오 뿌리의 다른 영상들도 남성 감독이 연출하고 그린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뿌리 총감독으로 캐릭터의 움직임을 만들고 검수한 이는 에미상을 수상한 유명 남성 애니메이터 김상진 감독과 해외 팬덤이 두터운 최인승 감독으로, 이들은 “감독 의도에 반해 애니메이터가 임의로 특정 장면을 삽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당초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뒤 퇴사한 것으로 알려진 A씨는 현재 퇴사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넥슨이 남초 커뮤니티 주장에 따라 엔버의 손가락 모양을 ‘남성혐오’로 규정하자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사무실로 찾아오는 등 위협했고, A씨를 포함한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퇴사 소식이 담긴 2차 입장문을 냈다는 게 뿌리 측 설명이다. 총 매출의 80퍼센트를 쥐고 있는 원청사에게 ‘납작 엎드리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고도 했다.
뿌리 측은 음모론에 반박할 자료가 “차고 넘치는”데도 여론과 넥슨의 압박에 입을 열지 못했다고 했다. 원청사는 해명의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이미 심판이 끝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용기를 낸 이유에 대해 뿌리 측은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고 했다. 3일 구로구 뿌리 스튜디오에서 김 감독과 장선영 대표, 일러스트레이터 A씨를 만났다. 뿌리 측 관계자들이 이번 일과 관련해 입을 연 것은 처음이다.
40·50대 남자가 그렸다
김 감독은 이번 사태에 대해 “30년 애니메이터 인생이 부정당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2007년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아바타-아앙의 전설>로 제59회 에미상을 받은 베테랑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그는 2015년 <아바타-더 레전드 오브 코라>를 연출한 최 감독과 함께 뿌리를 창업했다. 김 감독은 “작업 과정을 이해하면 이번 논란이 얼마나 황당한지 다들 이해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논란이 된 그림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했다.
김 감독은 문제가 된 메이플스토리 엔버의 손가락 논란부터 설명했다. 해당 프로젝트는 지난 9월 넥슨이 광고회사 B사를 통해 뿌리 측에 작업을 의뢰했다. 통상 원청사는 캐릭터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지문을 대본 형식으로 적어 하청사에 보내는데, 이번의 경우에도 넥슨 측이 장면마다 구체적인 예시 일러스트를 첨부한 것으로 파악됐다. 마감 기한이 촉박했던 뿌리 측은 40대 애니메이터 C씨에게 콘티 작업을 부탁했다. C씨는 넥슨으로부터 건네받은 참고 이미지들을 바탕으로 콘티 초안을 만들었다.
C씨가 만든 초안을 검수한 뒤 프로젝트를 총 연출한 건 김 감독이었다. 총감독의 역할은 캐릭터의 움직임 전체를 하나하나 구상하는 것이다. 김 감독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콘티로 그리면, 이 그림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하는 게 A씨와 같은 애니메이터의 역할이다. 당시 그려진 콘티에 따르면 C씨와 김 감독은 엔버가 왼쪽 손으로 반쪽짜리 하트를 만들면 여기에서 하트가 나오는 장면을 구상했다. 집게손가락 논란이 된 장면과 같은 장면이다.
김 감독은 “총감독은 장면을 연출할 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 단계마다 검사하는 역할도 한다”고 했다. 통상 애니메이션 만들 땐 ‘콘티 연출→1원화 작업→2원화 작업→작화감독→동화·스캔→색지정→촬영’의 과정을 거치고, 각 단계가 끝날 때마다 ‘감독 체킹’이 이뤄진다. 작업과정에서 김 감독이 최소 4번의 검수를 한다는 뜻이다.
일각의 주장대로 애니메이터 A씨가 ‘은근슬쩍’ 집게손가락을 넣으려면 콘티를 임의대로 수정한 뒤 김 감독의 눈을 4차례 피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 넥슨도 콘티를 포함해 8차례 이상 검사·확인 과정을 거친 것으로 파악됐다. 넥슨 측은 20명 가까운 기획팀이 외주 업체가 만든 최종 결과물을 검수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의 눈도 모두 피해야 한다. 김 감독은 “커뮤니티의 음모론이 말이 되려면 트위터 아이디도 없고 손가락이 무슨 의미인지,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는 제가 집게손가락을 음흉하게 넣었어야 한다. 거기에 넥슨도 동의했어야 하는 것”이라며 “상식적으로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김 감독은 논란이 된 ‘던전앤파이터’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도 “황당하다”고 말했다. ‘던전앤파이터’는 지난달 26일 ‘문제 애니메이션 중간 조사결과 안내’라며 23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은 이 사진들 중 ‘마계 화합’ 영상 일부 장면을 대표적인 ‘집게손가락’ 증거로 꼽아왔다. 해당 캐릭터가 왼손을 부자연스럽게 집게손가락 모양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콘티와 원화 확인 결과 이 캐릭터는 집게 모양으로 손가락을 굽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콘티에 따르면 이 캐릭터는 무언가를 보고 놀라며 손을 펴고 있는데, 채색 과정에서 손가락 경계선이 흐릿해지면서 ‘집게손가락’처럼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마계 화합’ 장면뿐만 아니라 ‘선계 시네마틱’ 등 논란이 된 장면 모두 김 감독과 최 감독이 연출하고 검수했다.
김 감독은 “손을 쥐고 펴는 과정에서 손가락 다섯 개가 한 번에 펴지지 않는다”면서 “당연히 이 과정 중 한 장면을 캡처하면 집게손가락과 유사한 모양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논란 이후 손가락을 한 번에 확 피거나 한 번에 다 접는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연출하게 됐다”면서 “너무 답답해서 작업 과정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검증 없이 압박한 넥슨···논란 일자 ‘꼬리자르기’
넥슨은 2017년부터 7년간 함께 한 뿌리 측에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대신 사과문을 올리라고 했다. 녹취에 따르면 넥슨 측은 음모론이 확산한 다음날인 지난 26일 오후 3시39분, 장 대표와 통화하면서 “의견을 드리는 게 조심스럽다”면서도 “사과를 해주시는 게 뿌리 측에서 (넥슨에) 해줄 수 있는 배려”라고 했다. 이어 “최대한 빨랐으면 좋겠다”며 “엄격하고 낮은 자세로 커뮤니케이션 해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뿌리 측은 넥슨의 요청대로 오후 4시12분 1차 사과문을 올렸다. 입장문에서 뿌리는 “(손가락 모양이) 동작과 동작 사이에 이어지는 것이지 의도하고 넣은 동작은 절대 아니”라면서 “해당 스태프는 키 프레임을 작업하는 원화 애니메이터로 저희가 하는 모든 작업에 참여하거나 이러한 동작 하나하나를 컨트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3시간 뒤인 같은 날 오후 7시 김창섭 넥슨 메이플스토리 총괄 디렉터는 유튜브 방송으로 “맹목적으로 타인을 혐오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몰래 드러내는 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에 단호히 반대한다”면서 “뿌리와 관련된 조사 결과에 따라 메이플뿐만 아니라 회사 차원에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다. 넥슨은 27일 오후 2시36분 뿌리 측에 법무팀을 보낼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넥슨이 남초 커뮤니티 주장에 따라 엔버의 손가락 모양을 ‘남성혐오’로 규정한 뒤 뿌리 측에 책임을 묻겠다고 강경 대응을 예고하자 집단적인 괴롭힘이 시작됐다. 신남성연대는 지난달 26일 유튜브 커뮤니티에 “해당 페미 직원 해고 및 확실한 법적 조치를 하지 않을 시 사무실 앞에서 한 달 내내 텐트 치고 농성은 물론 단식투쟁 삭발까지 한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디시인사이드 이용자들은 뿌리 사무실에 찾아와 A씨를 찾거나, 다른 직원들의 얼굴을 무단으로 찍어 유포했다. 일부 이용자들은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기도 한 것으로 파악됐다.
장 대표는 A씨와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A씨가 퇴사했다는 내용의 2차 입장문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장 대표는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회사로 찾아오다 보니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됐다”면서 “칼부림 같은 끔찍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안전을 위해 A씨와 합의한 뒤 2차 입장문을 올렸다”고 했다.
원청사인 넥슨의 압박도 숨통을 조였다고 한다. 장 대표는 “뿌리 전체 매출의 80퍼센트가 넥슨과 넥슨 계열사들에서 나온다”면서 “디렉터가 강경대응 메시지를 내고, 법무팀을 보내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별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납작 엎드리라’는 압박에 뿌리 측은 2차 입장문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참담하고 뼈저리게 인지하고 책임을 통감했다”면서 “특정 성별을 혐오하는 작품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는 것에 대해 인지하고 퇴사를 결정했다”고 했다.
지난 30일 넥슨이 뿌리를 압박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넥슨 측은 “(담당) 직원의 잘못된 의사전달”이라고 뿌리 측에 해명했다. 넥슨 관계자는 경향신문 보도를 언급하며 “사과를 강요하거나 법적 대응을 안내했다고 그러던데 저희 직원 중 그런 사람이 있었냐”고 물었다. 이에 장 대표가 “법무팀이 나갈 거라고 (직원에게) 들었다”고 하자 이 관계자는 “결정된 게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 직원의 잘못된 의사 전달”이라고 했다.
“사이버불링보다 작품이 폐기된 게 더 괴롭습니다”
A씨는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이 사상검열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A씨는 “지난해 페미니스트가 정부에서 돈 받는 조직이라 활동이 사그라들 것이란 글이 트위터에 올라왔는데,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글을 올렸었다”면서 “그게 논란이 된 트위터 글”이라고 했다.
A씨는 지난해 3월11일 “남자 눈에 거슬리는 말 좀 했다고 SNS 계정 막혀서 몸 사리고 다닌 적은 있어도 페미 그만둔 적은 없다”면서 “은근슬쩍 스리슬찍 페미 계속해줄게”라고 올렸다. 답변 형식으로 단 글이 맥락이 제거된 채 캡처돼 온라인 커뮤니티에 유포됐고, 마치 A씨가 집게손가락을 몰래 넣었다고 자인한 것처럼 오독됐다는 것이다.
장 대표는 “엔버 영상의 노래를 부른 사람이 페미니스트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페미 꺼져라’는 댓글이 달린 게 시작”이었다면서 “이후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메이플에 페미가 묻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뿌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고 했다.
사이버불링의 표적이 된 뒤 A씨는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A씨는 “불안 증세가 있어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면서 “불안해지면 약 먹고 잠을 잤다. 속이 쓰려서 밥 한 끼를 못 먹었다”고 했다. A씨는 트위터 글이 퍼진 직후부터 각종 모욕성 발언이 담긴 메시지를 받고 있다고 했다. 지난 29일엔 디시인사이드에 A씨 얼굴과 카카오톡 아이디가 유포되기도 했다.
A씨는 커뮤니티의 공격보다 괴로운 건 애써 만든 작품들이 폐기됐다는 점이라고 했다. A씨는 “내가 그리지도 않은 그림을 놓고 내가 집게손가락을 넣었다고 하는 것도 억울하지만, 여태 만든 작업이 내려갔다는 게 너무 슬프다”며 “뿌리에 입사해 그림 실력이 많이 늘어서 기뻤고, 연말엔 포트폴리오 영상도 만들기로 되어있는데 물거품이 됐다”고 했다. A씨는 “넥슨이 악성 유저들의 말은 믿으면서 몇 년간 함께 작업한 우리 말은 듣지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