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에게 놀 권리를 허하라

그가 놀이기구 타기까지, 3142일이 걸렸다

이홍근 기자    정효진 기자

에버랜드 탑승 거부에 ‘부당한 차별’ 소송

8년 싸움 승소한 시각장애인 김준형씨

“안전벨트 비닐이 안 벗겨져 있네요. 새 차인가 봐요?”

부축을 받고 차에 올라선 김준형씨(31)는 차 곳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자리를 고쳐 앉은 뒤, 김씨는 휴대전화를 열어 에버랜드로 가는 지도를 펼쳤다. 화면을 툭툭 치자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남은 거리를 안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착까지 49km. 차로 1시간40분이면 갈 거리지만, 김씨가 이곳에 가기까지는 3142일이 걸렸다.

8년6개월 전 에버랜드는 김씨의 놀이기구 탑승을 거부했다. 1급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였다. 어릴 적 몇 번이나 탔던 놀이기구인 데다 위험한 일도 없었다고 설득했지만 에버랜드는 듣지 않았다. 김씨는 2015년 “부당한 차별”이라고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지난달 김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에버랜드로 향하는 내내 김씨는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개선장군처럼 돌아가는 거죠. 8년 걸렸으니까 8번씩 탈까요?”

놀이기구 탑승을 제지당한 뒤 에버랜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던 1급 시각장애인 김준형씨가 3일 승소 판결 후 처음으로 에버랜드를 찾아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정효진 기자

놀이기구 탑승을 제지당한 뒤 에버랜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던 1급 시각장애인 김준형씨가 3일 승소 판결 후 처음으로 에버랜드를 찾아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정효진 기자

1심 “위자료 지급, 가이드북 수정”
2심도 같은 결론…상고 없어 확정
해외선 탑승 제한 없는 경우 많아

장애인의 날 다시 찾은 에버랜드
“인력 지원 등 장애 친화적 변화를
아빠가 되면 아이랑 함께 올 것”

세계 장애인의 날이던 지난 3일, 김씨가 다시 찾은 에버랜드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김씨는 어떤 동선으로 기구를 탈지 꼼꼼히 계획했다. 포털 사이트에서 ‘에버랜드 놀이기구 타는 순서’를 검색한 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블로그 후기를 들었다. “스카이웨이로 이동해서 렛츠 트위스트, 롤링 익스트레인, 허리케인…”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졌다. 8년간 방문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놀이기구가 재미있고, 어떤 놀이기구가 무서웠는지 기억이 생생했다. 김씨는 이날 함께한 여자친구 김모씨에게 들뜬 목소리로 각 놀이기구의 특징을 설명했다.

이동을 위해 탄 리프트 ‘스카이웨이’가 김씨의 첫 번째 놀이기구였다. 김씨는 안전바를 꽉 잡고는 “여기가 몇 층 정도 되는 높이냐”고 물었다. 정확한 높이를 알 수 없지만, 지상과 다른 차가운 공기가 까마득한 발아래를 짐작게 했다. “무섭다. 내가 이러려고 소송했나 싶다.” 김씨의 두 손은 땀에 젖어 축축했지만, 그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있었다.

3일 승소 이후 처음으로 에버랜드를 방문한 김준형씨가 휴대전화로 ‘에버랜드 놀이기구 타는 순서’를 검색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3일 승소 이후 처음으로 에버랜드를 방문한 김준형씨가 휴대전화로 ‘에버랜드 놀이기구 타는 순서’를 검색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3일 승소 이후 처음으로 에버랜드를 방문한 김준형씨가 놀이공원 내 이동을 위한 리프트 ‘스카이웨이’에 탑승해 있다. 정효진 기자

3일 승소 이후 처음으로 에버랜드를 방문한 김준형씨가 놀이공원 내 이동을 위한 리프트 ‘스카이웨이’에 탑승해 있다. 정효진 기자

‘렛츠 트위스트’ 앞에 선 김씨의 얼굴은 한층 더 상기됐다. 공중에 매달린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 때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앞선 이들의 비명이 잦아들자 김씨의 차례가 왔다. 김씨는 머리 위 안전바를 내린 뒤, 안전바 바깥의 은색 손잡이를 가볍게 잡았다. “이게 제일 안 무서운 것”이라는 김씨는 기구가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도 소리를 지르거나 몸을 웅크리지 않았다. 탑승을 마친 김씨는 “고생한 보람이 있다. 역시 재밌다”고 뿌듯해했다.

렛츠 트위스트는 8년 전 에버랜드가 김씨의 탑승을 거부했던 7개 놀이기구 중 하나다. 2015년 5월15일 에버랜드를 찾은 김씨는 친구들과 놀이기구를 타려 했으나 내부 규정 등을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가 타지 못한 놀이기구는 티익스프레스, 더블락스핀, 롤링익스트레인, 렛츠트위스트, 챔피언쉽로데오, 허리케인, 범퍼카였다.

3일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에서 방문객들이 놀이기구 ‘렛츠 트위스트’를 이용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3일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에서 방문객들이 놀이기구 ‘렛츠 트위스트’를 이용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3일 승소 이후 처음으로 에버랜드를 방문한 김준형씨가 놀이기구 ‘허리케인’에 탑승해 있다. 정효진 기자

3일 승소 이후 처음으로 에버랜드를 방문한 김준형씨가 놀이기구 ‘허리케인’에 탑승해 있다. 정효진 기자

한 달 뒤 김씨와 친구들은 에버랜드 운영사인 삼성물산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놀이기구 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장애인 차별이라는 취지였다.

1심 재판부는 2016년 에버랜드를 직접 방문해 현장을 검증했다. 재판부는 원고와 함께 롤러코스터를 탑승하고, 비상대피로를 이용했다. 현장을 본 재판부는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에버랜드가 2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고 ‘신체적 시각적으로 장애가 있으신 분들은 이용이 제한될 수 있다’는 안전가이드북을 수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에버랜드 측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지난달 2심 재판부도 1심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에버랜드가 원고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고, 안전가이드북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 탑승을 제한하지 않는 놀이공원이 해외에 다수 존재하고, 시각장애인이 놀이기구를 탑승해 사고가 발생한 사례도 찾기 어렵다고 했다. 에버랜드가 상고하지 않아 판결은 확정됐다.

3일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를 방문한 1급 시각장애인 김준형씨가 놀이기구 입장 안내 직원에게 우선 탑승권을 보여주고 있다. 정효진 기자

3일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를 방문한 1급 시각장애인 김준형씨가 놀이기구 입장 안내 직원에게 우선 탑승권을 보여주고 있다. 정효진 기자

8년 만에 에버랜드를 다시 찾은 지난 3일, 재판은 끝났지만 아직 60일의 조정기한이 남아있어 김씨는 모든 놀이기구를 탈 수 없었다. 장애인 복지카드로 탑승권을 발권하려 하자 에버랜드 측은 ‘동승자와 함께 탑승할 수 있는 기구’와 ‘아예 탑승 불가한 기구’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씨가 판결을 언급하며 우선탑승권을 사용하지 않고 줄을 서려했으나, 이 역시 불가능했다. 에버랜드 관계자는 “안전시설을 점검하고 내부 규정을 검토하는 상황”이라며 “내년 1월 중순에 소송 원고를 포함한 시각장애인들을 초대해서 탑승할 수 있게 하는 자리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동반인과 함께 탑승 가능한 렛츠트위스트, 허리케인을 한 번씩 더 탔다. 공중에서 거꾸로 매달렸다가, 빙글빙글 돌다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김씨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8년치 쌓였던 답답함이 조금은 풀렸을까. 김씨가 헝클어진 머릿결을 정리하며 “오늘은 다 탄 것 같다”고 했다.

김씨는 조정기한이 지나면 다시 이곳을 찾을 예정이다. 김씨는 “오늘 못 탄 놀이기구들이 있지만 소송에서 이겼으니까 품어줘야죠”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아빠가 되더라도 아이랑 함께 와서 추억을 쌓겠다”며 “무서워서 못 탄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냐”고 했다.

김씨는 아이와 함께 찾을 에버랜드는 좀 더 장애 친화적인 곳이였으면 한다고 했다. 그는 “점자 블록이 깔려있고, 인력지원이 돼서 활동지원사 없이도 혼자 지팡이 짚고 놀 수 있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희는 장애인이기 이전에 성인이고, 내 위험은 내가 감당하고 선택하며 책임지는 사람”이라며 “장애인을 수동적으로만 바라보는 인식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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