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지인들과 식당에 앉아 있는데, 군 장성이 관사의 공관병을 사노비처럼 부려먹었다는 TV 뉴스가 흘러나왔다. 일행 중 한 명이 자신도 공관병으로 근무했다며, 뉴스에서처럼 별별 허드렛일을 다 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알 수 없는 존재인 것이, 분명히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진심을 담아 일을 하고 있더란다.
“직접 시장에 가서 하나라도 더 좋은 거 사려고 흥정하고, 오늘은 무슨 반찬을 할까 고민하고. 그러다 갑자기 저녁에 외부 일정이 생겼다니까, 섭섭한 맘이 드는 거예요. 맛있는 거 차려놨는데…. 아니, 장교가 저녁 먹고 들어온다는데 내가 왜 섭섭한 거야? 진짜 황당하지 않아요?” 일행은 박장대소했다.
회사 다니는 게 너무 즐거워요. 일이 좋아 죽겠어요. 52시간이 뭐예요, 69시간, 120시간 계속 일하고 싶어요. 아마 이런 직장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 때문에 힘들고 괴로운 순간에도, 일 그 자체를 잘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작가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수용소에서의 강제노동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종종 내 동료들에게서 (가끔은 나 자신에게서도) 흥미로운 현상 하나를 발견했다. ‘잘된 일’에 대한 열망이 매우 뿌리 깊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주어진 것이 가족이나 자신에게 해롭고 적대적인 노동이라 할지라도 ‘잘하도록’ 무던히 애썼으며 ‘잘못’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필요할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뉴캐피털리즘>에서 “사람은 누구나 일을 제대로 해내려 노력함으로써만 스스로의 삶이 아무렇게나 흘러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인간은 기계와 다르게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자신만의 요령을 고안해내기도 하고, 시키지도 않은 새로운 시도를 이것저것 해보면서 더 나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려 애쓰기도 한다. 회사가 아무리 세세하게 업무지시를 한다고 해도, 노동자들이 정말 딱 주어진 일만 한다면 현실의 일터는 돌아가기 어렵다. 현실 일터에는 수많은 빈틈이 존재하고 그것을 매끄럽게 잇고 때로는 힘겹게 채워나가는 것은 인간, 노동자들의 몫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일하는 사람에 대해 보이는 존중은 턱없이 부족하다. 성취감과 자부심은커녕,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일하다가 몸과 마음을 다치는 노동자들이 여전히 너무 많다. 노동건강연대가 지난 3월 한 달, 언론에 보도되어 알려진 사망 사례를 집계한 것만 해도 69명에 달한다.
매년 4월28일은 세계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날이다. 국내에서는 달력에 표기조차 되어있지 않지만, 한국 사회가 금과옥조로 삼는 미국만 해도 노동부 산업안전보건청 홈페이지 첫 화면에 기념일 소개와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기념식 정보가 공지되어 있다. 국제노동기구는 기념일에 맞춰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노동기본권에 포함시킨 작년 6월 결의에 대해 논의하는 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0년 6월부터 2021년 3월까지 미국 48개주 1만3350개소의 요양시설에서 노동조합이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거주 노인 사망률을 비교, 연구한 결과가 흥미롭다. 노동조합이 있는 요양시설의 노인 사망률이 10.8% 더 낮았다. 숫자로 환산하면 약 8000명의 목숨을 구한 셈이다.
노동조합은 유행 초기부터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한 유급병가, 마스크와 보호장비, 검사와 모니터링, 감염자 격리 조치 등 노동자의 안전은 물론 노인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요구하고 실행을 감시했다. 이는 사업주가 시킨 것도, 고객들이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일을 잘해내기 위한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단결된 힘이 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세계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날 올해의 국제캠페인 구호는 마침 이것이다.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위해 노동조합을 조직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