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이 두 왕국의 시민권을 갖고 태어난다."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이렇게 씁니다. 건강의 왕국에만 머물 수 있는 시민은 없어요. 언제, 얼마나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은 '아픈 몸'의 숙명을 지닙니다.
조한진희 대표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하죠. 건강과 질병은 개인이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요. 개인이 노력을 덜 해서, 자기관리를 하지 않아서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몸은 애초에 다르게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 따라 질병에 더 취약해지기도 합니다.
누가 뭘 잘못해서 아픈 게 아니라는 걸, 사실은 다들 압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픈 몸을 미워합니다. 또 두려워합니다. 질병이 우리 삶에서 앗아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아픈 몸은 직장 생활에 적합하지 않고, 인간관계를 이어가기 어려우며, 건강할 때 누리던 많은 경험들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관념'이 우리 안에 박혀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아픈 몸들이 겪는 상실 중 많은 것들은, 아픈 몸을 '기준 미달'로 여기는 사회적 시선에서 발생합니다. '내몸잘' 기획의 다른
기사를 보면, 질병으로 인한 배제로 '사회적 통증'을 경험한 이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어요.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는 혜정씨는 직장에서 '꾀병' 취급을 받습니다. HIV 감염인 상훈씨는 스스로를 '더러운 몸'이라 여겼고요. 크론병이 있는 희제씨는 취업 서류 전형부터 고배를 마십니다.
우리가 삶과 일상이라 부르는 많은 것들이 '건강한 몸'을 기준 삼아 설계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질병과 함께 태어나고, 개인의 노력으로 질병을 이길 수도 없는데 우리 사회가 이토록 '아픈 몸'을 배척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건강하지 않을 때에도 삶을 잘 살아내고 싶은데, 그런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충분히 이야기해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마다 자기의 능력을 증명하느라 분투하는 세상입니다. 일터에서, 또 시장에서 내가 얼마나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사람인지 인정받기 위해 많은 이들이 애를 씁니다. 그 속에서 노화·장애·질병 등으로 생산성과 효율성을 증명하기 어려운 몸들의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질 수밖에 없어요.
이 증명의 분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묻게 됩니다. 더 생산적인 사람으로 인정 받고 싶어 안달했던 마음들이 결국 늙고 아픈 몸들의 자리를 좁히는 토양이 된 건 아닐까 걱정합니다. 지치고 아픈 내 몸을 게으르다 미워하며 탓했던 순간들이 혹 다른 몸에 대해서도 배제의 벽을 세운 건 아닐까 의심합니다.
능력과 증명 대신, 돌봄과 의존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주 듣고 싶습니다. 건강하거나 젊지 않아도, 남들 보기에 별 쓸모가 없어 보여도, 그냥 어떤 형태이든 간에 제 몸과 잘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