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이 안 보인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현존 최고의 록밴드로 꼽히는 아일랜드 출신의 유투(U2)는 누구보다 명작 앨범을 많이 내놓은 아티스트다. 히트한 곡들도 많지만 수작 앨범을 다수 발표했기 때문에 현실의 인기가수를 넘어 역사적 존재로까지 기억된다. 록 전문지 ‘롤링스톤’은 1987년 앨범 <조수아 트리>가 그들의 위상을 영웅에서 슈퍼스타로 끌어올렸다고 칭송했다. 이 음반은 그래미상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다.

음악가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단일곡 즉 ‘싱글’보다는 10곡 이상을 수록한 ‘앨범’이 자신의 음악적 자아와 예술성을 표현하는 데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체로 싱글을 제작할 때는 대중적 접근으로, 앨범은 예술적 지향으로 임했다. 지난 20세기를 대중음악의 시대로 만든 것은 분명 앨범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앨범 하나가 1억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것이 말해준다. 비틀스가 누리는 찬란한 영광은 <러버 솔>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애비 로드> 등 탁월한 명반을 만들어낸 덕이다.

[임진모칼럼]앨범이 안 보인다

그런 앨범의 위상이 근래에는 너무도 초라해졌다. 우리 음악계의 경우, 노래는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통상적 기준의 앨범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겨우 네다섯 곡이 든 미니앨범이 판을 치고 있다. 한 곡밖에 없는 싱글 앨범도 부지기수다. 설령 제대로 곡을 채운 앨범을 내더라도 과거처럼 1~2년 만에 신보를 내는 가수는 거의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디지털 싱글 시대로 바뀌면서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10곡 이상의 앨범제작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앨범을 공들여 만드는 수개월 수년 동안 급변하는 트렌드를 따라잡기도 어렵고 제작비 충당도 버거우니 한두 곡 뚝딱 꾸려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앨범이 팔리지 않아서다. 청소년 팬층이 두꺼운, 사정이 좋은 인기 아이돌 그룹이 오히려 규모를 갖춘 앨범을 출시한다.

앨범의 위기는 단지 음악매체의 변동이라는 규정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특정한 기간에 아티스트가 현실과 부딪쳐 숙성해낸 사고와 시도의 결과물이 앨범이라면, 그것의 위축은 곧 음악가의 후퇴와 예술적 마인드의 퇴보를 가리킨다. 강도를 높여 말하자면 앨범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아티스트가 없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앨범이 환영은커녕 냉대를 받는 현실에 아티스트는 맥이 빠지고 시름이 깊어간다. “이런 판국에 과연 앨범을 내야 하나. 어렵사리 앨범을 내봤자 별 반응도 없는데….”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무드에 넘치는 재즈풍 음악으로 유명한 영국 여가수 샤데이는 앨범 가치의 폭락에 심각한 갈등과 회의를 느낀 나머지 10년 동안 새 앨범을 내지 않았다. 마침내 2010년에 발표한 앨범의 한 수록곡에선 ‘난 지금 내 믿음의 경계에 처해 있고/ 헌신도 벽지에 갇혀 있고/ 이러한 내 자신 투쟁의 전선에서/ 난 그러나 아직 살아 있어…’라는 가사로 당시의 심적 고통을 절절하게 묘사했다. 예술성 추구라는 기본이 살아 있는 10년 만의 샤데이 앨범은 그해 평단의 수작으로 꼽혔다.

수록곡을 가득 채운 앨범을 보면 반갑다. 이효리는 올해 새 앨범 <모노크롬>에 무려 16곡을 실었다. 우여곡절의 과거를 넘어 앞으로는 아티스트로 뻗어가겠다는 의지가 작용하면서 앨범은 경력에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오디션 스타 존 박은 지난해 다섯 곡의 미니 앨범으로 데뷔하더니 올해 막 발표한 신작에는 11곡을 수록했다. 인기가 아닌 음악성이 자신의 의욕임을 선언한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인디 밴드에 진지한 음악수요자들이 몰리는 것은 주류 가수들이 미니앨범과 싱글을 내는 반면 그들은 온전한 ‘풀 앨범’을 선보이는 이유도 있다.

음악가가 물러난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자비한 상업성과 자본이다. 그렇게 되면 음악은 소비되는 게 아니라 삭제 당하고 만다. 어려운 줄 알지만 10곡 앨범을 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때로 형식은 실질을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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