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8월16일 진흥왕순수비 옮겨

이기환 사회에디터

“해발 500m 북한산 비봉에 세워진 신라 진흥왕순수비(국보 3호)를 국립박물관으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됐다.”

경향신문 1972년 8월16일자는 진흥왕순수비의 박물관 이전 소식을 전하면서 “순수비 자리는 사적 228호로 지정되고, 비의 자초지종을 알리는 표석이 대신 건립된다”고 덧붙이고 있다. 4일 전인 10일자 신문은 비석의 구체적인 이전 방법을 전하고 있다.

“문화재관리국은 확대간부회의까지 열었다. 험난한 코스 50m 간격에 비계공사로 철판을 깔고 차량통행이 가능한 3㎞ 지점까지 너비 1m의 도로를 닦아 6명이 옮기고…. 경복궁 근정전 회랑까지 27㎞는 8t 트럭으로 운반된다.”

[경향으로 보는 ‘그때’]1972년 8월16일 진흥왕순수비 옮겨

주지하다시피 진흥왕순수비는 한강 유역을 빼앗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영토개척을 기념하고 고구려와의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요승무학오심도차비(妖僧無學誤尋到此碑)’로 알려져 있었다.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를 물색하고 있을 때 잘못 찾아와 비석을 세웠다는 전설을 담고 있었다. 그러던 1816년 7월, 금석학자인 완당 김정희가 동네 친구 김경연과 함께 승가사에 놀러왔다가 문제의 비석을 발견한다.

“비면에 두껍게 이끼가 끼어 글자가 없는 것 같았다.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것 같아…. 시험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했더니 황초령비와 흡사했고, 또 진흥의 ‘진(眞)’자가 틀림없었다.”(김정희의 <완당전집> ‘진흥2비고(眞興二碑攷)’)

김정희는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다. 병자년 7월 김정희·김경연 와서 읽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라고 비석 측면에 새겨놓았다.

1200년 동안이나 ‘요승’(무학대사를 낮춰 부름)의 비석으로 잘못 알려졌음을 만천하에 알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듬해인 1817년 6월8일, 조인영과 함께 다시 북한산에 올라 마모된 글자 68자를 읽어냈다. 김정희는 “이것으로 무학비라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됐다”면서 “금석학이 얼마나 세상에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다”고 기뻐했다.

평소 ‘금석벽(金石癖)’, 즉 금석학에 빠졌음을 자부한 김정희로서는 희열의 순간이었으리라. 김정희는 또 다른 순수비인 황초령비와 <삼국사기> 기록 등을 검토한 끝에 무려 7000여자에 이르는 논문까지 발표했다. 이것이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다. 김정희는 귀신의 조화쯤으로 여겼던 돌도끼와 돌화살촉이 선사시대 생활도구이자 무기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야말로 타고난 고고학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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